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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림의 현대사진산책+] 다른 곳, 그리고 내가 본 것: 존 밀러×키키 스미스

VSF 존 밀러 ‘상상의 개입’, 서울시립미술관 ‘키키 스미스 ― 자유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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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43호 천수림(사진비평)⁄ 2023.03.03 09:45:26

(왼쪽부터) 존 밀러, '부재(Absence)'. 캔버스에 잉크젯 프린트, 아크릴릭, 101x75.5cm. 2022. 사진=VSF / 키키 스미스, '라스 아니마스'. 종이에 포토그라비어, 152.7×125.1cm. 1997. 이미지 제공=작가 및 유니버설 리미티드 아트 에디션

“나는 내가 걷는 세상이었고, 내가 본 것은 나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더 진실하고 더 이상한 자신을 발견했다.” (윌리스 스티븐스, ‘훈족의 궁전에서 차를 마시다’ 중에서)

사진 정보는 작가가 의도했던 것 그 이상을 얼마나 보여줄 수 있을까. 시각적 코드의 중첩을 극대화한 포토몽타주는 분명히 상상의 개입을 허용한다. 존 밀러는 사진과 회화를 통한 포토몽타주를 통해 상상의 개입을 시도하고, 키키 스미스는 사진과 공예의 결합을 통한 포토콜라주로 대상을 입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도록 이끈다.

존 밀러, 신비한 경계선

존 밀러의 작품이 전시된 모습. 사진=VSF

미국 작가 존 밀러는 오후 2시에서 4시 사이 베를린 도심을 걸으며 사진을 찍는다. 베리어스 스몰 파이어스에서 진행된 존 밀러의 ‘상상의 개입’은 아홉 점의 캔버스 작품과 벽면 비닐 그래픽 작업으로 이뤄졌다.

상상의 개입은 베를린 도심 전역에서 촬영한 특정한 장소들의 포토몽타주 모음이다. 작가가 정오부터 오후 2시 사이에 촬영한 ‘사회적으로 생산된 장소’로 제시하는 공공장소의 아카이브인 ‘미들 오브 더 데이’ 연작의 연장선 안에 있다.

베를린에서 여러 개의 마당으로 이어진 벌집 모양의 건축물 ‘모랄 멀티플리서티즈(Molar Multiplicities)’, 은빛 디스코 볼이 달려있는 강변의 버려진 디스코테크 ‘죽음의 전차’, 미지의 공간으로 이끄는 숲속 산책길 ‘키메라’에는 사진 이미지 위에 밀러의 회화적 흔적이 담겼다.

각 풍경이 여러 건물의 단면으로 만들어진 포토몽타주 위에 조각처럼 보이기도 하는 원, 사각형, 혹은 대문자 ‘아니오(NO)’와 같은 단어가 출몰한다. 이런 포토몽타주는 사진의 평면성을 적극적으로 해치는 의도된 제스처다. 많은 스트레이트 사진가들이 필름의 따뜻함을 찬양하는 반면, 그는 디지털의 차가움을 선호한다.

존 밀러. '모랄 멀티플리서티즈(Molar Multiplicities)'. 캔버스에 잉크젯 프린트, 아크릴릭, 75x101 cm. 2022. 사진=VSF

정오의 햇살 아래 도심은 텅 비어 있고, 차갑고 무표정한 건물과 숲으로 이어진 길에 툭 놓여 있는 ‘NO, O, 정사각형, 원형’으로 그려진 도형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익숙한 도심풍경이지만 사람을 비롯한 생명체는 등장하지 않고, 암호처럼 놓여있는 적갈색(구운 시에나토)의 거대한 도형은 건물을 압도해버리는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각 작품에서 돋보이는 것은 짙고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는 임파스토(유화에서 물감을 겹쳐 두껍게 칠하는 기법)이다. 이 '낯선' 지점에 선 우리들은 도대체 이 장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무표정하고 차가운 사진에 회화적, 조각적 요소가 가미된 이 이미지 속으로 들어가야 할지, 경계선 앞을 서성이게 된다. 이 무심하고도 신비한 경계선에서 우리는 각자의 기억과 상상을 개입시킬 수밖에 없다.

