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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불교미술에 존재하는 ‘그녀’들의 이야기

호암미술관,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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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69호 김금영⁄ 2024.04.02 15:56:07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1부 전시장 일부 전경. 사진=김금영 기자

무릇 어떤 장면을 볼 때는 중심에 있는 인물에 눈길이 쏠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중심에서 약간 비켜 있지만, 절대 희미하지 않은 묵직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인물들에 주목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삼성문화재단이 운영하는 호암미술관이 동아시아 불교미술을 조망하는 대규모 기획전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을 연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대대적인 리노베이션 이후 재개관한 호암미술관의 첫 고미술 기획전으로도 주목받았다. 이 자리의 주인공은 한국, 중국, 일본 3국의 불교미술이다. 특히 불교미술에 담긴 여성의 역사를 따라간다.

이는 전시 제목에서도 드러난다. 전시 제목인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은 석가모니 부처의 말씀을 모아 놓은 최초의 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에서 인용한 문구로, 불교를 신앙하고 불교미술을 후원하고 제작했던 여성을 진흙에서 피되 진흙에 물들지 않는 청정한 연꽃에 비유했다는 설명이다.

전시는 아이디어 제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어언 5년에 걸친 긴 준비 과정을 거쳤다. 전시를 기획한 이승혜 호암미술관 큐레이터는 “처음 전시 아이디어를 낸 건 2019년이었다. 당시 현대미술을 중심으로 미술계에서도 여성을 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했는데, 상대적으로 불교미술에서는 관련한 시도가 많지 않았다”며 “불교미술에 존재하는 많은 여성의 존재를 조명할 대대적인 자리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금동 관음보살 입상'은 이번 전시를 통해 국내에서 일반에 처음으로 공개된다. 사진=김금영 기자

그의 말처럼 부처와 보살은 남성이었고, ‘여성은 선천적으로 자질이 부족해 성불에 이를 수 없다’는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불교미술 속 여성은 어머니 기능을 하는 데 그치는 등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전시는 기원후 1세기경 부처의 가르침이 동아시아로 전해진 이래 불교를 지탱한 옹호자이자 불교미술의 후원자와 제작자로서 기여해 온 여성의 존재감이 결코 작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이를 위해 전 세계 27개 컬렉션에서 모은 불화, 불상, 사경과 나전경함, 자수, 도자기 등 다양한 장르의 불교미술 걸작품 92건(한국미술 48건, 중국미술 19건, 일본미술 25건)을 한자리에 모았다. 출품작 중 한국에서는 리움미술관을 비롯해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기증품 9건을 포함한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중앙박물관 등 9개의 소장처에서 국보 1건, 보물 10건, 시지정문화재 1건 등 40건을 선보인다.

해외에서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보스턴미술관 등 미국의 4개 기관, 영국박물관 등 유럽의 3개 기관, 도쿄국립박물관 등 일본의 11개 소장처에서 대여한 일본 중요문화재 1건, 중요미술품 1건, 현지정문화재 1건 등 52건을 전시한다. 특히 전시 작품 중에 ‘금동 관음보살 입상’, ‘감지금니 묘법연화경 권1-7’, ‘아미타여래삼존도’, ‘수월관음보살도’ 등 9건을 국내에서 일반에 처음으로 공개한다.

또한 해외에 흩어져 있던 조선 15세기 불전도(석가모니 일생의 주요 장면을 그린 그림) 세트의 일부인 ‘석가탄생도’(일본 혼가쿠지)와 ‘석가출가도’(독일 쾰른동아시아미술관)를 세계 최초로 한 자리에서 전시한다. 아울러 ‘석가여래삼존도’(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 47건의 작품을 한국에서 처음 전시한다.

동아시아 불교미술 ‘여성’ 관점에서 조망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1부 전시장 일부 전경. 사진=김금영 기자

1부 주제는 ‘다시 나타나는 여성’으로, 불교미술 속에 재현된 여성상을 인간, 보살, 여신으로 나눠 살펴보면서 지난 시대와 사회가 여성을 바라본 시선을 이야기한다. 1섹션 ‘여성의 몸: 모성(母性)과 부정(不淨)’은 조선 전기와 후기를 대표하는 불전도와 중국 원대의 백묘화, 고려시대의 변상판화와 일본 에도시대의 회화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불화의 향연을 통해 불교미술 속에 시각화된 여성의 유형과 의미에 대해 살펴 본다.

