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6호 김금영⁄ 2023.04.19 14:39:31
“당신의 기억 속 아르코미술관은 어떤 장소인가요?”
아르코미술관 주제기획전 ‘기억·공간’은 이 질문에서 시작됐다. 이는 아르코미술관이라는 건물에 담긴 역사, 그리고 미술관이 위치한 장소의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아르코미술관이 위치한 장소는 옛 경성제국대에 이어 서울대 문리대가 자리했으며, 1960년 4.19혁명이 시작된 곳이다. 서울대가 관악으로 이전한 후 조성된 마로니에 공원 안에 모더니즘 건축을 대표하는 김수근 건축가의 설계로 1979년 미술관이 완공됐다. 이후 붉은 벽돌 건물은 바로 옆 아르코극장과 함께 대학로의 상징이 됐다.
동시대 미술을 위한 공공 전시장으로 신축된 미술회관(아르코미술관의 전신)은 1960~80년대 민주화 운동과 1990년대 이후 청년문화와 소비문화가 주도한 사회 변화 등을 목도하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처럼 아르코미술관은 다양한 역사를 거쳐 왔지만, 개개인이 겪은 아르코미술관에 대한 기억은 또 색다를 것이다. 전시는 이 다양한 지점에 접근한다.
국내외 작가 9명(팀)의 회화, 조각, 퍼포먼스, 영상, 사운드설치 작품이 아르코미술관 전시장을 비롯해 아카이브라운지, 프로젝트스페이스, 야외 로비, 계단, 통로, 화장실 등을 채운다.
전지영 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는 신작 23점으로 구성됐다. 작가들의 기억을 통해 미술관 공간을 연결, 활성화함으로써 미술관의 기능과 역할을 재조명하는 데 목적을 뒀다”며 “‘기억’이라는 키워드 그리고 ‘공간’을 매개로 경험하지 않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돌아보는 지점도 흥미롭다”고 설명했다.
작가들은 다양한 시간의 층을 가로지르며 미술관과 직접 관계 맺어온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기도, 미술관이 오랜 시간을 거치며 목격했을 법한 역사적 순간을 상상하기도 한다. 개인의 경험과 역사적 기록 속에 저장됐던 기억은 전시라는 형태로 미술관이라는 공공의 공간에 새로이 소환된다.
아르코미술관 공간과 관련된 기억 소환
가장 먼저 전시장 1층엔 황원해, 박민하 작가의 작품이 전시됐다. 이들은 특히 미술관 창문의 상징성과 기억에 주목해 눈길을 끈다. 도시 이미지를 작업의 주요 소재로 활용해온 황원해는 이번엔 회화 속에 아르코미술관 공간의 시간성과 사유를 담아냈다. 전시장 벽에 독특한 창의 모습이 담긴 회화 작품을 걸어뒀는데, 분명 벽엔 창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속 창을 통해 미술관 저 너머의 다른 세계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황원해는 “전시 제안을 받고 아르코미술관 공간을 떠올리다 보니 이 미술관 자체가 지닌 견고함과 수평적 구조, 그리고 안팎의 경계를 짓는 일종의 막인 창문이 떠올랐다”며 “미술관의 창은 그 경계에서 안과 밖에 대한 기억을 중첩하고 있다. 이 기억들의 레이어를 쌓아간다는 느낌으로 작업했다”고 말했다.
평소 풍경을 주제로 한 추상 작업과 소리, 공기, 날씨 등 무형의 요소를 가져와 기호화하는 작업을 이어온 박민하는 전시 공간에 마치 커다란 창이 달린 주사위를 굴려놓은 듯하다. 그는 아르코미술관의 정사각형 창문을 ‘미술관의 눈’으로 상정하고, 이를 각 면에 표현한 작품을 설치했다.