작가는 모든 이미지를 중형 포맷의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한 후 정사각형으로 보정했다. 소프트웨어의 자동 노출 모드는 조명과 콘트라스트를 체계적으로 최적화해 매우 사실적이고 인공적인 효과를 만들어 냈다.

존 밀러는 미술가이자 작가, 전시기획자,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밀러는 일상의 본질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를 드러내고 전복시키는 작업을 다학제적인 접근을 통해 실천해왔다. 밀러가 제시하는 공공장소는 명백한 눈속임(트롱프뢰유)이지만 우리에게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공간으로 인식된다. 이런 자연스러운 인지에 대한 의문은 작가의 오래된 관심사다.

존 밀러, '키메라(Chimera)'. 캔버스에 잉크젯 프린트, 아크릴릭, 76x101cm. 2022. 사진=VSF

나무와 평행 구도를 이루는 대문자 산세리프체의 ‘나(I)’는 밀러 자신을 가리키는 기표로 작용한다. ‘부재(Absence)’와 ‘키메라(Chimera)’에 등장하는 ‘NO’는 명백한 거부를 뜻하는 언어적 제스처다. 작가는 ‘F_매거진(Magazine)’ 인터뷰에서 I를 똑바로 세운 몸, 기둥, 1인칭 대명사라고 밝혔다. 위태로운 머리, 축, 몸통과 다리를 연상시키는 직립자세는 고대의 고전적인 기둥을 떠올리게 만든다.

‘O’는 ‘O의 이야기’와 ‘눈의 이야기’라는 두 권의 책에서 영감을 받았다. ‘O’는 눈, 항문, 외음부 등 다양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사진과 그림의 영역, 사적이거나 공적 영역 사이에 존재하는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작가의 시각적 상상의 개입에는 다양한 문학적 요소가 담겨 있다면, ‘NO’에는 9/11 테러 이후 부동산과 그 여파 및 재개발을 통한 공공 공간의 변화에 대한 그의 관심사가 반영됐다.

‘NO’라는 기표는 'NO! ART' 운동의 창시자인 보리스 루리(1924-2008)의 영향을 받았다. 보리스 루리는 예술이 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질 것을 요구하는 ‘NO! ART 운동’을 공동 설립했다. 이들은 예술이 인종 차별주의, 제국주의, 성 차별주의, 식민주의, 타락과 같은 당혹스러운 진실을 다룰 것을 요구했다.

존 밀러는 트롱프뢰유, 즉 일종의 눈속임과 착각을 일으키는 지점에 우리를 초대한다. 도시를 느끼는 것은 건물을 통과하고 주변을 느끼는 것인데 표면의 질감적 감각을 통해 도시를 경험하게 만든다.

키키 스미스의 영혼들

'키키 스미스-자유낙하' 전시전경.  사진=김윤재. 이미지 제공=서울시립미술관

한편,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1980~1990년대 여성성과 신체를 다룬 구상 조각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 온 동시대 미술 작가 키키 스미스의 아시아 첫 개인전, ‘자유낙하’전이 진행 중이다. 초기 여성주의 서사를 넘어 설화, 신화, 역사, 서사와 함께 엮어낸 조각, 판화, 사진, 태피스트리, 아티스트북 등 140여 점을 선보인다.

흥미롭게도 스미스는 사진매체를 다룰 때 자신을 저돌적으로 등장시킨다. 40여 년 아티스트로 살아온 키키 스미스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라 할 수 있다. 스미스는 1989년 뉴욕의 판화 스튜디오 유니버설 리미티드 아트 에디션(ULAE)과 협업하면서부터 작품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딘지 노려보는 듯한 흑백사진 속 여성과 빨강망토를 쓰고 있는 소녀로 보이는 컬러 사진을 마치 회화의 두폭화처럼 배치했다. 나란히 마주 보이도록 놓여있는 사진 한 장 ‘무제(두폭화)’는 흑백과 컬러, 어른과 아이, 털로 덮인 피부 등 모든 것이 대조적인데 이 사진은 동화 ‘빨간 망토’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늑대가 할머니인 척하며 결국 소녀를 잡아먹는 이야기인데, 사진 속 스미스는 늑대역할을 맡고 있다. 인간도 동물도 아닌 모습의 스미스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키키 스미스, '자유낙하'. 일본산 종이에 포토그라비어, 에칭, 사포질(표지_ 판지), 69×90.2cm. 1994. 이미지 제공=작가 및 유니버설 리미티드 아트 에디션