동아시아 불화 속 여성은 양가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가장 빈번하게 재현된 유형은 어머니로,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 권위있는 모습으로 표현된 ‘석가탄생도’, 석가모니의 부인인 구이(俱夷)가 등장하는 ‘석가출가도’, 석가모니의 이모이자 양모로 최초의 여성 출가자가 된 대애도(大愛道)를 그린 ‘이모육불도’ 등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반면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몸은 집착과 정념의 근원으로 간주돼 부정한 대상으로 그려졌다. 사람의 시신이 변해가는 아홉 단계를 보면서 수행하는 구상관(九相觀)에서 유래한 일본 무로마치시대의 ‘구상시회권’은 이러한 시선을 잘 보여준다.

'여성은 선천적으로 자질이 부족해 성불에 이를 수 없다'는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불교미술 속 여성은 어머니 기능을 하는 데 그치는 등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사진=김금영 기자

2섹션 ‘관음: 변신(變身)과 변성(變性)’에서는 본래는 남성이되 모든 중생의 어머니가 돼 달라는 뭇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자유자재한 관음보살의 응신들이 동시에 현현한 듯한 공간을 만날 수 있다.

관음보살은 고려시대의 ‘천수천안관음보살도’가 보여 주듯이, 자비의 마음으로 늘 중생을 굽어 살피고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여러 모습으로 바꿔 세상에 나타난다고 믿어졌다. 동아시아의 관음보살은 백제 ‘금동 관음보살 입상’에서 볼 수 있듯, 고대에는 인도와 마찬가지로 본래의 성별대로 젊은 청년의 형상으로 묘사됐다. 그러나 자비를 모성적 가치로 인식한 중국 사회에서는 10세기 이후 점차 무릎에 아이를 안고 있는 ‘송자관음보살도’, 머리카락을 두건으로 가린 ‘백자 관음보살 입상’과 같이 여성형으로도 널리 재현됐다.

3섹션 ‘여신들의 세계: 추앙과 길들임 사이’는 고려시대 왕실과 민간에서 활발히 신봉했던 마리지천과 일본과 중국의 불화 속 부처의 감화를 받아 선신(善神)으로 거듭난 귀녀(鬼女)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을 교화시키고 길들여야만 하는 존재로 바라본 과거의 시선을 살펴본다.

대표적으로 승리의 여신이자 만복을 준다는 마리지천을 표현한 ‘은제 마리지천 좌상’은 한국불교 속 여신 신앙의 일면을 보여준다. 중국에서는 아이를 잡아먹은 귀녀에서 불교를 수호하는 모성(母性)의 여신으로 변모한 귀자모(鬼子母)의 이야기가 인기를 끌어 명대 혹은 청대의 ‘게발도’ 등 회화 뿐 아니라 연극에서도 독립적인 주제로 발전한다. 일본에서는 ‘석가여래오존십나찰녀도’에서 볼 수 있듯, 여성들의 문화적 역량이 꽃핀 헤이안시대 이후부터 귀녀인 나찰녀가 귀부인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이러한 귀녀의 이야기는 여성을 교화시키고 길들여야만 하는 존재로 바라본 과거의 차별적 시선을 드러내기도 한다.

불교미술 후원·제작자로 활약한 여성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2부 전시장 일부 전경. '금동 불상군'이 설치돼 있다. 사진=김금영 기자

2부 주제는 ‘여성의 행원(行願)’으로 찬란한 불교미술품 너머 후원자와 제작자로서 여성을 발굴해 사회와 제도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기로서 살고자 했던 여성들을 만나 본다. 저고리 안에 쓴 발원문, 사경의 말미에 금물로 적은 기록, 불화의 붉은색 화기란에 빼곡히 적힌 여성들의 이름과 바람들에 주목한다. 이승혜 큐레이터는 “여성들은 불교를 통해 소원을 세우고 이뤄가는 성취감과 이로 인해 쌓은 공덕을 타인에게 돌리는 고귀한 기쁨을 알아갔다”고 설명했다.

1섹션 ‘간절히 바라옵건대: 성불(成佛)과 왕생(往生)’은 사경과 복장 발원문이 펼쳐진 공간에서 고려 여성들이 공덕을 쌓은 마음을 돌아보고, 아미타여래, 극락정토와 관련된 불화와 불상을 통해 여성들이 꿈꿨던 이상적인 내세를 조망한다. 중세 동아시아 여성들은 여성의 몸으로는 성불할 수 없다는 교리에도 불구하고, 법화경에 나오는 여덟 살 난 용왕의 딸처럼 모든 제약을 뛰어넘어 부처가 되기를 꿈꿨다.

