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9호 김금영⁄ 2023.05.26 13:49:10
올해 상반기 프랑스 작가 다비드 자맹의 작품을 전시 공간 알트원에 소개하며 화제가 된 더현대서울이 이번엔 라울 뒤피를 소개하며 프랑스 작가와의 만남을 이어간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미술 거장으로 꼽히는 라울 뒤피(1877~1953)는 회화, 일러스트레이션, 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며 수많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이번 전시는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과 현대백화점, 전시기획사 지엔씨미디어가 공동 주최하고, 주한프랑스대사관이 후원한다.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은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과 함께 프랑스 3대 미술관 중 하나이자, 피카소, 칸딘스키, 마티스, 샤갈 등 12만여 점의 방대한 근·현대 미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세계적인 문화 기관이다. 미술관은 프랑스 파리의 복합예술단지인 퐁피두센터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퐁피두센터와 더현대서울은 건축가 리차드 로저스라는 접점이 있다. 정지영 현대백화점 부사장은 “퐁피두센터를 디자인한 리차드 로저스는 더현대서울도 디자인했다. 건축 거장이 설계한 두 개의 건물이 하나의 전시로 연결돼 이번 만남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퐁피두센터가 개점 2년 만에 8000만 명이 방문한 더현대서울의 높은 집객력과 전문 미술관 수준의 알트원 시설을 높게 평가한 데서 기인했다는 설명이다. 현대백화점 측은 “실제 퐁피두센터 실사단은 지난해 9월 진행된 내한 평가에서 알트원의 시설과 고객 집객력·접근성 등을 높이 평가했다”고 설명했다.
지엔씨미디어는 이번 전시를 비롯해 앞서 ‘오르세 미술관전’, ‘루브르 박물관전’, ‘퐁피두센터 특별전’, ‘장 줄리앙: 그러면 거기’전 등 프랑스 미술을 국내에 적극 소개해왔다. 과거 프랑스 유학 시절 자신의 방에 10년 동안 포스터를 붙여놓을 정도로 뒤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는 홍성일 지엔씨미디어 대표는 “라울 뒤피는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 중 한 명이지만, 국내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며 “인상주의, 야수파, 입체파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그가 1953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남긴 회화, 판화, 도자기 등 다양한 작품들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기쁨의 화가’로 불리며 전쟁 등 힘든 상황 속에서도 늘 낙관적인 태도를 작업에 드러내왔던 뒤피의 흔적을 따라간다. 전시 총감독으로 참여한 크리스티앙 브리앙 퐁피두센터 수석큐레이터는 “전시명 ‘행복의 멜로디’에서 유추할 수 있듯 뒤피를 대변하는 말은 기쁨과 행복이다. 현 시대에도 필요한 메시지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방대한 작품 수를 자랑한다. 뒤피가 사망한 뒤 그의 부인 에밀리엔 뒤피가 아틀리에에 보관돼 있던 작품 1600여 점을 국가에 기증하면서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은 라울 뒤피 작품의 최대 소장처가 됐다.
크리스티앙 브리앙은 “뒤피가 생전 대중에 공개하지 않고,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애착을 갖고 직접 자신의 아틀리에에 소장했던 작품들 중 특별히 남다른 독창성을 보여주는 작품 120점을 선별했다”고 말했다. 특히 세라믹 벽화 ‘조개껍데기를 든 목욕하는 여인’과 태피스트리 ‘암사슴, 새 그리고 나비’는 이번 전시를 통해 세계 최초로 공개된다. 뒤피의 작품 중 처음으로 프랑스 국가 소장품으로 등록된 ‘도빌의 예시장’ 등도 볼 수 있다.
세라믹 벽화 ‘조개껍데기를 든 목욕하는 여인’ 등 첫 공개
전시는 ‘행복의 멜로디’라는 대주제 아래 총 12개의 세부 주제로 나눠진다. 하나의 주요 멜로디가 다양하게 변주되는 방식으로 완성돼 한 편의 교향곡을 감상하는 듯한 예술적인 경험을 제공한다는 취지다.
전시의 시작점엔 뒤피의 자화상이 걸렸는데, 단순 선으로 시작된 초창기 작업부터 색채가 다양하게 들어간 변화 과정까지 한눈에 살필 수 있다. 크리스티앙 브리앙은 “뒤피 자신에 대해 알려주는 과정부터 전시는 시작된다”고 말했다.