‘라스 아니마스’(1997)는 1997년 작가가 직접 포즈를 취하고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속 스미스는 마치 짐승처럼 공격적인 자세로 튀어나올 기세다. 보통 여성의 누드화와는 대조적이다. 아니마는 스페인어로 ‘영혼’이라는 뜻이지만 대체로 비이성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중세의 이상화된 매끄러운 누드와는 달리 핏줄과 주름 털과 모공이 드러나며 상처도 그대로 노출된다. 흥미롭게도 ‘아니마’는 동물의 어원이기도 하다.

‘컬로 노이즈’는 아코디언북 형태의 작품으로 위쪽엔 서로 다른 작가의 자화상 사진 5장을 일렬로 배치했고 아래쪽엔 수채화 이미지가 담겼다. 각도와 스케일을 달리한 사진을 입체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병치한 이 형식은 바우하우스 작가, 교육자인 조셉 앨버스의 포토콜라주에서 착안했다.

‘기타 등등’에서는 사진과 종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펜실베니아 창밖 설경을 찍은 사진의 하단(종이)에는 눈송이와 별이 표현됐다. 우측 글귀는 “얼음 속에서 나를 다시 잠들게 해다오”라는 내용으로 겨울의 황량함을 표현하고 있다.

키키 스미스 '무제(머리카락)'. 석판, 91.5×91.5cm. 1990. 이미지 제공=작가 및 유니버설 리미티드 아트 에디션

이외에도 다른 사진에는 해골 같은 모습으로 흐릿하게 인쇄되기도 하고,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만든 작품인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여자의 눈을 면도날로 잘라내는 공포어린 장면이 연상되는 모습까지 등장한다.

사진은 때때로 윌리스 스티븐스의 시 구절 “나는 내가 걷는 세상이었고, 내가 본 것은 나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더 진실하고 더 이상한 자신을 발견했다”처럼 우리를 다른 차원의 시공간으로 안내한다. 그곳에서 발견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것이다.

<작가소개>

존 밀러(1954년생,오하이오 클리블랜드)는 뉴욕과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미술가이자 비평가, 큐레이터, 음악가다. 1977년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에서 학사 학위 수여 후 휘트니 미술관 인디펜던트 스터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 후 1979년 캘리포니아 예술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수여했다. 그의 주요 개인전은 독일 빌레펠트 쿤스트할레, 베를린 슁켈 파빌리온, 신 베를린 쿤스트페어라인, 쾰른 루드비히 뮤지엄, 스위스 취리히 쿤스트할레, 벨파크 뮤지엄, 제네바 현대미술관, 프랑스 그레노블 르 매가진 현대미술관, 미국 마이애미 현대미술관 등에서 열렸다. 그의 비평 저술은 ‘아트포럼’, ‘옥토버’, JRP와 현대출판사에서 펴낸 ‘더 프라이스 클럽 선집: 1977-1996’과 ‘교환의 붕괴’ 등이 있다. 밀러는 현재 뉴욕 컬럼비아 대학 소속 바너드 칼리지에서 미술사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키키 스미스(1954년생, 미국)는 조각, 설치, 판화, 드로잉, 사진,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구상미술의 영역에서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해 온 독일 출생의 미국 작가다. 1970년대 후반에는 제니 홀저, 톰 오터니스, 카라 펄만 등과 함께 뉴욕의 행동주의 미술가 그룹인 콜랩(Colab, Collaborative Projects, Inc.)에 참여했다. 다양한 배경의 종교, 신화, 문학에서 도상을 취해 새로운 내러티브를 직조하는가 하면, 인간을 넘어 동물과 자연, 우주 등 우리 주변의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소재로 삼으면서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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