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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림의 현대사진산책+] 침묵의 잠재력과 다시 들리는 목소리

서울시립미술관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전 키리 달레나·리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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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63호 천수림(사진비평)⁄ 2024.01.02 14:50:30

사진은 여전히 증언의 힘을 놓치지 않은 매체다. 필리핀의 예술가 키리 달레나(Kiri Dalena)와 싱가포르 퍼포먼스 아티스트 리웬(Lee Wen)은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자국의 사회적, 역사적인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드러낸다. 키리 달레나는 마르코스 독재정권 시절 마닐라에서 일어났던 여러 시위에 등장했던 피켓의 문구를 지운 흑백사진을 통해, 리웬은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퍼포먼스를 기록한 사진연작을 통해 자신들이 처한 사회, 역사적 맥락을 재추적하길 권한다.

키리 달레나, '지워진 슬로건’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 전시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023-2024. 이미지 제공=서울시립미술관, 사진 촬영=코코아 픽쳐스

손에 팻말을 들고 있지만, 어떤 문구도 써 있지 않은 빈 팻말과 분노에 찬 시위대의 표정은 상반된 것처럼 보인다. 예술가이자 영화감독, 인권활동가인 키리 달레나의 대표작이기도 한 ‘지워진 슬로건(Erased Slogans)’(2008~현재) 연작은 분명 어떤 메시지가 있을 법하지만 말 할 수 없는 침묵에 오히려 고통스러운 이미지를 전달한다. 접근할 수 없고, 위험해 보이는 장면, 강요된 침묵은 인물들이 놓여 있는 장소와 시간을 추적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사진들이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3월 3일까지 열리는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전에 참여 중인 필리핀의 예술가이자 영화감독, 활동가인 키리 달레나의 보이지 않는, 들을 수 없는 지워진 슬로건 연작 중 일부를 만날 수 있다.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과 싱가포르미술관, 퀸즐랜드주립미술관과 함께 마련한 자리로, 세 기관의 소장품을 비롯한 미술관의 유무형 자산에 관해 대화함으로써 공공재로서의 미술관의 역할을 재고해본다.

이번 전시 작가 중 한 명인 키리 달레나는 그동안 여러 국내외 전시에서 사진 조각, 설치 외에도 실험적인 다큐멘터리 영상 작품을 선보였다. 마닐라에 거주하는 작가는 남부 타갈로그어 노출(2001~2008)과 현재 RESBAK(응답하라, 살인에 대한 침묵을 깨라)과 같은 인권 단체에서도 활동 중이다.

지워진 슬로건 시리즈는 마닐라에서 열린 시위와 집회의 기록 사진을 편집해 포토샵으로 모든 플래카드와 현수막에 쓴 슬로건을 제거했다. 제거된 문구는 정치적 메시지 뿐만 아니라 결핍과 은폐, 비밀을 암시하는 주제를 담고 있다. 작가는 지워진 슬로건 연작을 위해 마르코스 독재정권 시절 마닐라에서 벌어진 시위 사진을 찾기 위해 기록 보관소를 샅샅이 뒤졌다. 대부분의 사진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1972~1986) 독재 이전인 1950년대와 1970년대 사이에 촬영된 것이다.

키리 달레나, '지워진 슬로건'. 포토래그 바리타 면섬유의 광택 종이에 잉크젯 프린트, 91.4×141.3cm. 2014. 이미지 제공=작가

우선 흑백 사진 이미지를 디지털로 스캔한 뒤 시위 구호의 글자를 지웠다. 지움은 단순한 망각이 아니다. 작가는 지우는 행위를 통해 시간에 묻힌 기억을 이끌어냄으로써 다시 한번 적극적인 저항을 하도록 만든다. 사진은 침묵의 목소리를 담음으로써 섬뜩한 시절의 시간 속으로 초대된다. 맥락이 제거된 슬로건은 ‘레드북 오브 슬로건’이라는 책에 한데 모아두었다.