첫 섹션은 ‘인상주의로부터’이다. 프랑스 북서부 지역 노르망디에 위치한 산업 항구 도시 르아브르에서 태어난 작가는, 초기엔 인상파의 후예로서 재능 있는 풍경 화가로 먼저 알려졌다. 그러다 야수파와의 만남이 시작됐는데 두 번째 섹션 ‘야수파 뒤피’에선 전통을 거부하고, 혁명을 지향했던 야수파의 주요 화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한 뒤피의 행보를 살핀다. 뒤피를 비롯한 야수파 화가들은 강렬한 색상과 가벼운 붓질을 활용해 풍경화와 초상화를 그렸다.
이야기는 세 번째 섹션 ‘입체파 시기’로 이어진다. 뒤피는 그의 친구 조르주 브라크와 함께 입체주의 기법을 시도했으며, 폴 세잔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1980년엔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근처 에스타크의 풍경을 다양한 시각으로 그려냈다. 크리스티앙 브리앙은 “이 시기 그림을 보면 기하학적인 입체감이 돋보이는데, 장식예술과 실험예술이 결합된 흔적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뒤피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대중예술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됐는데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목판화였다. 네 번째 섹션 ‘대중예술의 혁신’에서 이 지점을 다룬다. 당시 피카소가 거절한 작업이 뒤피에까지 이르게 됐는데, 뒤피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동물시집 혹은 오르페우스의 행렬’의 삽화를 목판화로 그려내는 혁신적인 시도를 했다.
대중예술과의 접점을 넓혀가던 뒤피는 리옹의 유명 직줄 제조업체와 협업하면서 패션으로도 발을 뻗었다. 뒤피는 수많은 패션 견본을 그려냈고, 유명 패션 디자이너 폴 푸아레와도 함께 일했다. 다섯 번째 섹션 ‘패션’에서는 꽃 등 장식적 요소가 특징인 뒤피의 작업들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 대형 족자 ‘암사슴, 새 그리고 나비’가 설치됐다. 크리스티앙 브리앙은 “돌돌 말려 있어 미술관에서도 작품의 존재를 몰랐다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소중한 발견을 했다”며 “이 작업엔 패션과 회화 작업 스타일이 혼합된, 표현주의가 발달된 뒤피의 작업방식이 담겼다”고 설명했다.
여섯 번째 섹션 ‘장식 예술’은 자연스러움, 선명하고 투명한 색상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그림체를 만들어가던 뒤피의 예술세계를 살핀다. 그간 뒤피의 회화 작업이 주로 많이 공개됐는데, 여기선 뒤피가 1924년부터 도예가 로렌스 아르티가스와 함께 만든 수많은 도자기 중 일부를 만날 수 있다. 앞선 목판화 시기에서도 뒤피는 코끼리를 그림에 적극 활용했는데, 1920~30년대 장식 예술에도 코끼리가 등장해 눈길을 끈다. 특히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는 세라믹 벽화 ‘조개껍데기를 든 목욕하는 여인’은 은은한 파란색이 인상적인 대규모 도예 작품이다.
코끼리뿐 아니라 뒤피는 바다, 말에도 관심을 갖고 적극 그렸는데 일곱 번째 섹션에 이 작품들을 모아놓았다. 뒤피는 작은 말들로 가득한 해안가 도시의 환상적인 이미지로부터 회화적 영감을 받아 작품을 그리기도 했다. 크리스티앙 브리앙은 “뒤피는 바다를 중심 테마로 두고 여기에 본인의 레퍼토리를 넣은 독특한 회화 스타일을 1920~1930년대 정착시켰다. 레저 등을 즐길 수 있는 바다는 작가에게 기쁨을 주는 장소였다. 그림을 들여다보면 바다에 등장하는 여인 옆에 작가 자신을 자그마하게 그려 넣기도 했다”며 “당시 수집가에게 인기가 많았던 경마 등의 요소도 눈에 띈다”고 말했다.
다채로운 채색 인상적인 ‘전기 요정’ 그리고 담담한 ‘검은빛’
이처럼 뒤피가 다양한 장르와 매체를 오간 건 세계 곳곳을 여행한 경험에서 비롯됐다. 여덟 번째 섹션 ‘여행자의 시선’은 뒤피가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미국을 여행하면서 그린 각 나라의 풍경들을 소개한다. 이곳에 등장하는 ‘메리 왕비의 마차’는 뒤피가 직접 갔던 대관식 풍경을 담은 작품이다. 야수파 때부터 활용했던 깃발 모티브가 또 발견되기도 한다.
