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1호 천수림(사진비평)⁄ 2023.12.04 10:40:25
“당신은 아주 작은 모습이었다. 당신의 조그만 나타남으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 오래전에 내가 닿았던 우연의 세계는 이제야 하나의 방의 모습을 이루었다. 나는 집에 돌아온 것이다.” - 존 버거,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존 버거. 김우룡 번역, 열화당) 중에서
미술평론가이자 소설가인 존 버거는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And our faces, my heart, brief as photos/Berger, John)’에서 시간과 분리되고, 근원적 공간으로서의 집이 와해됐음을 이야기한다. 과거, 현재, 미래에서 분리되고 사랑하는 이들과도 이별을 하는 덧없는 삶을 더듬을 때 우리는 ‘사진’ 한 장을 집어든다. 아마도사진상 10회를 맞아 11월 19일부터 12월 20일까지 열리는 제10회 아마도사진상 ‘정지한 계(World-stasis)’는 사진의 순간과 지속, 불멸에 대해 질문한다.
“나는 나 자신을 가리키고 천천히 말했다. “인간.” 그리고는 게리를 가리켰다. “인간.” 그런 다음 각 헵타포드를 가리키며 한 번씩 말했다. “당신은 무엇입니까?” - 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 중에서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엘리)에 수록된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는 화자(언어학자)인 ‘나(루이즈 뱅크스)’가 자기의 (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을 향해 ‘네 인생의 이야기’를 말한다.
어떻게 태어나지도 않은 딸의 인생을 보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날 지구 밖 궤도에 비행물체가 나타나고 지구에는 외계 생명체들인 ‘헵타포드(일곱 개의 다리)’가 찾아온다. 언어학자인 루이즈는 의사소통을 위해 물리학자인 게리 도널리와 함께 이질적인 언어를 연구한다.
이들의 언어는 끝과 시작이 없다. 헵타포드는 시간적인 순서와 상관없이 동시에 인식한다. 루이즈는 그들의 언어를 익히면서 인식도 변화를 겪는다. ‘마침내’ 그녀도 시간을 동시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영화 ‘컨택트’의 원작이기도 한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시간’의 개념은 여전히 우리를 혼돈 속으로 몰아넣는다.
‘사진’ 매체는 시간을 정지시킨다는 점(사실은 찍히는 순간 박제된 이미지 덕에 그것을 죽음이라고 명명하기도 하는)에서 많은 이들을 열광케 했다. 물론 사진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두려움은 외계 생명체들인 헵타포드가 지구에 도착했을 때만큼이나 놀라운 일이긴 했을 것이다.
“사진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서사가 있다면, 그건 기억이나 회상이 그렇듯이 일어났던 일을 찾는 것이다. 기억 자체는 회상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회상 장면 하나하나는 어쩔 수 없이 영원히 앞으로 나아간다. 기억은 서로 다른 시간들이 공존하는 장이다. 이 장은 그것을 만들어내고 확장시키는 주관성의 관점에서 볼 때 연속적이지만, 일시적으로는 불연속적이다.” - 존 버거 ‘사진의 이해’ 중에서
현재 아마도예술공간에서 진행 중인 전시 제10회 아마도사진상 ‘정지한 계’는 아마도사진상 10회를 맞아 열리는 일종의 기념전 형식의 전시다. 그동안의 수상자인 이현무, 조준용, 장성은, 전명은, 조경재, 김태동, 김신욱, 압축과 팽창(안초롱, 김주원), 김동준이 참여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이미지들
곽노원 아마도예술공간 디렉터는 이번 전시를 통해 사진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할 것을 요구한다.
“정지장은 단순히 시공간을 정박시킨다기보다는, 마치 인용과 같이 이미 주어진 질서를 재구성하는 상상된 기술이다. 단지 정지장이 재편하는 질서는 언어의 그것이 아닌 시공의 질서다. 물론 ‘정지한 계’는 그것이 속해 있는/있었던 세계를 가리키며 여전히 그것의 일부라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원래’ 세계에 의해 포괄될 수는 없고 또 ‘원래’ 세계 없이는 먼저 존재할 수도 없다. 종종 정지장을 발생시키는 장치가 멈추면 완전무결한 벽이 사라지고 분리됐던 세계가 다시 이어질 수도 있다.” - 곽노원 제10회 아마도사진상 ‘정지한 계’ 기획의 글 중에서
‘정지한 계’ 전시는 이렇듯 시간을 무한히 늘어뜨리는 기술, 스테이시스 필드(Staisis field), 정지장, 정체장, 감속장을 상상하며 ‘사진’을 소환한다. 소환된 작가 중 하나인 김동준의 작업은 흥미롭게도 앞서 설명한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 속 헵타포드를 연상케 한다.
