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까만 볼펜으로 선을 쭉 긋고 안쪽을 색연필로 칠한 듯 투박하고도 천진난만한 화면. 그간 눈에 익숙했던 그림들과는 색다른 매력으로 흥미를 자아냈다. 언뜻 아이들의 그림일기를 보듯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어지게 만드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품은 이 그림들의 주인공은 이누이트. 바로 우리가 흔히 ‘에스키모’로 알고 있는 캐나다 북극의 원주민이다. 지구 반대편 저 멀리 살고 있는 그들의 그림이 한국으로 먼 발걸음을 했다.
롯데갤러리가 10월 3일까지 롯데백화점 잠실점에서 ‘해초먹는 토끼: 이누이트 아트’전을 연다. 에스키모라는 용어는 ‘날고기를 먹는 자’라는 뜻으로, 16세기부터 유럽인이 이들을 폄하해 부르며 사용한 용어다. 이누이트족은 스스로를 에스키모라 부르지 않았으며, 21세기부터 ‘남부 사람’이라는 뜻의 이누이트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전시도 ‘이누이트 예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앞서 열렸던 제14회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에서 해당 전시가 먼저 공개돼 국내외 미술 애호가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은 바 있다. 광주비엔날레는 매일 2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며 7월 9일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이때 현장을 찾았던 김영애 롯데백화점 아트콘텐츠팀 실장(상무) 또한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한다.
김영애 실장은 “북극지역의 다양한 삶을 마치 만화, 낙서같이 표현한 이미지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누이트 예술을 서울에서도 보여주고 싶어 적극적으로 전시 제안을 했다”며 “수렵 채취 생활을 하며 힘든 환경을 살아가는 이누이트에게 예술은 생존 바로 다음 이슈와도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결국 그들의 삶을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그 결과 탄생한 작품들은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이누이트 작가인 슈비나이 애슈나의 작품이 특별 언급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이 작가의 작품을 비롯해 다양한 이누이트 작가들의 작품 70여 점을 통해 북극의 신비로운 풍경과 일상, 고래나 북극곰 같은 동물들, 이누이트 전통 신화 등 다양한 소재가 담긴 이누이트 예술을 보여준다. 광주비엔날레에서는 공개되지 않았던 미공개 작품 10여 점도 추가돼 업그레이드된 규모로 펼쳐진다.
특히 올해는 한-캐나다 수교 60주년을 기념하는 해라 전시가 더 뜻 깊다는 설명이다. 전시 오프닝날 현장을 찾은 타마라 모휘니 주한캐나다대사는 이누이트 언어로 먼저 짧게 인사를 한 뒤 “이번 전시는 한국과 캐나다 교류의 핵심을 보여주는 자리다. 깊고 활기찬 역사를 지닌 이누이트는 주로 자연과 연결된 예술을 선보여 왔다”며 “광주비엔날레에 이어 이번엔 롯데갤러리와의 협업 전시를 통해 더 많은 관람객을 만나는 기회를 얻어 기쁘다”고 말했다.
‘해초먹는 토끼’라는 독특한 전시명은 이누이트 예술을 함축하는 문장이다. 이누이트 예술의 중심엔 ‘킹가이트 스튜디오’가 있다. 캐나다 북부 누나부트준주의 ‘웨스트배핀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미술 공동체로, 이곳에서 5세대에 걸친 오랜 세월 동안 작가들이 서로 교류하고, 멘토링을 하며 이누이트 예술의 명맥을 이어왔다.
해초먹는 토끼는 ‘이누이트 예술의 창시자’라 불리는 작가 케노주악 아셰박(1927~2013)의 작품명에서 따온 것으로, 이 작품 또한 킹가이트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가장 상징적인 이누이트 예술 작품으로 알려졌다. 전시를 기획한 윌리엄 허프먼 큐레이터는 “초기 북극 예술의 정체성과 이누이트 현대미술의 현주소를 동시에 보여주는 이번 전시의 근원이 되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아이가 그린 듯 투박한 선과 색감서 느껴지는 신선함
이번 전시 참여 작가 26명 또한 킹가이트 스튜디오에 소속돼 있다. 전시 작품들을 보면 주로 펜과 색연필 등 전통적 매체를 주로 활용한 점이 눈길을 끈다. 윌리엄 허프먼 큐레이터는 “이누이트가 사는 곳 기후가 매우 추워 금방 굳거나 빠르게 훼손되기 쉬운 물감보다 간편한 펜, 색연필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이들은 정규 미술과정을 밟지 않았지만, 서로 멘토링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그렇기에 작품에서 자유로움과 상상력, 그리고 신선함이 더욱 돋보인다”고 말했다.