뒤피는 초상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아홉 번째 섹션 ‘초상화’에서는 초기 초상화 작업에서 모델로 자주 등장했던 아내 에밀리엔 뒤피,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등장한 유명 인사들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 뒤피의 후원자였던 기업인 피에르 제스민의 초상화도 등장한다. 영국의 케슬러 가문이 1930년 의뢰한 기념비적 가족 초상화는 뒤피가 남긴 걸작 중 하나이기도 하다. 크리스티앙 브리앙은 “뒤피의 풍경화는 많이 알려진 반면 초상화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전시에선 초상화를 하나의 섹션으로 구성해 습작부터 채색까지 뒤피의 초상화 세계도 깊게 살핀다”며 “유명인사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인간 뒤피의 면모도 보인다”고 말했다.
열 번째 섹션 ‘대형 장식 벽화’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가 기다린다. 1930년대는 뒤피가 대형 장식 벽화에 전념한 기간이었다. 1937년 열린 세계박람회에서 전시된 ‘전기 요정’ 또한 그의 작품으로, 뒤피의 인생 역작이자, 그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린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뒤피가 직접 과슈로 채색해 완성된 현존하는 유일한 전기 요정 석판화 연작을 볼 수 있다.
반은 본연 그대로 보존된 자연 풍경을, 또 다른 반은 산업적인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런 과도기적 시대의 풍경 속 전기의 발명과 관련 있는 수많은 지식인, 신화적 존재를 배치했다. 거대한 그림을 자세히 다가가서 살펴보면 프랑스의 상징인 에펠탑이 보이고, 천둥번개의 신 주피터의 모습을 통해 전기의 기원까지 볼 수 있게 다채롭게 구성됐다. 이 공간은 유독 어두운데 그림이 빛나며 작품명처럼 전기 요정이 된 모양새다.
열한 번째 섹션 ‘아틀리에’ 또한 이번 전시의 주요 파트 중 하나다. 뒤피가 다뤘던 독창적인 주제들 중 하나로, 특히 파리 몽마르트 언덕 아래에 위치한 겔마 스튜디오 풍경에 주목했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뒤피의 행복의 멜로디가 유독 돋보이는 섹션이다. ‘붉은 바이올린’에선 음악으로부터 받은 영감과, 음악에 대한 뒤피의 애정이 묻어난다. 악보도 그려져 있어 훌륭한 아마추어 음악가였던 뒤피의 면모까지 살필 수 있다.
마지막은 ‘검은빛’ 섹션이 장식한다. 앞서 화려한 색채가 가득했던 풍경들과 달리 뒤피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거의 완전히 파괴된 고향 항구를 묘사하기 위해 검정색 단일 색조를 사용했다. 이런 표현법은 작품이 햇빛의 방향에 따라 찬란하게 빛날 수 있게 했다.
크리스티앙 브리앙은 “뒤피는 태양을 바라볼 때 순간적으로 눈이 부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던 순간을 경험하면서 검은색 작업을 시작했다. 검은색부터 출발한 작업은 색채의 대비를 통해 빛을 발견하는 전환 시도로도 이어졌다”며 “이 섹션에선 전시 출발 지점에서 접했던, 뒤피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생 아드레스 해변이 다시 등장한다. 앞선 생 아드레스 해변이 찬란하게 빛났다면, 이 섹션에서는 세계대전 이후 많은 존재들이 사라진 풍경을 보여주며 전쟁의 상흔을 알려주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검은 화물선과 깃발’은 뒤피가 생애 마지막에 그린 작품으로 알려졌는데, 이곳에서 볼 수 있다. 크리스티앙 브리앙은 “뒤피는 평생에 걸쳐 색채를 연구하며 다채로운 색을 사용했는데, 생애 마지막 작업에서는 검은색으로 소멸되며 귀결됐다는 점이 역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역설은 슬프고 잔혹하기보다는 잔잔한 평화처럼 느껴진다. 행복의 멜로디가 경쾌하게 이어지다가 전시 말미에 이르러 조용히 끝을 알리며 읊조리듯 멜로디를 마무리한다.
현대백화점은 이번 전시를 시작으로 국·내외 유명 미술관·갤러리와 협업을 확대해 고객에게 수준 높은 문화예술 향유의 기회를 늘리고, 알트원을 국내를 대표하는 전문 미술관으로 키운다는 계획이다.
정지영 현대백화점 부사장은 “알트원은 국내외 최고 수준의 작품을 전시해 문화예술 트렌드를 선도하며 더현대서울이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 명소로 도약하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이번 전시 또한 그 일환”이라며 “앞으로도 더현대서울은 세계 다양한 아티스트, 기관과 협업을 확대하며 늘 영감을 주는 공간이 되겠다”고 말했다. 전시는 더현대서울 알트원에서 9월 6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