박민하는 “아르코미술관이 위치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1990년대 말 청소년기를 보냈던 기억이 있다. 당시 여러 브레이크 댄스팀, 교복 입은 학생들이 공원에 모여 빨간 바닥에서 공연했는데, 요란하고 강렬한 현장의 한켠에선 노인이 평온하게 공원을 즐기는 문화가 공존했다. 과거 존재했던 에너지가 사라지고, 현재는 쉼터로 새 모습이 나타났다”며 “미술관 창문은 이 기억들을 하나로 수렴하는, 일종의 대화의 장터로서의 기능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창을 미술관의 눈이라 생각하고 작업했다”고 말했다.
상상의 기억에 의해 새로 쓰이는 아르코미술관 이야기
2층엔 여러 상상력과 미술관에 대한 바람이 담긴 작품들이 전시됐다. 조소, 공예 등 다양한 기법과 스토리텔링을 결합해 오브제를 만드는 양승빈은 이번 전시에서도 상상력을 동원해 독특한 스토리텔링을 풀어냈다. 그가 주목한 건 아르코미술관을 설계한 김수근 건축가. 양승빈은 “유명 건축가들은 의자를 하나씩 만들었는데, 김수근은 단 하나의 의자도 디자인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연유가 궁금해 조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고인이 된 김수근의 지인들이 쓴 책을 통해 김수근이 의자를 만들었다가 모종의 이유로 파괴했다는 의자에 대한 단서를 발견했다. 그 의자의 파편이 공간 사옥과 아르코미술관에 있다는 것을 알고, 김수근의 미발표 의자 원작을 복원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은 양승빈이 만든 허구다. 그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상 ‘구니스’를 통해 일어난 일만 그대로 기억하는 역사가 아닌, 상상을 통해 새로운 역사의 기억을 써내려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회화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다양한 작품의 이미지를 다루는 윤향로는 이번엔 아르코미술관에 대한 개인의 기억과 장소의 서사를 텍스트에 기반한 이미지로 재구성했다. 그의 작업은 그리스 로마 시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건물에 새겨 넣는 고전적 그라피티 기법인 ‘태깅’에서 출발한다.
윤향로는 “아르코미술관과 연계된 인사미술공간이 내 창작활동의 시발점이었기에 이번 전시가 더욱 특별하고 참여할 수 있어 기뻤다”며 “창작자로서 활동하며 겪은 일, 그리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발간했던 매거진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키워드의 텍스트를 따와서 작품 속에 담았다”고 말했다.
문승현(옐로우닷컴퍼니)이 보여주는 영상엔 휠체어 사용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미술관 공간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신체성을 활용해 배제된 공간 사이를 항해하는 퍼포먼스로 승화한다. 이를 통해 상처 입은 공간을 치유하고, 미술관이 누구나 와서 쉬고 놀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을 표현한다.
문승현과 이번 전시에 함께 한 김경민은 “2018년 항암 치료를 받으며 집이 무엇인지 방황할 당시 아르코미술관에서 ‘집’을 소재로 한 전시를 보고 새 생명을 받은 느낌이었다.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김수근의 전시를 봤는데 자신이 건축했지만, 자신의 것이라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공간을 만든 건 본인이지만, 그 공간은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재정립된다는 뜻이었다”며 “이번 전시에서 우리가 이 시대에 공간을 어떻게 정리하고, 이를 통해 어떻게 치유 받을 것인가, 그리고 김수근에 대한 존경심과 약간의 반항심을 함께 섞어 작업했다”고 말했다.
전시장 1층 입구와 2층 출구 쪽 통로의 월페이퍼 작업과 손뜨개 니팅 설치로 이뤄진 김보경의 작업은 아르코미술관을 중심으로 마로니에 공원, 대학로, 동숭동, 낙산을 탐색하며 때로는 대륙을 지나고 물길을 따라 바다를 넘어 확장되기도 한다. 아르코미술관과 관계된 과거와 오늘의 여러 이미지들을 혼합, 중첩, 변형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
김보경은 “미술관과 관련해 건축가의 일생, 건축물, 낙산의 역사를 조사해 이미지로 풀어냈다. 1층엔 마로니에 공원 및 미술관 앞쪽 공간의 역사를 주로 풀었고, 2층엔 낙산으로 넘어가 이야기를 확장시켰다”고 말했다.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향하는 미술관
안경수는 마로니에 공원을 통창으로 내려다볼 수 있는 아카이브라운지에 캔버스 6점을 연결한 파노마라 형식의 회화를 선보인다. 그의 그림 속 풍경은 겨울인데, 현재 미술관 바깥엔 따뜻한 봄기운이 만연하다. 작품 속 지난 과거와 현재 미술관 풍경의 경계에서 기억은 겹겹이 쌓인다.
