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7호 천수림(사진비평)⁄ 2024.03.05 10:21:38
토마스 루프는 고전적인 인물 사진부터 디지털로 변형된 아카이브 이미지, 디지털 포트그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뤄왔다. 우르슬라 팔라는 테크노화석과 미세플라스틱, 인간이 쌓아놓은 문명이 영원하지 않다는 점을 통해 ‘인류세’ 시기를 사는 우리에게 자연과 인공성의 문제를 드러낸다. 토마스 루프는 실제 현실과 만들어진 현실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져 더이상 둘을 완전히 구분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우르슬라 팔라는 ‘자연’이 사라진 먼 미래 우리는 어떤 삶을 이어갈 수 있을지 질문한다.
토마스 루프, ‘도프(d.o.pe.)’
“지각의 문이 깨끗해지면 모든 것이 인간에게 있는 그대로, 무한하게 보일 것입니다.” - 윌리엄 블레이크
토마스 루프는 지금까지 1980년대에 촬영한 가장 유명한 시리즈인 대형포맷의 ‘초상화’를 시작으로 1991년부터 뒤셀도르프 주변의 건물과 거리 풍경을 적외선 사진으로 촬영한 ‘나흐트’, 신문 사진(텍스트 문맥이 제거된 아날로그 신문 사진)으로 불리는 ‘프레스++(press++)’, 픽셀 구조가 보이도록 이미지를 흐리게 처리한 ‘jpeg’(맥락 없이 디지털로 배포된 이미지) 시리즈, NASA의 토성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카시니’와 ‘마스터’ 시리즈, 19세기 전자기학 서적에서 발견된 동판화에서 영감을 받은 사진까지 그의 여정은 살아있는 사진의 역사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번 PKM 갤러리에서 4월 13일까지 열리는 개인전 ‘d.o.pe.’전도 특수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사용해 만든 프랙탈을 기반으로 산업용 태피스트리에 프린트한 것으로 인간의 지각에 관한 지속적인 연구의 결과물이다. d.o.pe.의 착시를 일으키는 환각적인 이미지는 실제 현실과 구성된 현실에 대한 탐구로 그간 인간의 지각에 대한 루프의 지속적인 관심사의 연장선에 놓여있다.
전시명 d.o.pe.는 영국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1954년 자전적 에세이 ‘지각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에서 제목을 따온 것이다. 지각의 문은 정신변화와 인공적인 감각의 의식 확장 가능성을 다룬다.
2000년대 초 루프는 1975년 수학자 브누아 만델브로가 만든 ‘프랙탈(fractal)’이라는 시각화된 기하학적 구조에 처음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프랙탈은 자기 유사성을 갖는 기하학적 구조를 말한다. 프랙탈 패턴은 원래 도형의 어느 부분을 확대하면 같은 모양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데 자연물, 수학적 분석, 생태학적 계산, 위상 공간에 나타나는 운동모형 등에서 발견된다.
자연 구조와 인공 구조로서의 프랙탈의 상관관계는 인간의 지각에 대한 루프의 지속적인 연구와 맞닿아 있다. d.o.pe. 연작의 토대는 루프가 젊은 시절 지미 헨드릭스와 같은 아티스트의 음악을 들으며 약물을 했던 경험을 환각의 미학에 대한 인식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전시장 벽면에 확대돼 관람객을 감싸 안을 듯한 다양한 색상과 구성의 대형작품은 인화지를 사용하는 대신 벨기에의 산업용 태피스트리에 벨루어(Velour)에 이미지를 프린트했다. 사이키델릭한 이미지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널리 퍼진 개념이지만, 루프의 기술적 접근 방식은 그의 작품을 과거의 작품과 차별화한다.
복잡한 수학적 현상의 아름다움을 시각화한 이미지는 마치 내면의 의식 속을 탐험하듯 손을 뻗어 작품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촉감뿐 아니라 마치 제임스웹 망원경으로 찍은 우주 속으로 들어가버릴 것 같은 무한한 시각적 확장을 경험하게 된다. 벨루어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인테리어 장식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 방법은 d.o.pe.의 환각적인 패턴에 오브제 같은 개성을 부여한다. 실재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이런 시각적 언어는 부드럽고 유기적인 벨루어 태피스트리 자체의 직물 특성으로 인해 증폭된다. 그의 작업의 중심에는 사진을 구성하는 개념의 선구적인 확장이 있다.
우르슬라 팔라, ‘더 문 인 마이 포켓(The Moon in My Pocket)’
비디오를 매체로 작업하며 프로젝션, 현실, 건축이라는 주제를 광대한 설치물과 오브제를 통해 탐구하는 스위스 작가 우르슬라 팔라 전시를 서울에서도 만나는 기회가 마련됐다. 탕컨템포러리아트 서울에서 3월 2일까지 열린 ‘The Moon in My Pocket’전에서 작가는 자연과 인간, 미디어와의 상호작용에 대해 독특한 시각을 제시했다.
