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매월당은 날이 밝자 행장을 꾸려 다시 금강산 길에 오른다.
영평현 관아는 지금의 포천 영중면 양문리에 있었다. 옛 양문역(梁文驛)이 있던 지역이다. 북관대로(北關大路: 경성과 함경도 경흥을 잇던 길)는 강원도 김화(金化)로 향한다. 지금의 43번 국도인데 달리 호국로라 부르고 있다.
길을 나서 북으로 방향을 잡으니 길 옆 작은 산줄기에 고성(古城)의 흔적을 만났을 것이다. 명성산(鳴聲山)에서 이어져 온 산줄기인데 918년 궁예가 왕건에게 최후를 맞은 산성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곳 마을 이름은 지금도 성동리(城東里)이니 긴 인연을 가진 마을 이름이다. 산봉우리에는 후세에 순조의 큰아들 효명세자의 태(胎)를 묻었다. 그 인연으로 태봉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효명세자는 22세에 요절했는데 아들이 왕위(헌종)에 오르니 추존되어 익종이 되었다.
발길을 북으로 이어가면 유정(楡亭: 영북면 느릅이 마을)을 지나고 굴운천(屈雲川: 운천)으로 들어간다. 남북 분단 이후에는 군사 도시로 번성하여 이 지역에서 군대 생활을 했던 이들에게는 추억의 고장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나이든 후 명성산 산행 길에서 하산하면서 들르던 지역인데 최근에 들르면 그 번창하던 운천 시장은 너무도 적막하다. 푸짐하고 맛나던 소고기 안주에 곁들이던 백운산 막걸리집도 가겟집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문을 닫았다. 매월당도 굴운천에서 목마름을 풀고 가시지 않았을까? 이제는 국도도 운천에 들르지 않고 바이패스하여 지나간다. 길이 들르지 않는 고장은 급속도로 늙어간다.
지금은 철원이 된 김화 땅
이제 길은 혜재곡(惠才谷: 영북 자일리 ~ 갈말 강포리)을 넘는다. 드디어 강원도 땅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지금의 철원 갈말읍 군탄리가 된 풍전역(楓田驛)은 이곳에서 비교적 큰 역이었다. 후세에 이 길을 간 많은 이들이 이 역에서 묵었다. 농암 김창업도 금강산 길에 이 역에서 하룻밤 유했다고 기록을 남겼다. 매월당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아 아쉽다. 가로개 고개(葛峴) 넘고 장림천, 남대천(花江) 건너면 드디어 김화현 입구인 생창역(生昌驛)에 닿는다. 또 하나의 길은 가로개 고개 대신 서면 자등현(自等峴)을 넘어 가는 것이었다. 지금의 47번 국도길이다.
그런데 금강산길 이전 이미 여러 해 전 매월당은 이곳 김화(金化) 땅에 와 은거했었다는 이야기와 흔적들이 남아 있다.
19세 풋풋한 나이의 매월당은 큰 뜻을 품고 삼각산 중흥사에 머물며 과거 공부에 전념하고 있었다. 1453년 단종 원년이었다. 그때 들려온 이야기. 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 원로 대신을 제거하고 임금에게 양위를 받아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들려온다. 이른바 계유정란(癸酉靖亂)이다.
어찌 이것이 천지간에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매월당은 읽던 책을 불사르고 방랑길에 나섰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알려진 이야기인데, 그러면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의 그 뒤 행적을 알 수 있는 기록은 24세(1458년, 세조 4년)가 되면서 관서 지방을 유람하며 엮은 유관서록(遊關西錄)이다. 그 사이의 기간을 채울 수 있는 이야기가 그의 김화(金化) 칩거일지 모른다.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까지 지냈던 박계손(朴季孫: 1415~1475년)의 일가 7인이 김화 남쪽 복계산(낭수산, 狼首山) 자락으로 칩거해 들어왔다. 부친, 숙부, 형, 세 아들로 이들 영해 박씨 7인은 예조좌랑, 사복정 등을 지낸 당대의 명문가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기 열전의 백이 숙제(伯夷 叔齊)처럼 세상을 버리고 산골 초막동(沙谷村)으로 칩거했으며 심지어 박계손은 숙제(叔齊)의 이름을 따서 박숙손(朴叔孫)으로 개명까지 하였다.
