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6호 김금영⁄ 2024.02.15 14:02:26
“해외 가는 곳마다 한국 수묵화를 본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것을 보는 것처럼 굉장한 놀라움을 표했다. 한국화에 대한 세계의 뜨거운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반면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수묵화를 옛날 그림으로 고리타분하게 바라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우리의 것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지 않나 싶다.”
한국화의 세계화를 이끈 소산(小山) 박대성 화백이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해외 순회 기념전 ‘소산비경(小山祕境)’ 현장에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쏟아냈다. 그는 이번 전시에 앞서 지난 2년 동안 세계를 누볐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 하버드대학교 한국학센터, 다트머스대학교 후드미술관 등 총 8곳의 해외 기관에서 순회전을 열며 한국 수묵화의 매력과 확장 가능성을 보여줬다.
반응도 뜨거웠다. 유력 경제지 포브스에서 박 화백의 작업세계를 소개했고, LACMA에서 처음 열린 한국 작가 초대전에 이름을 올린 ‘박대성: 고결한 먹과 현대적 붓’전은 호응에 힘입어 본래 일정보다 약 두 달 동안 전시 기간을 연장했다.
하버드대학교 한국학센터와 다트머스대학교 후드미술관,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록 찰스왕센터 및 메리워싱턴대학교는 전시 개최와 함께 심포지엄이나 강연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특히 찰스왕센터와 메리워싱턴대에서 있었던 ‘박대성: 먹의 재창조’전은 30점이 넘는 작품을 선보이며 박 화백의 해외 전시로는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순회 일정과 더불어 다트머스대의 김성림 교수 주관 아래 네 개의 대학이 전시와 연계해 도록도 발간하며 박 화백의 작업세계를 아우르는 기회도 있었다.
이토록 박 화백의 작업에 세계가 열광한 이유는 무엇일까. 박 화백은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해 냄)의 자세”를 언급했다.
그는 “수묵화는 굉장한 정신세계를 수립하고 있다. 수묵화에 쓰이는 한지는 살아있는 종이다. 또 나무를 태운 그을음에 아교를 섞어 만든 먹의 색은 단순한 검정이 아니라 세상의 색을 담았다. 수묵화에 쓰이는 재료 자체에도 이처럼 철학이 담겼다”며 “오늘날 산업사회는 기술 발전의 속도가 빠르고 화려한 반면, 정신적인 측면은 이에 따라가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특징을 지닌 서양화에 익숙했던 해외 관람객에게 우리 선조의 지혜와 정신세계를 느낄 수 있는 수묵화는 특히 새롭게, 인상적으로 다가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화백의 말을 입증하듯 존 스톰버그 후드미술관 관장은 “박대성의 작업은 한국미술의 과거와 동시대 미학을 융합한다”며 “박대성의 필법과 소재, 그리고 재료는 전통적이나, 동시에 그의 색채사용, 작품의 크기와 구성은 현대적”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다만 박 화백은 정작 한국에서는 외면받는 수묵화의 현실을 한탄하며 “초·중·고 교과서에 우리 전통 동양화, 수묵화를 잘 다루지 않는다. 공공 교육부터 우리 전통에 주목하고 발전시키려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쟁 때 팔 잃고 정규 교육 받지 않고도 이어온 수묵화 외길
박 화백은 다섯 살 때 고아가 됐고, 한국전쟁 때 한쪽 팔을 잃었다. 정규 교육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환경을 모두 극복하게 한 것은 한국화에 대한 깊은 애정이었다. 그는 1969년부터 1978년까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총 여덟 번을 입선했고, 1979년 2회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활동 초기부터 화단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현대미술, 서양화가 인기를 끌 때에도 박 화백은 수묵화에 집중했다. 중국 북경, 계림, 연변 등지로 화문기행을 떠났고(1988~1989년), 실크로드(1993년, 1995년)를 방문해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이국적인 풍경을 현장에서 스케치하는 등 창작의 바탕을 넓히는 데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특히 중국 화문기행에서 만난 중국 현대 산수의 대가 이가염의 조언에 따라 먹과 서(書) 연구에 정진했다. 현재까지도 박 화백은 명필가의 서법(書法)을 습득하고 서작(書作) 원리를 배우는 임서(臨書)로 매일 아침을 시작한다고 한다.