안경수는 “미술관의 어떤 이야기를 풀어낼까 고민하다 미술관을 아우르는 마로니에 공원의 풍경을 미술관 안으로 끌어들여보자는 생각을 했다. 마로니에 공원은 오랜 시간의 흐름 동안 1980년대 예술가들의 무대, 시민의 쉼터이자 1990년대 청년의 거리문화의 결기가 교차했던 광장의 역할을 했다”며 “작업에 앞서 오랜 시간 마로니에 공원을 지켜봤는데 때로는 시위, 추모, 축제의 광장이었던 공원이 연말 크리스마스 땐 떠들썩함은 온데간데없이 고요했다. 마치 사건 발생의 미묘한 불안감을 담은 전야 같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현종은 무형의 매체인 소리의 메커니즘을 활용해 미술관 안과 밖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미술관 계단, 통로, 화장실 공간을 그가 작업한 소리가 가득 채운다. 미술관 내부로 침투하는 소리를 통해 예술과 일상의 에너지를 교차시키는 시도다. 특히 그가 채집한 소리들은 미술관 앞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의 소리 등 일상에선 그냥 지나치거나 외면 받을 법한 소리들로, 이 소리들은 미술관 곳곳에 울려퍼지며 사람들과 공명한다.
마지막으로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의자에 앉는다는 행위를 통해 신체와 장소성을 탐색하는 다이아거날써츠의 설치작품을 볼 수 있다. 다이아거날써츠는 “아르코미술관은 공간 자체가 상징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어떻게 관람자가 이 공간을 경험할 것인가 고민하다 일상 속 우리가 항상 의식, 무의식적으로 앉는 의자가 떠올랐다. 우리는 의자에 앉음으로써 자신이 있는 공간을 재인식하고, 건물을 경험하는 시발점이 되곤 한다”며 “평범한 의자를 비롯해 의식적으로 힘을 줘 균형을 맞춰야 하는, 약간의 변화를 준 의자를 한 공간에 설치해 같은 의자라도 달라지는 경험과 기억들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올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50주년, 내년 아르코미술관이 미술회관 이름으로 문을 연 지 50주년, 그 사이의 시점에 선보여 더 눈길을 끈다. 임근혜 아르코미술관 관장은 “아르코미술관이 지난 3년 팬데믹을 겪으며 환경, 생태, 지역 등 첨예한 사회 의제를 전시 주제로 발굴, 선보여 많은 호응을 받았다. 팬데믹을 계기로 미술관이 어떻게 대응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보다 고민해봐야 할 시점에서 이번 전시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인사동에서 시작해 자리를 옮겨 현재까지 이어진 아르코미술관의 50여 년 역사를 되돌아보며 미술관의 공간과 기억에 주목하는 이번 전시는 사회의 변화를 목도하고, 시대와 호흡하고, 앞으로도 함께 변화해 가겠다는 미술관의 의지를 담았다”며 “미술관이 어떤 작가에겐 열망의 대상이기도, 누군가에겐 미술관의 제도적인 권위나 위상 자체가 영감이자 도전의 대상이기도 하다. 다양한 미술관의 의미, 역할, 기능을 되돌아보고, 이를 통해 어떤 비전을 수립해갈지 이번 전시를 통해 지켜봐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아르코미술관이라는 공간 하나를 두고 풀어내는 작가들의 기억은 다채롭다. 이 이야기들 또한 아르코미술관의 새로운 기억 중 하나로 소중히 간직될 것이다. 전시는 아르코미술관에서 7월 23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