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기 롯데월드 전 대표의 신간 ‘대기업 사장보다 신나는 온세상 맹렬걷기’를 읽으면서 ‘몸으로 하는 인생 설계’라는 생각을 해본다.
미래에 대한 생각은 누구나 한다. 미래를 생각하는 게 가장 인간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조삼모사’란 말이 있듯, 동물들에겐 지금 당장만 의미있지 미래는 안중에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미래 생각이 인간의 본성이라고는 하지만 준비를 어느 정도 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르다. 준비의 정도가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은퇴 뒤다.
퇴직 뒤 드러나는 인생 진면목
함께 직장을 다닐 때야 매일 해야 하는 ‘회사 일’이 있지만, 은퇴하면 스스로 알아서 자신의 시간을 관리해야 하는데, 이때 미리 준비해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확 갈라진다.
박 대표는 40여 년간 직장생활을 한 인물이다. 롯데월드라는 국내 최대 테마파크의 책임자였으니 24시간이 정신없게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서 “대표 시설 휴가를 내 자유 여행을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그지만, 그래도 바쁜 짬을 내 해온 일이 있으니 바로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산에 오르는 일이었다.
퇴직 뒤 그 역시 잠시 “골프나 치고 술이나 마시는”, 전직 대기업 임원다운 생활도 했지만, 재미가 없었다. “황금 같은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고 등산을 해온 자신의 주특기를 살려서 “70살이 되기 전에 전세계 주요 트레킹 코스를 모두 섭렵하자”는 장기 도전 과제를 세운 뒤 바로 실행에 나섰다.
현직 시절 몸으로 은퇴 준비를 했듯(등산), 퇴직 뒤에도 몸으로 실행하는(전세계 트레킹 코스 섭렵) 중장기 미래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는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로 날아갔고, 한 달 남짓의 유럽 여행을 마친 뒤에는 귀국하자마자 3일만에 다시 일본 가고시마 화산으로 날아가는 맹렬 세상 걷기에 나섰다. 이어 몽골,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남미, 튀르키예를 걸었고, 요즘도 국내 산을 쉬지 않고 돌아다닌다.
퇴직 뒤 더 놀라게 만들다
이런 그의 태도는 주변 지인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원래 낙천적, 행동적 성격이지만 은퇴 뒤 대개의 잘 나가던 지인들이 “그때가 좋았어” “버스-지하철은 어떻게 타는 거야?”라면서 당황스럽거나 지루한 일상들을 보내고 있을 때 박 전 대표는 “핸드폰에 앱 3개만 깔면 해외 어디를 가든 의사소통과 교통 파악에 문제가 없다”고 자신하며 전세계를 돌아다니니 놀랄 만도 했다.
‘잘 나갈 때(대기업 현직)는 개인특성을 잘 보기 힘들고, 못 나갈 때(은퇴 뒤)야말로 개인 특성이 잘 드러난다’는 말을, 극적으로 증명하는 게 바로 박 전 대표 사례다.
누구나 미래 준비를 한다고는 하지만, 유구한 양반들의 문자(한문) 생활 역사를 가진 이 나라에선 대개의 잘 나가는 사람들이 머리와 말로 미래 준비를 한다. 유튜브를 뒤덮고 있는 재테크, 부동산 투자 요령들이 이런 세태를 증명한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은퇴 뒤를 ‘몸’으로 돌파하고 있으며, 그런 그의 태도는 세계 주요 트레킹 코스 걷기에 도전하는 자신의 ‘걷기 3원칙’에서 잘 드러난다. 3원칙은
1. 조건을 달지 말고 자유롭게 돌아다니자
2. 가능한 한 많이 걷자
3. 너무 돈을 의식하지 말자
이다.
1-2번이 ‘무조건 걷자’주의이고, 3번은 요즘 세태가 신으로 모시고 있는 ‘돈’에 대한 얘기다. 무조건 걸으면서 그는 행복감에 휩싸인다. 그런 행복한 이야기가 이번 책에 가득하다. 세계를 걷자니 물론 돈이 든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경비로서의 돈은, 부동산이나 재테크 등에 들어가는 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소액이다.
‘남보기에 그럴 듯?’에 안 시달리는 인생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선교사를 보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부흥시킨’ 나라가 조선이었다. 한국 기독교 순교사 초기에 정약용 등 일부 남인 지식인과 일반 서민들이 빠져들었던 책 중 하나로 ‘칠극(七克, 중국에 파견된 스페인 신부 판토하가 1614년 한문으로 쓴 책)’이 있고, 이런 구절이 있다.
“가시는 손을 펴서 취하면 다치지 않지만, 손바닥을 구부린 채 이를 쥐면 다치게 된다.”
즉, 재물은 가시나무 같아서 이를 세게 쥐고 놓지 않으면 손을 다치고, 반대로 손을 편채 편안하게 살살 가시나무를 다루면 해로움이 없다는 말이다.
‘부동산에 환장한 나라’에서, 특히 장-노년층이 더욱 부동산에 집착하지만, 박 전 대표는 돈에 집착하기보다는 몸 움직임에 더 집착하면서 “내 진짜 전성기는 이제 막 시작됐다”면서 60대의 삶을 온몸으로 즐기고 있다.
그의 이런 즐거움은 “대기업 사장 출신다워야 한다”는 ‘그럴듯함 주의’에서 벗어났기에 또한 가능하다. 자신의 즐거움보다는 버릇처럼 ‘남들 보기에 그럴 듯 할까?’를 먼저 생각하는 한국의 장-노년층에선 드문 사례라서 더욱 눈길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