1994년엔 미국 뉴욕에서 다양한 현대미술을 접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이 또한 한국의 수묵화를 현대화해야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박 화백의 인생은 오로지 수묵화 외길이었다. “뉴욕 소호에서 1년을 보내면서 현대미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그때 하나의 작품에 여러 양식과 기법을 적용하고 싶어졌다. 계속 해왔던 것이기에 붓을 다루는 것은 자신 있었다. 다만 어색하게 내 작품을 서구화하고 싶진 않았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이후 1995년 한국으로 돌아와 경주에 정착한 박 화백은 신라 문화에 집중해 불국사를 비롯해 작업실 주변에 가득한 석불과 석탑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신라몽유도’(2022)는 유적들의 비례가 맞지 않을 정도의 큰 크기로 강조됐고, 한데 모여 있으며, 실제 남산의 모습과는 다른 형태로 산맥이 단순화, 왜곡돼 있는데 대상의 재현에 연연하지 않고, 작품을 통해 정신성을 표현하고자 집중한 결과다.
이밖에 작업실이 있는 경주 삼릉의 풍경이나 경복궁과 같은 일상의 소재에 과감한 양식을 더한 ‘삼릉비경’(2017)과 ‘경복궁 돌담길’(2024) 등도 눈길을 끈다. 그가 기증한 830여 점의 작품을 기반으로 경주 솔거미술관도 세워졌다. 이 모든 여정들을 거쳐 현재 순회전까지 박 화백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다. 일평생 ‘보이지 않는 뿌리’를 찾아다녔다”고 회고했다.
삼성 이건희·가나아트 이호재·BTS RM과의 인연
묵묵히 한국 수묵화를 그려온 그의 진심에 응원을 보내온 특별한 인연들도 있다. 박 화백은 ‘이건희가 사랑한 한국화가’로 불린다. “젊은 작가를 적극 발굴하고 소개하라”는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의지에 따라 1988년 호암갤러리에서 박 화백의 대규모 개인전이 열렸고, 이는 그의 작업세계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인연은 단편적으로 끝나지 않고, ‘이건희 컬렉션’에도 그의 작품들이 포함되는 등 긴 시간 이어졌다. 이 중 일부는 국립현대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에 기증됐고, 2021년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이건희 회장 기증작품전 ‘고귀한 시간, 위대한 선물’이 열렸는데, 기증작 중 유일한 생존 작가로 주목받았다. 박 화백 또한 “미국 순회전을 하기까지는 삼성 이건희 회장과의 깊은 인연이 있었다”고 여러차례 언급해온 바 있다.
이번 전시를 주최한 가나아트와의 인연도 깊다. 박 화백은 1984년 가나아트의 1호 전속작가가 되며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과 인연을 맺었다. 한국화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이호재 회장은 박 화백의 작업을 적극 지원해 왔고, 가나아트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도 나타나 현장을 둘러보며 박 화백과 인사를 나누는 등 여전히 돈독한 모습을 보였다. 박 화백의 미국 순회전 당시 가나문화재단은 예술경영지원센터와 함께 영문 서적 ‘박대성: 먹의 재창조’를 미국에서 발간하기도 했다.
미술 애호가로 유명한 방탄소년단(BTS)의 RM 또한 박 화백의 팬이다. LACMA, 경주솔거미술관, 서울 인사아트센터 등 여러 차례 박 화백의 전시를 찾은 RM의 모습이 포착됐고, 이에 따라 박 화백의 작품에 관심을 보이는 젊은 관객도 늘었다. 경주솔거미술관은 RM이 작품을 감상한 ‘금강폭포’ 앞에 RM 포토존을 설치하고, RM 관람 동선을 따라 ‘BTS RM과 같이 보는 작품’이란 발자국 스티커를 붙이기도 했다. 박 화백은 “RM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의 해외 팬이 독일 전시 때 작품을 보러 온 적이 있었다”고 놀라움을 드러냈다.
해외 화단이 주목한 소산 수묵의 독창성
박 화백의 화업을 돌아보는 이번 전시는 해외 미술 시장에서 특히 찬사를 받은 대형 산수화를 조명한다. 또한 순회전을 계기로 확인된 박 화백과 한국화의 새 지평을 조망한다. 순회전 출품작과 최근 완성된 신작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박 화백이 화업 전반에 걸쳐 천착한 주제와 소재의 완숙한 형태를 선보이며, 그의 예술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더 나아가 해외 화단에서 주목한 소산 수묵의 독창성을 발견하는 자리가 된다.
가나아트 측은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무수한 붓질로 길러온 박 화백의 필력은 그림을 지탱하는 뿌리이자 무한한 가능성으로 뻗어 나갈 힘의 원천”이라며 “무르익은 필치가 그린 대자연의 풍경은 그의 독보적 미학의 정수다. 끝없는 수행으로 마침내 비경(祕境: 신비스러운 경지)의 경지에 오른 소산의 산수에서 생동하는 기운은 물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는 가나아트센터에서 3월 24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