민다나오 내전(1970~2002) 당시 민간인 희생자 수가 12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마르코스 독재정권 시절 환경 운동가, 언론인, 인권운동가, 노동자, 농업인, 원주민 공동체 구성원, 시민단체 등이 갖은 핍박을 받았다. 2008년과 2009년 사이 내전으로 인해 민다나오에서만 약 50만 명의 주민이 이주했다. 마르코스 독재 이후에도 필리핀 내에서 처형과 실종은 일상적인 현실이었다.

키리 달레나는 이 작품 외에도 태풍으로 인해 부모를 잃고 집과 가족이 사라진 재앙적인 사건에서 살아남은 두 아이의 초상화를 선보인 다큐멘터리 영화 ‘폭풍을 위한 자장가(Tungkung Langit)’(2013)를 통해 절망 위에서 호기심과 희망으로 주변을 탐색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삶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인권 단체와 긴밀히 협력하면서 남은 가족들과 어린이가 겪는 어려움을 기록한 ‘알룬시나(Alunsina)’(2020)를 통해 지역사회의 문제와 시민 참여의 가능성을 탐구 중이다. 알룬시나에서는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정부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수천 명의 마약 용의자가 초법적으로 살해됨으로써 수백 명의 어린이가 고아가 된 한 도시 정착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현재 필리핀은 인권과 언론 문제는 여전히 사회문제로 남아 있다. 지금 필리핀인들은 지워진 피켓에 어떤 문구를 가장 쓰고 싶어할까.

리웬, ‘이상한 과일’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 전시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023-2024. 이미지 제공=서울시립미술관, 사진 촬영=코코아 픽쳐스

온몸에 노란색 페인트를 칠하고, 머리와 상반신을 붉은 등으로 장식한 채 싱가포르 동부의 거리와 해안선을 누비는 한 사내가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명절인 중추절에 불을 밝히는 등을 들고 어디를 가는 것일까. 사진 속 사내는 1980년대 말부터 싱가포르 현대미술을 이끌었던 주요 예술가 중 한 명인 리웬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붉은 나무열매를 연상시키는 퍼포먼스 연작 ‘이상한 과일’은 미국 남부 흑인들에게 가해진 인종차별을 고발한 빌리 홀레데이 노래 제목 ‘이상한 열매’(1939)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상한 열매 노래는 “남부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리네. 잎사귀와 뿌리에는 피가 흥건하고 남부의 산들바람에 검은 몸뚱이가 매달린 채 흔들리네. 포플러 나무에 매달린 이상한 열매”로 시작된다. 12장의 사진으로 남은 리웬의 이상한 열매 연작은 과장된 노란색을 칠한 몸과 ‘중국인’으로 오해할 만한 붉은 등을 통해 피부색으로 인한 고정관념과 인종차별을 드러낸다.

이 퍼포먼스는 싱가포르의 중추절 축제 기간에 진행됐다. ‘1인 등불 행렬’로 축제를 기념하는 작가만의 방식으로 진행된 것으로, 얼굴과 상반신을 가리는 붉은 등불과 노란색 바디 페인팅은 ‘중국인’의 과장된 기표로 작용한다. 이런 과장된 이미지는 사람들이 타인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할 때 생기는 고정관념을 암시하며 동시에 정체성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리웬은 드로잉, 회화, 음악, 설치, 비디오, 사진, 시,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정체성, 민족, 공동체 등을 주제로 삼았다. 그는 퍼포먼스 아티스트로서 특히 노란 남자의 여정을 다룬 ‘옐로우 맨(Yellow Man)’ 시리즈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옐로우 맨 연작은 런던 유학 시절 중화권 출신 예술가로 오해를 받았던 경험에서 비롯됐다.