차별적 시선을 내면화한 고려시대 여성들의 자기 인식과 이를 넘어선 성불에의 염원을 동시에 드러낸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복장 발원문’,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염원이었던 내세의 극락왕생을 다루는 중국 10세기 ‘인로보살도’ 등을 볼 수 있다.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전은 불교미술에 담긴 여성의 역사를 따라간다. 사진=김금영 기자

2섹션 ‘암탉이 울 때: 유교사회의 불교여성’은 유교적 가치관이 지배했던 조선시대의 왕실 여성들이 발원한 불상과 불화를 통해 불교도이자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일의 의미를 헤아린다. 조선은 불교를 엄격히 통제했으나 왕실 여성들은 ‘궁중숭불도’에서 보듯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불교를 지지했다.

이승혜 큐레이터는 “사관과 유생들은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서경(書經)’의 구절을 인용해 왕실 여성들의 불사를 줄기차게 비판했지만, 역설적으로 여성의 참여가 활발했던 ‘암탉이 울 때’에 불교 교단은 조선 사회 안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품격 있는 불화와 불상이 대규모로 조성될 수 있었다”며 “종묘를 받들고 후손을 이어가는 일은 왕실 여성들의 가장 큰 의무였기에, 왕의 무병장수와 아들을 비는 이들의 발원에는 기복을 넘어서는 공적 측면이 있다”고 짚었다.

처음으로 한자리에서 선보이는 문정왕후(1501~1565)가 발원한 ‘영산회도’와 ‘석가 여래삼존도’, ‘약사여래삼존도’는 16세기 금선묘(金線描) 불화를 통해 한 시대의 불화 양식을 선도한 독보적인 후원자로서 왕실 여성의 영향력을 살필 수 있다.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안에서 발견된 ‘금동 불감과 금동 석가여래삼존 좌상’과 ‘금동 불상군’ 또한 15세기와 17세기에 왕실 여성의 재정적 지원과 깊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조성됐다.

'자수 아미타여래삼존내영도'엔 여성 신체의 일부인 머리카락이 부처의 형상을 구현하는 재료로 사용됐다. 사진=김금영 기자

3섹션 ‘여공(女工): 바늘과 실의 공덕’은 지금까지 간과됐던 자수와 복식을 여성의 일이자 예술이란 관점에서 새롭게 살펴본다. 자수와 바느질은 여성이 어릴 때부터 습득해야 하는 일이자 필수적인 미덕으로 간주됐다. 불보살의 형상을 수놓은 자수 불화는 깊은 신앙심과 지극한 정성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신체의 일부인 머리카락으로 자수한 수불(繡佛)은 무량한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공양물이자, 부처와 머리카락 주인 사이에 직접적인 연을 맺을 수 있는 매개체로 여겨졌다.

일본의 ‘자수 아미타여래삼존내영도’는 부정하다고 여겨진 여성 신체의 일부인 머리카락을 부처의 형상을 구현하는 귀중한 재료로서 탈바꿈시킨 여성들의 구체적인 창작행위를 보여준다.

‘백지금자 불설아미타경’은 1621년에 인목왕후가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아들(영창대군)과 친정 일가붙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직접 필사하고, 인목왕후를 모시던 궁녀가 자수로 표지를 꾸민 사경이다. 망자가 생전에 아끼던 옷을 이용해 만들어진 승려의 가사나 불상을 조성할 때에 그 내부에 봉안한 의복에는 이로 인해 발생하는 공덕이 죽은 이를 비롯해 모든 이에게 돌아가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전시장 2부 3섹션 '여공(女工): 바늘과 실의 공덕'은 지금까지 간과됐던 자수와 복식을 여성의 일이자 예술이란 관점에서 새롭게 살펴본다. 사진=김금영 기자

전시 연계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국내외 불화 연구자가 참여하는 국제 학술 포럼 ‘불화 속 여성, 불화 너머 여성’이 4월 18일 리움미술관 강당에서 열린다. 고려와 조선시대 불교조각과 불교사 전문가가 일반인의 이해를 돕는 강연 시리즈는 5월 9일·23일, 6월 6일 3회에 걸쳐 호암미술관 워크숍룸에서 열린다.

이승혜 큐레이터는 “시대와 지역, 장르의 구분을 벗어나 여성의 염원과 공헌이란 관점에서 불교미술을 조명하는 새로운 접근을 통해 전통미술 속에서 동시대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전시를 통해 진흙에서 피어난 청정한 연꽃처럼 사회와 제도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기로서 살고자 했던 여성들의 모습을 찾아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호암미술관에서 6월 16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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