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한탄강 남쪽 함밭이 마을을 떠난 매월당은 신천(莘川) 개울을 따라 남으로 내려온다. 나뭇잎들이 이미 붉게 물든 가을날이었다. 이 길은 우리 시대에 372번 지방도를 거쳐 368번 지방도로 이어진다.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연천 청산면 면소재지인 초성리에 닿는다. 경원선 초성리역이 있었는데 전철화가 된 이후에는 역이 옮겨가 청산역이 되었다. 예전에는 모두 양주 땅이었지만 이제는 초성리를 경계로 북쪽은 연천, 남쪽은 동두천이 되었다.
이어 368번 지방도는 끊기고 3번 국도에 흡수된다. 모두 신천을 끼고 내려오는 길인데 매월당도 이 길을 따라 내려왔을 것이다. 이렇게 내려오다 보면 우리 시대의 소요산역을 만난다. 소요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여서 등산객과 행락객을 위한 상가 지역이 형성되어 있다.
소요산은 일찍이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린 대로 아기자기한 암봉에 소나무가 자태를 자랑해 왔고, 가을이 되면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매월당 때도 같았을 것이다. 그는 남으로 내려오다가 지금의 소요산역 앞에서 좌측으로 길을 꺾어 골짜기 길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단풍으로 물든 산을 바라보며 절길을 찾아 들었겠지. 그때 매월당의 눈에 띈 것은 자그마한 빈터였다. 누구의 건물터였을까? 매월당은 시 한 수 읊는다.
행궁 터
이내는 들풀을 덮고 풀은 옛터를 덮었는데
일찍이 여기에 선왕께서 채색 수레 세우셨지
임금이 떠나시니 구름도 벌써 변했고
붉은 등나무 고목은 제 맘대로 얽혔네
行宮址
煙埋野草草埋墟. 曾是先王駐彩輿. 龍去鼎湖*雲已變. 紫藤枯樹謾相拏.
*정호(鼎湖): 옛 중국 전설의 황제(黃帝)가 용을 타고 승천함. 임금의 갑작스런 붕어(崩御)
이제 필자의 옛글, ‘옛 절터 가는 길 19’(2012년 10월 29일 문화경제 게재)를 인용하여 행궁터 스토리를 풀어간다.
절 길 가는 중간에는 관광지원센터가 있다. 센터 앞쪽 화단 위에는 조그만 돌비석이 서 있는데 ‘李太祖 行宮址(이태조 행궁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600년 전 태조 이성계의 행궁터가 왜 이 골짜기에 있는 것일까? 거기에는 조선초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이란 역사의 상처가 숨어 있다. 태조 1년(1392년) 8월 20일자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보자.
“방석(芳碩)을 왕세자로 삼았다.
…중략…
“임금께서 물으시기를 누가 세자가 될 만한 사람인가?”
장자(長子)로 세워야만 되고, (아니면) 공로가 있는 사람으로 세워야만 된다고 간절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배)극렴이 말하기를 “막내 아들이 좋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뜻을 정하여 그(방석)를 세자로 세웠다.
(芳碩爲王世. …중략… 上問誰可爲世子者? 未有以立長立功切言. 克廉曰: “季子爲可.” 上遂決意立之)
이태조 행궁이 이곳 소요산 골짜기에 있게 된 발단은 바로 이날 이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고려 장군 이성계가 최영을 제거하고 실권을 잡은 후 반대파를 차례로 제거하여 역성혁명을 이룬 해가 1392년이었다.
태조 이성계에게는 향처(鄕妻: 고향 부인) 한씨와 경처(京妻: 서울 부인) 강씨가 있었는데 한씨 부인에게서 6명의 아들을 두었고, 강씨 부인에게서 아래로 두 아들을 두었다. 문제는 세자책봉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건국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는 다섯째 아들 방원(芳遠)이었는데 방원은 세자책봉은 물론 공신(功臣)에도 오르지 못하였다. 방원의 세력을 꺾으려는 정도전 세력에 의한 견제였을 것이다. 8째 아들 방석(芳碩)이 세자책봉 된 것은 태조 이성계의 강씨 부인에 대한 사랑도 있었겠지만 방원을 견제하려는 정도전 세력의 힘이 더 컸을 것이다.