리웬, '이상한 과일'. C-프린트, ed.1/3+A.P.2, 65.5×86cm(×12개, 액자규격);  42×59.4cm(×12개, 이미지 규격). 2003. 싱가포르미술관 소장, 2011-01619, 2011-01620, 2011-01621, 2011-01622, 2011-01623, 2011-01624, 2011-01625, 2011-01626, 2011-01627, 2011-01628, 2011-01629, 2011-01630. 이미지 제공=서울시립미술관. 사진 촬영=코코아 픽쳐스

이후 자신의 정체성과 싱가포르 문화 속 복잡한 민족성을 과장되게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자신을 칠한 퍼포먼스를 영국, 인도, 일본, 중국, 태국, 멕시코, 싱가포르, 호주의 도시 풍경을 배경으로 밝은 노란색 페인트로 온몸을 뒤덮고 걸어다니는 옐로우 맨 시리즈를 진행했다. 작가는 1994년 후쿠오카 미술관에서 열릴 때 “나는 왜 아직도 스스로를 노란색으로 칠할까? 노란색은 태양의 색이고, 달의 색이고, 고국을 흐르는 강의 색이다. 또한 박해받는 자, 억압받는 자의 색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동남아시아 공연 예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리웬은 싱가포르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말레이시아 연방을 거쳐 공화국으로 빠르게 현대화되는 격동기에 태어났다. 리웬은 예술가 집단인 아티스트 빌리지(The Artists Village, TAV)와 블랙 마켓 인터내셔널(Black Market International)의 회원이자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일련의 국제 공연 예술 행사인 ‘상상의 미래’ 창립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리웬은 1990년 싱가포르의 아티스트 빌리지에서 처음으로 작품을 선보였으며, 그 동안 1997년 쿠바 하바나 비엔날레, 1999년 호주 브리즈번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 태평양 현대미술 트리엔날레, 일본 도쿄 모리 미술관에서 열린 '선샤워: 동남아시아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현대미술'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이밖에도 AAA(아시아아트아카이브)가 소장하고 있는 리웬 아카이브의 자료와 함께 그의 퍼포먼스 작업 기록물, 스케치북과 노트 등이 최초로 공개됐다. 식민지 시대의 과거를 통해 싱가포르의 정체성을 조명한 리웬의 작업은 그가 61세 나이로 타계한 이후에도 각 나라에서 활발히 소개되고 있다.

<작가소개>

키리 달레나(1975~, 필리핀 마닐라)는 마닐라와 민다나오섬에서 활동 중인 시각예술가, 영화감독, 인권운동가다. 필리핀 로스 바뇨스 대학교에서 인간 생태학을 전공하고 모우펀드 영화연구소에서 16mm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을 공부했다. 그녀의 작품은 필리핀 사회의 근본적인 사회적 갈등에 맞서는 불의, 사회적 불평등, 인권을 다룬다. 달레나는 ‘Southern Tagalog Exposure’(2001~2008년 활동), RESBAK(Respond and Break the Silence Against the Killings 2016~현재)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 비엔날레11, KW 현대미술연구소, 엑스로타프린트(2020), 자카르타 비엔날레(2017), 구당 사리나 에코시스템, 자카르타(2017), 싱가포르 비엔날레(2013) 등에 참여했다.

리웬(1957~2019, 싱가포르)은 싱가포르의 라살 예술대학, 시티 칼리지 오브 런던 폴리테크닉에서 공부했고, 이후 2006년에 라살(LASALLE)에서 미술 석사 과정을 마쳤다. 글과 함께 스케치를 담은 책 ‘깨어나는 꿈’(1981)을 출간했으며, 싱가포르 미술관, 서브스테이션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주목할 만한 그룹전으로는 도쿄 국립미술관, 모리미술관에서 열린 ‘선샤워’(2017), 팔레 드 도쿄에서 열린 ‘비밀의 군도’(2015), 싱가포르 비엔날레(2013), 아시아토피아(2008, 1998), 제3회 아시아 태평양 트리엔날레(1999), 섹스타 비엔날레 드 라 하바나(1997), 광주 비엔날레(1995)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싱가포르 미술관,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퀸즐랜드 아트 갤러리, 모리 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2016년에는 조셉 발레스티에 예술의 자유상, 2014년에는 퍼포먼스 스터디 인터내셔널의 예술가 학자 활동가상, 2005년에는 싱가포르 문화 메달을 수상했다.

글: 천수림 사진비평
이미지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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