김동준은 사진을 위한 특수한 장치를 만드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고요의 사건 결합 스토리지_스토리지_물체 30.10.2’(2022)는 어떤 장소에서 발견한 작은 물체를 촬영한 것으로 원래의 기능은 잃어버린 것으로 균열을 촬영한 것이다. 사진을 담은 트레이는 사진을 보호하는 일종의 기능을 하지만 정작 외부의 힘에 의해 돌출되면 빛을 잃는 이중적 구조를 지녔다. 신작 ‘강_타워, 발원1’(2023)은 낮은 곳에서 타워를 올려다보며 느끼는 위태로운 상태를, ‘강_일시적 포착, 눈 뒤로 솟아난 소원’(2023)은 불투명한 심리적 상태를 암시한다.
보는 매체에서 이야기하는 매체로 확장하는 데 관심이 있는 전명은은 사진을 토대로 다양한 지각 방식을 제안한다. ‘누워있는 조각가의 시간’(2017)은 조각가였던 아버지가 남긴 석고 모형을 접사렌즈를 통해 촬영한 연작으로 정적이었던 오브제는 오히려 사진에서 생명력을 얻는다. 조경재는 각목, 철판, 플라스틱, 스티로폼 등 공업재료의 형태, 색채, 질감에 주목해왔다. 이 재료를 마치 물감처럼 운용해 촬영한 작품은 추상화처럼 보인다.
장성은은 ‘리플레이스먼트(Replacement)’(2016) 얇은 천 뒤로 감춰진 신체를 통해 상상의 공간과 대상을 향해 유발되는 인간의 감정에 대해 상상하게 만든다. ‘리듬A’(2019)는 고전적 정물화의 형식을 통해 고독의 형(形)을 물리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1회 수상자인 이현무는 시간의 지속에 대해 실험했다. ‘라이프레스 포트레이트(Lifeless Portraite)’(2012)는 대형카메라를 30여 분 동안 세워놓고 어느 순간 셔터를 눌러 엑스레이 필름에 얼굴 초상을 담았다. 미세함이 담긴 얼굴은 마치 살아있는 조각을 대하는 느낌을 전달한다. ‘미륵사진 시간에 갇힌 존재_국보 제 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2018)과 ‘2820Sec’(2012)도 긴 시간과 찰나의 시간을 담았다.
김태동도 역사의 흔적과 일상의 공존을 다룬 ‘강선’ 연작, 전쟁유적지인 철원 수도국지의 별을 촬영한 후에 발견한 흔들린 사진 등을 작업으로 채택했다. 별의 일주 궤적을 쫓을 때는 천체 장비를 장착해 고정된 별을 촬영했다. 장노출과 다중노출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순환하는 시간을 포착하려고 했다.
조준용은 ‘글래스 시티’, ‘모터 컬렉션’을 통해 낮과 밤, 움직임과 정지에 ‘써킷’ 연작을 통해 시공간에 대해 탐구해 왔다. 안초롱과 김주원으로 구성된 압축과 팽창 CO/EX은 ‘192샷 오브 로스산토스 앤 블레인 컨트리(192Shot of Los Santos and Blaine Country)’(2021)를 통해 게임 ‘그랜드 테프트 오토V(GTA V))'의 가상공간을 누빈다. 이들은 로스 산토스와 블레인 카운티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언젠가 사라질 (가상의) 장소를 탐험하고 기록한다.
김신욱은 네스 호의 괴수 ‘네시’를 둘러싼 이야기를 추적한 연작 ‘인 서치 오브 네시(In Serch of Nessie)’(2018-2020)를 통해 ‘믿음’의 작동방식을 탐구했다. 이어 신작 ‘돈스코이호’, ‘야마시타 보물’ 등 20세기 식민지를 둘러싼 일련의 전설들을 추적했다. 유령처럼 떠도는 이야기들은 긴 세월이 지나 출몰하기도 한다. 사진은 보이지 않는 이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담을 수 있을까.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 아마도수상작가들은 각각 9개의 방으로 나뉘어 전시된다. 이들은 각자 사진의 긴 여정을 통해 진정한 사진의 집으로 돌아왔을까. 덧없어서 더욱 찬란하고, 찬란하기에 불멸하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시간을 어느 저장소에 넣어두면 괜찮을까. 이 실험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글: 천수림 사진비평
이미지 제공: 아마도예술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