여기에 여말(麗末) 길재의 문인이며 집현전 부제학까지 지낸 조상치(曺尙治)가 세조에 의해 예조참판에 임명됐지만 이를 뿌리치고 이곳 영해 박씨 곁으로 은거하였다. 이에 젊은 혈기를 가눌 수 없었던 매월당도 이곳으로 은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되는 일들이 있다. 김일손의 탁영선생문집에는 50대가 된 매월당에게서 전해들은 자규사(子規詞)가 있다. 단종이 비참한 심정을 읊었다는 자규사에 조상치가 화운(和韻: 운을 받아 시를 지음)하고 이어서 매월당, 영해 박씨 여러 명이 화운한 시들이 실려 있다. 같이 모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내용은 기니 한 꼭지만 읽는다.
(조상치가 읊는다)
소쩍새(자규)가 우네 소쩍새가 울어 子規啼 子規啼
달 밝은 밤 빈산에 무엇을 호소하나 夜月空山何所訴
돌아감만 못하다네 돌아감만 못하다지만 不如歸 不如歸
(중략)
(매월당이 받는다)
소쩍새(자규)가 우네 소쩍새가 울어 子規啼 子規啼
달이 진 하늘에 호소하는 듯한 소리 月落天空聲似訴
돌아감만 못하다네 돌아감만 못하다지만 不如歸 不如歸
이렇게 영해 박씨 7인, 조상치, 매월당 아홉 사람이 모여 비참한 심정을 읊은 것이다. 이제 초여름이 되었으니 우리 동네 뒷산에도 소쩍 소쩍 자규(子規)가 울 때가 되었구나.
뒤에 박계손은 아예 함경도 문천(文川) 운림산으로 들어갔는데 61세로 생을 마감하자 매월당이 그의 행장을 지었다. 깊은 인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세에 김화 사람들은 이들 9분의 충절을 잊지 않고 9명 충신의 위패를 모셨다. 구은사(九隱祠)다. 지금은 철원이 된 근남면 잠곡리(호국로)에 있다. 이른 봄 바람 맞으며 찾아 갔더니 잘 관리되고 있었다.
세상 등지고 바둑 뒀다는 매월당 폭포
그러면 매월당의 자취는 이것으로 전부일까? 아니다, 아예 매월대로 이름 지어진 곳이 있다(근남면 잠곡리 산133).
겸재 정선과 막역했던 사천 이병연은 김화 현감을 지냈는데 이때 겸재를 불러 김화, 철원, 평강, 낭천(화천), 금강산의 명소를 그리게 했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 30점을 ‘해악전신첩’이라는 화첩으로 묶었다, 아쉽게도 이 화첩은 일실되어 그 후 이 중 21점이 같은 화첩 이름으로 다시 탄생했다. 여기에 의미 있는 폭포 그림이 한 점 있다. 제목은 사인암(舍人巖)이다. 왜 폭포를 그리고 사인암이라 했을까? 아마도 ‘세상’을 버린 사람이라는 뜻으로 쓴 것은 아닐까?
요즈음 이곳 폭포 이름은 매월대 폭포다. 옛날 창암(蒼巖)이라 부르던 바위는 매월대(梅月臺)라 부른다. 매월당이 그곳에 올라 바둑을 두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곳 평평한 바위에는 아직도 바둑판이 그려져 있다 한다. 매월당이 김화에 은거했던 시기에 이 골짜기에서 살았다고 해서 그 골짜기가 매월대 골짜기가 되었다. 사천 이병연은 이곳 매월대에서 시 한 수 남겼다. ‘사천시초’에 전해진다.
천년 쓸쓸한 곳 찾아갔더니 幽獨訪千載
옛사람 살던 터전만 있네 古人多草萊
고요히 흐르는 물 구비에는 蕭條流水曲
마음 닦던 열경대(매월대) 황폐하고 蕪沒悅卿㙜
해 지니 두견 울음 소리만 日落杜鵑哭
산은 깊고 송백은 애달프구나 山深松栢哀
처량히 고사리 캐던 곡조인데 凄凉採薇曲
그 곡조 끝나고 다시 배회라 歌罷更徘徊
열경(悅卿)은 매월당의 자(字)이니 겸재와 사천의 시대에도 이곳을 열경대(매월대)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매월당은 정말로 이 골짜기에 와서 젊음의 한 때 세상을 잊었던 것일까?