우르슬라 팔라는 1990년대 이후 영상 매체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덧없음, 잃어버린 것들의 회복, 인간과 자연의 복잡한 관계를 통한 자각의 순간을 담아왔다. 특히 인간의 지질학적 시대인 ‘인류세’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자연, 문화, 기술의 관계, 인간과 환경 사이의 양가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작가의 시적 이미지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전시장을 들어가서 처음 만나는 비디오 작품 ‘그레이트 화이트’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덧없음이 강조된다. 그레이트 화이트 영상에는 한 무리의 눈사람이 등장한다. 영원할 것은 이 실내 공간은 곧 서서히 녹아내리는 온도를 견디지 못한다. 절제된 움직임에 느리게 흐르는 시간의 흐름을 타고 결국 방안엔 웅덩이와 자갈만 남는다. 이 작품을 등지고 돌아서면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무리 지어 서 있는 ‘스노우 피플(Snow People)’을 만날 수 있다. 유리로 주조된 눈사람은 눈의 형상이지만 마치 다양한 고뇌를 지닌 인간 군상을 연상시키며 감정이 이입된다.
작가는 초기에 출현과 사라짐 사이의 인간의 모습을 강조했다면, 2000년 이후에는 식물과 동물로 초점이 옮겨지면서 자연의 인공성을 주된 테마로 삼았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자연과 인공의 경계가 사라진다.
마치 실제처럼 보이는 버려진 들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식물은 청동으로 주조된 엉겅퀴다. ‘엠프티 가든(Empty Garden) 3’에 투사된 풀잎 영상은 흔들리지만, 청동으로 만든 미세한 식물조각은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유지한다. 엉겅퀴 조각은 비디오로 보이는 살아있는 야생의 식물들과 함께 중첩돼 새로운 공간으로 확장된다. 영상 속 흔들리는 식물의 움직임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조각과 대비된다. 잘 가꾸어진 정원과 자연이라는 개념 뒤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허브 앤 위즈(Herb and Weeds)’ 시리즈에서도 잡초를 만날 수 있는데 이 식물은 인간이 가꾼 정원에서는 볼품없는 존재다. 하지만 생태계 안에서 이들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한 고유성을 지니는 존재들이다. Empty Garden 3, Herb and Weeds 시리즈 외에도 동물과 식물의 모티브는 ‘버드(Bird) 3’, ‘홀스(Horse)’ 등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Bird 3 작품에서 등장하는 백조는 석고로 된 두 발을 앞으로 뻗은 채 갤러리의 벽에 투사된다. 석고와 영상으로 재현된 시각적으로 매혹적인 백조의 모습과 실제 존재하는 백조 사이에 내재하는 근본적 제약을 통해 ‘아름다움’에 대해 질문한다.
하얀 책 ‘더 북(The Book)’ 위에 비치는 영상은 다양한 유럽 도시에 정착하기 위해 보내진 편지들이다. 페이지를 넘기는 듯한 행위에 의해 중단되고 해체된 이미지는 부서지는 파도처럼 편지의 조각들로 남는다. 이미지와 소리 콜라주로 남은 이민자들의 단절은 평화와 문화적 소통의 부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닥에 설치된 여러 개의 모니터 영상 ‘사우전드(Thousand)’에서는 개미들이 화폐 사이를 드나들며 파먹고 있는 다양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상하이의 한 여인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 여인은 침대 매트리스 밑에 돈을 모아두었는데 얼마 후 그 돈이 거의 다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이 돈은 개미나 다른 벌레가 좀먹으면서 손상됐을 것이다.
The Moon in My Pocket은 마치 춤을 추는 듯한 옷과 조각난 천들이 날리고 가지에 걸리고 바닥에 떨어지는 황량한 풍경을 만난다. 작가는 환경변화로 인해 더이상 인간의 힘으로 움직이지 못할 자연의 한순간을 상상하게 만든다. 자연의 기능이 멈춰버린 듯한 장면은 SF소설이나 영화의 단골소재로 다뤄진 것들이다.
하지만 작가는 괴멸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살아날 나뭇가지를 작품에 남겨둔다. 우르슬라 팔라가 창조한 시적인 이미지의 공간은 자연의 경이로운 힘과 다양함의 힘을 극적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이런 메시지는 과학자 레이첼 카슨(1907-1964)의 ‘침묵의 봄’을 저절로 떠오르게 만든다.
<작가소개>
토마스 루프(Thomas Ruff, 1958년 출생)는 현재 뒤셀도르프에서 거주 및 활동 중이다. 독일 쿤스트아카데미 뒤셀도르프에서 베른트 베허 에게 사진을 사사했다. 1980년대부터 뒤셀도르프 사진학파의 주요멤버로 활동을 시작한 뒤 뉴욕현대미술관, 런던 국립초상화박물관, 뒤셀도르프 K20, 도쿄국립근대미술관, 타이중 국립대만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의 대표작가로 참여했다.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워싱턴 D.C. 허쉬혼미술관, 파리 조르주 퐁피두센터 등을 포함한 전세계 유수 미술기관에서 루프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우르슬라 팔라(Ursula Palla, 1961년 출생)는 현재 취리히에서 거주하며 일하고 있다. 그녀는 비디오와 공간 조각을 연결하고 성형 설탕과 같은 민감한 재료로 작업하고 있다. 자연과 야생의 연약함이 많은 작품의 초점이다. 우르슬라 팔라의 설치 작품은 시적이면서 동시에 공허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우르슬라 팔라의 초기 작품에서 인간은 존재와 사라짐 사이의 인물로 강조됐지만, 2000년 이후에는 식물과 동물의 세계가 모티브로 등장한다. 쿤스트할레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취리히, 베른 쿤스트뮤지엄, 분트너 쿤스트뮤지엄,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 쿠어, 스위스 연구소 뉴욕/미국, ZKM, 카를스루에 예술+미디어 센터 등에서 전시했다.
글: 천수림 사진비평
이미지 제공: PKM갤러리, 탕컨템포러리아트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