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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정연두 작가, 백년초 이주 설화에서 한인 디아스포라를 읽다

국립현대미술관,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백년 여행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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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56호 김금영⁄ 2023.09.19 14:02:05

설치 신작 '상상곡'은 2023년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여러 국적 외국인의 목소리를 담은 작업이다. 사진=김금영 기자

100년에 한 번씩 꽃이 핀다고 해 이름 붙여진 ‘백년초’. 지난해 9개월 동안 제주도에서 생활한 정연두 작가는 제주 북서쪽 월령리 일대의 백년초 자생 군락을 방문해 구전으로 전해져온 백년초 이동 설화를 접했다. 본래 멕시코에서는 ‘노팔 선인장’이라 불린 백년초가 쿠로시오 난류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와 제주도에 뿌리를 내렸다는 것. 평소 디아스포라(본토를 떠나 타국에 살면서도 고유의 정체성과 문화를 잃지 않는 민족)에 관심을 갖고 작업을 이어 온 작가는 백년초의 이동 설화에서 반대로 먼 과거, 멕시코로 건너간 한인 디아스포라를 떠올렸다.

국립현대미술관이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백년 여행기’를 연다. MMCA 현대차 시리즈는 국립현대미술관과 현대차가 손잡고 이어 온 대표적인 예술 지원 활동 중 하나다. 국내 중진 작가 1인을 지원하는 연례전 형태로, 2014년부터 매년 열려 왔다.

'백년 여행기-프롤로그'는 1905년 영국 상선을 타고 인천을 떠나 멕시코에 도착했던 한인들이 일했던 에네켄 농장을 미니어처로 재현한 설치 작품과 영상으로 구성됐다. 사진=김금영 기자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현대차가 선정 작가에게 전시를 위한 제작비, 운영비 및 다양한 홍보 활동을 후원한다. 전시를 통해 작업에 새로운 전환과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고, 국내외 미술계에 적극적으로 홍보함으로써 한국 현대미술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취지다. MMCA 현대차 시리즈는 문화 예술과 기업이 만나 상생 효과를 창출한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그간 이불, 안규철, 김수자, 임흥순, 최정화, 박찬경, 양혜규, 문경원&전준호, 최우람 작가가 이 시리즈를 거쳐 갔고, 이번엔 정연두 작가가 주인공이다.

박종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직무대리는 “MMCA 현대차 시리즈는 국내의 대표적인 예술 지원 장기 프로젝트”라며 “이방인이 겪는 삶과 낯섦에 집중해 온 정연두 작가는 특히 거대 서사와 개별 서사를 연결하고 아우르는 동시에 개인, 집단, 국가적 정체성이 이주자에겐 어떻게 생성되는지 살펴왔다. 이번 전시에서도 이 이야기들에 접근한다”고 말했다.

2개의 LED 대형 패널을 마주 보는 형태로 설치한 '세대 초상'. 1905년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의 후손들로, 90대부터 10대의 나이까지 다양하게 걸쳐 있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야기의 시작점엔 앞서 언급된 백년초가 있다. 뿌리가 뽑혀 이동됐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곳에 뿌리를 내려 생명력을 이어가는 백년초의 모습을 통해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한 한인들의 이주와 접속한다. 그리고 이는 제국, 식민, 노동, 역사를 둘러싼 기존의 이주 서사 이외 제3의 이야기까지 열어주는 통로가 된다.

이번 전시를 위해 작가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전시의 시작을 여는 설치 신작 ‘상상곡’은 2023년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여러 국적 외국인의 목소리를 담은 작업이다. 한국에서는 다소 낯선 열대 식물을 모티브로 만든 오브제가 전시장 높은 천장에 주렁주렁 달렸는데 이 오브제 각각의 아랫부분엔 스피커가 달렸다. 이 스피커 아래로 다가가면 ‘한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 ‘오늘 가장 그리운 사람’, ‘희망과 꿈’ 등에 대한 작가의 질문에 일본어, 스페인어, 아랍어, 헝가리어, 인도네시아 등으로 답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전시장에서 다소 튀는, 마치 이방인과도 같은 존재감을 내비치는 설치물에서 흘러나오는 이 소리들은 때로는 이질적으로 들리고, 고단함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노랫소리처럼 귓가를 맴돌며 전시장과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달콤한 사탕 이면의 쓴 이주의 역사

영상 설치작 '백년 여행기'는 정연두 작가가 연출한 한국의 판소리, 일본 전통음악 기다유(분라쿠), 그리고 멕시코의 마리아치의 공연을 3채널 영상으로 보여준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어 본격 ‘백년 여행기’의 프롤로그가 시작되며 2023년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방인 이야기는, 20세기 초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멕시코로 자신들의 뿌리를 옮겨가야 했던 한인들의 이주기와 중첩된다. 백년초의 설화가 다소 낭만적이었다면, 결코 낭만적일 수만은 없는 ‘이동’을 둘러싼 모순된 역사와 기이한 상황들에도 접근하는 시도다.

‘백년 여행기-프롤로그’는 1905년 영국 상선을 타고 인천을 떠나 멕시코에 도착했던 한인들이 일했던 에네켄 농장을 미니어처로 재현한 설치 작품과 영상으로 구성됐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서는 에네켄 농장과 산업이 성행했고, 여기에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당시 한인들은 멕시코로 떠났다.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광고에 현혹된 영향도 있었다.