이제 다시 겸재의 금강산 길로 돌아가자. 매월대는 요즈음 기준으로 보면 김화로 향하는 대로인 43번 국도, 47번 국도 동편의 56번 지방도로 안쪽에 있으니 금강산 길에 나선 매월당이 김화로 들어가는 길로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내 매월당은 김화로 들어가는 강을 만났다. 옛 지도에는 남대천으로 부르던 화강(花江)이다. 한탄강의 최상류 맑은 물줄기인데 미수 허목의 미수기언, 겸재의 그림 화강백전, 류휘문의 금강산 여행기인 북유록(北遊錄)에는 일찍이 화강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김화를 달리 화산(花山)이라 불렀으니 예부터 자연이 아름다웠던 곳임을 어림할 수 있다. 화강을 건너면 나그네들이 쉬어가는 생창리 마을에 생창역(生昌驛)이 지친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북으로 4리 위로 김화 관아가 자리 잡고 있고.
한국전쟁 때 김화는 철의 삼각지대(김화 철원 평강)라는 치열한 전장으로 변하여 모든 것이 사라졌다. 휴전 후에는 분단되고 비무장 지대에 속하여 민간인의 발자취가 끊겼다. 남쪽에 남은 땅은 독립된 군을 유지하지 못하고 철원군의 일부가 되었다. 조선 시대 금강산 가는 길의 출입문과 같던 김화, 그리고 개화기에는 금강산 철도의 김화역으로 번성하던 김화는 아쉽게도 폐허로 돌아가 자연 속에 묻혔다.
이렇게 사라진 옛 김화읍은 이제 화강 곁으로 이전하여 새롭게 삶의 터전을 일구고 있다. 생창역이 있던 생창리는 70년대에 100 가구가 입주하여 다시 마을을 이루었다. 그곳에는 많은 이들이 남긴 여행의 흔적, 삶의 흔적들이 문집에 남아 있어 그날의 생창리와 김화를 그립게 한다.
매월당도 아마 화강 건너 생창리에서 발길을 멈추었으리라. 필자도 식당 하나 없다기에 새 김화읍 편의점에서 김밥을 사고 생창리 길가 정자에서 먹으며 매월당을 생각한다.
김화 길가 누각에서 잠시 쉬며
산 겹겹 물 첩첩 길은 꾸불꾸불
무릉도원 골짜기 속에 온 듯하구나
가는 비 이제 개니 보리 물결 살랑이고
들꽃은 갓 터져 벌을 꼬이네
중선*루에 올랐으니 어찌 부(賦: 詩의 한 형식) 한 수 없으랴
반랑**의 나귀 여행 정히 기쁠 만하지
이 길 따라 멋진 풍경 놀며 보면서
꽃 보며 다 오르면 그 얼마나 높을까?
金化路傍樓上小憩
山重水疊路縈廻. 似入桃源洞裏來. 小雨新晴搖麥浪. 野花初拆引蜂媒. 仲宣樓上那無賦. 潘閬驢中正可咍. 從此遊觀好風景. 看花登盡幾崔嵬.
*중선(仲宣): 후한(後漢) 때 시인으로 악양루에 올라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다. 그 부(賦)가 뛰어나 칭송이 자자했다. 매월당은 김화 루(樓)에 오르니 중선이 생각난 것이다.
**반랑(潘閬): 송나라 시인이다. 화산(華山) 구경을 하다가 거기에 빠져 나귀를 거꾸로 탔다. 매월당이 금강산 여행에 앞서 설레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매월당은 머지않아 만날 금강산을 앞두고 가슴이 콩당거린다. 그러나 560여 년 뒤 생창리에 선 필자 앞은 비무장 지대가 막아서 있다. 다행히 비무장 지대 안에서 자연으로 돌아간 옛 김화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DMZ 생태관광 코스’가 있어 그 코스를 따른다. 코로나와 돼지열병으로 닫혀 있던 길이다. 아프지만 그 길을 따라 걷는다. 흔적만 남은 철길, 자연으로 돌아간 김화읍, 다행히 화강 물은 맑고 맑게 흐르고, 재두루미도 마중 나와 준다. 끊어진 다리 암정교도 빛바랜 색으로 남아 있다. 아~ 언제 저 길로 금강산을 갈거나….
김화 객관에서 밤을 지새운 옛 선비의 시 한 수 읽으며 저 산을 본다.
이쪽 지방을 사랑한 이민구(李敏求)의 동주집 동유록(東游錄)에서,
김화 동헌에서 차운하다(金化東軒次韻)
삼경에 바람과 이슬 숲 가득 내리니 三更風露滿林低
꿈 깨는 가을 소리 푸른 나무 서쪽에서 夢覺秋聲碧樹西
짐짓 지난 날 나그네 일 생각하면 猶憶昔年爲客處
두견은 봄밤에 애끓게 울었었지 子規春夜盡情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