또 눈길을 끄는 건 예상을 벗어나는 주제들이다. 순수한 환상 속에서 태어난 신비한 형태의 생물, 완전히 낯설면서도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도 같은 친숙한 장소, 사냥 같은 전형적인 활동들이 이번 전시에 공존하며 이누이트 예술 환경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슈비나이 애슈나는 북극의 풍경, 이누이트 문화와 신화, 그리고 순수한 환상이나 상상에서 파생된 소재를 그림과 판화로 표현하는데, 일상적인 것부터 초현실적인 것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판화와 드로잉을 위주로 작업하는 킹가이트의 원로 아티스트 중 1명인 카바바우 매뉴미는 석판화의 대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작품 속 일관된 주제는 ‘이누랄라트’ 또는 ‘작은 사람들’로, 일상적인 사물과 북극 야생동물들을 신화 속 인물들과 관련지어 묘사하고, 때로는 지구 온난화 등 환경파괴에 대한 경고도 담는다.
조각으로 커리어를 시작해 판화를 거쳐 최근엔 드로잉 위주의 작업을 선보이는 씨 푸투국은 특히 복잡한 디테일 표현 전문가로 알려졌는데, 이를 통해 표현하는 건 북극 환경, 이누이트의 일상화 신화다. 새마이유 아커케석은 대담한 색채를 사용한다. 그는 북극의 동물과 곤충의 형태를 묘사하며 많은 사람들이 불쾌하게 여길 수 있는 전재에서 유희적인 면모를 발굴해 보여준다.
채도가 높고 생동감 넘치는 색채를 활용하는 메이요리액 애슈나는 1960년대부터 작품 활동을 해온 킹가이트 원로 작가로, 야생동물과 북극의 일상, 전통 신화를 주제로 묘사한다. 최근 캐나다에서 작품 전시를 시작한 매튜 플래허티는 돌 조각가이자 보석 제작자로 커리어를 시작한 신세대 킹가이트 예술가다. 또 다른 킹가이트의 신진 예술가 울루시 사일러는 케노주악 아쉐박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바위, 물, 눈 등 복합적인 조합을 묘사하며 북극 풍경의 미묘한 색채를 잘 포착한다.
새 여러 마리가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모습에서 조형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그림은 쿠비안턱 푸드라의 손에서 탄생했다. 조각가로 경력을 시작해 드로잉까지 아우르는 그는 독창적인 그래픽 스타일로 현지 야생동물을 묘사한다.
윌리엄 허프먼 큐레이터는 “전시 참여 작가들은 선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독특함 문화를 바탕으로 자유롭고 순수한 예술 세계를 펼쳐낸다”며 “아이가 그린 듯 순수한 그들의 작품엔 이누이트 토착 문화에 뿌리를 둔 공동체적 정체성과 자전적 삶이 엮여 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전시장 내엔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도록 직접 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체험 공간이 마련됐는데, 벽에 킹가이트 스튜디오 사진을 크게 펼쳐놓아 마치 현지에서 그림을 그려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타마라 모휘니 주한캐나다대사는 “이 공간을 통해 한국 관람객이 그린 그림이 전시장에 걸리며 이누이트 예술과 한데 진정으로 어울리는 예술의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롯데갤러리 측은 “이누이트의 예술 세계를 조명하는 이번 전시는 우리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북극 이누이트의 예술과 역사,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신선한 경험의 장”이라며 “예술 활동을 통해 척박한 자연, 식민지배 등 어려운 환경을 견디며 살아온 이누이트의 삶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가 관람객에게 위안과 힐링을 주는 동시에 새로운 문화에 대한 관심과 존중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