그렇기에 낯선 미지의 곳으로 떠난다는 불안감 속에서도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가슴 한켠 조금이나마 간직했겠지만, 불합리한 노동 계약으로 에네켄 농장에 엮이고 정착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그들이 느꼈을 복합적인 감정, 그리고 정착한 곳에서 형성된 새로운 정체성을 작가는 따라간다.

12m 높이의 거대한 벽면 설치 작업 '날의 벽'. 사진=김금영 기자

이어 2개의 LED 대형 패널을 마주 보는 형태로 설치한 ‘세대 초상’으로 이야기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진다.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영상 속 인물들은 1905년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의 후손들로, 작가는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멕시코를 3회 방문하며 이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일상을 촬영했다.

현재 멕시코에 거주하는 이들의 연령대는 90대부터 10대의 나이까지 다양하게 걸쳐 있는데, 이주를 둘러싼 낯섦과 익숙함을 받아들이는 정도도 세대별로 다르고, 가치관 또한 다르지만 공생한다. 두 채널 영상이 마주 보는 설치 구조는 이런 관계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부모와 자식 세대 가운데에 자리 잡은 관객은 두 인물의 미세한 표정과 몸짓을 보며 그들의 존재감과 관계성에 보다 집중하게 된다. 작가는 “관람객이 단순 관찰자에 그치지 않고, 세대 사이에 끼어 당사자가 돼보는 경험을 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고 말했다.

프롤로그에 이어지는 영상 설치작 ‘백년 여행기’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다. 작가가 연출한 한국의 판소리, 일본 전통음악 기다유(분라쿠), 그리고 멕시코의 마리아치의 공연을 3채널 영상으로 보여주는데, 각 공연은 멕시코 한인 이민사와 관련된 기록들을 기반으로 한다. 1905년 멕시코를 향해 가던 배에서 태어난 최병덕(1905~1985)의 ‘교보역설’(1973), 이민 2세인 마리아 빅토리아 리 가르시아(1907~1995) 할머니의 굴곡진 인생 이야기, 황성신문의 이민자 모집 광고, 그리고 멕시코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황보영주(1895~1959)의 시 ‘나의 길’(1912) 등이다.

정연두 작가. 사진=김금영 기자

각 공연의 음악적 운율은 공간 한 가운데 크게 자리한 LED 단채널 영상 이미지와 시각적으로 조응하는데, 이는 작가가 멕시코에서 촬영한 농부, 노동, 군중, 식물 이미지를 담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텍스트 서사를 공연·소리·영상·이미지·운율·리듬·빛으로 전환한 작가 특유의 비선형적인 작업을 통해 관람객은 멕시코 이민 서사를 여전히 살아 있는 문화적인 생성지대로서 재방문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전시의 마지막은 12m 높이의 거대한 벽면 설치 작업 ‘날의 벽’이 장식한다. 이주의 역사와 더불어 빠질 수 없는 이야기가 노동인데, 작가는 특히 권력과 자본이 개입하는 행위이기도 한 노동에 주목한다. 벽의 형태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착안했는데, 서기 70년경 전 세계로 흩어져야만 했던 유대인의 역사를 통해 디아스포라의 의미와도 연관된다.

날의 벽은 ‘칼날로 이뤄진 벽’을 뜻하며 그 칼날들은 ‘마체테’라 불린 세계 각국의 농기구다. 작가는 이 농기구 오브제들을 어린 시절 즐겨 했던 놀이인 설탕 뽑기의 방식으로 만들었다. 작가는 앞서 지난해 열렸던 포도뮤지엄에서의 전시에서도 제주도에서 직접 사탕수수를 키우며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 재배를 위한 노동력으로 동원됐던 하와이 이민 사회의 역사를 들여다본 바 있다. 달콤한 사탕의 이면 속 숨어 있는 쓴 이주의 역사는 이번엔 멕시코 한인 디아스포라로 연결돼 ‘날의 벽’으로 등장했다.

정연두 작가와 관련된 아카이브가 설치된 공간. 사진=김금영 기자

작가는 “뿌리가 이동돼 새로이 뿌리를 내렸던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라고 이번 전시를 소개하며 “항상 예술로 옳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있는 모습을 그대로 기록해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이를 통해 관람객이 타자로 남아 있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까지 끌어내며 공감대의 폭을 넓혀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현실과 허구, 실재와 환영, 개인과 사회, 기억과 재현의 관계에 질문을 던지는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다”며 “특히 2014년 이후 전쟁, 재난, 이주, 국가 이데올로기와 같은 거시적 내러티브를 개인 서사 및 신화와 설화 등을 통해 재구성하면서 다층적인 목소리에 주목하고,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는 역설의 태도를 견지해 왔다”고 밝혔다.

이어 “환영적 요소를 통해 현실과 역사에 우회적으로 접속하고, 낯섦을 통해 이미 익숙하다고 여긴 현실 내부의 다층적 면모를 섬세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작가의 오랜 시선과 작업 태도는 이주와 이국성을 주제로 하는 이번 전시에서 더 확장됐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멕시코 이민 서사를 살아 있는 문화적 생성지대로 재방문하고, 낯섦에 대한 공감의 지대를 넓혀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내년 2월 25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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