이방원과 정도전 세력의 한판승부
태조 7년(1398년) 8월 태조가 위독하였는데 왕자들은 모두 궐(闕)로 들어오라는 명이 떨어졌다. 방원은 태조의 위독함을 빙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자신을 비롯한 한씨 부인 아들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방원은 정도전 일파를 역습하여 제거하고 강씨 부인 소생의 이복 아우 방번(芳蕃), 방석(芳碩)도 제거하였다. 이 사건이 ‘제1차 왕자의 난’인데 이는 정도전 세력과 이방원 세력의 권력다툼 성격이 강하다.
여기에 충격을 받은 태조는 왕위에서 물러나 마음을 잡지 못하고 그야말로 주유천하(周遊天下) 하는 세월을 상당 기간 보낸다. 왕자의 난으로 표현된 이 사건의 실체는 방원에 의한 구테타의 성공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어느 날 백운사의 노승 신강(信剛)이 알현했는데 이태조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못하였다. “방번, 방석이가 모두 죽었소. 내 비록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구려. (芳蕃, 芳碩俱死矣. 予雖欲忘, 不可得也)”
배다른 형에게 죽임을 당한 어린 자식들에 대한 애비의 마음은 이런 것이었다. 그 많은 전쟁터에서 죽이고 죽는 삶을 살아온 그도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거산 관음굴로, 평주 온천으로, 낙산사로, 보개산으로, 정릉사로, 안변 석왕사로, 금강산 유점사로…. 그러다가 방원이 왕위를 이어받은 태종 1년(1401년) 11월에는 아예 짐 싸들고 이곳 소요산(逍遙山)으로 들어왔다.
그날의 실록 기록은 이러하다.
한밤 중 태조가 소요산으로 갔다. 태종이 문밖에서 전송하려 했으나 못 미쳤다.
(中夜, 太上王幸逍遙山. 上欲送于門外, 不及)
요즈음 누군가 한밤중 가출하는 모습 그대로 아닌가. 이렇게 해서 태조의 소요산 생활이 다음해 6월까지 약 8개월 간 계속되었다.
그런데 하루 이틀이야 소요사(逍遙寺)에 머무를 수 있겠으나 열악한 절에서 겨울을 나는 일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태조는 드디어 궁중에서 문안차 나온 신하에게 절 아래에 집을 짓고 머무르겠다고 한다. 핑계는 훌륭한 스님이 있어서였다(此寺有名師, 欲於寺下營室居之). 이때가 엄동설한 한겨울이니 노복과 가까운 지역 백성들을 징발했는데 고생이 많았다.
드디어 태종 2년(1402년) 3월 9일 별전(別殿)이 지어졌다(太上王營別殿于逍遙山下). 그런데 태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손님을 접대할 전(殿) 한 채를 더 짓고자 하였기에 한 채가 더 지어졌다.
이렇게 소요사 아랫녘에 작은 규모의 두 전(殿)이 지어졌는데 현재 ‘이태조별궁지’ 표석이 서 있는 곳과는 거리가 있는 듯하다. 현종 때 남인의 영수로 노론 송시열과 대립각을 세운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 있었다. 고향 연천으로 가는 길에 소요산에 들렸던 이때 쓴 ‘소요산기’(逍遙山記: 요즈음 표현으로 하면 소요산 산행기)가 ‘미수기언(眉叟 記言)’에 실려 있다. 그 글에 별궁 터를 비정할 수 있는 힌트가 있다. 골자기 입구 안팎 산 아랫사람들이 이어 전하기를,
“왕궁의 옛터 두 곳이 있는데 우거진 숲속에 두어 층의 층계만이 남아 있으니, 이것은 영락(永樂: 명 성조의 연호) 때에 태상왕(太上王: 태조)의 행궁이다. …중략… 궁터 위에 폭포가 있는데”(谷口內外山下人相傳. ‘王宮遺墟二處. 荒草中有石砌數重而已. 此永樂間太上行宮云 …중략… 宮墟上有瀑布…’)라고 하였다.
실록의 글과 소요산기를 종합해 보면 별궁은 두 곳으로 절(소요사, 지금의 자재암) 입구 폭포(원효폭포) 아래쪽이 된다. 현재 ‘이태조 행궁지’ 표지석이 있는 곳보다는 훨씬 위쪽이 된다.
매월당이 지날 때도 풀이 그 터를 덮었고(草埋墟), 미수 선생이 지날 때는 두어 층만 남았었는데 이제는 길을 닦고 철 펜스를 쳐 그나마 몇 조각 보이던 기와 조각도 찾을 수 없다.
매월당이 행궁지를 지나 만난 것은, 절로 오르는 산문 앞의 폭포였다. 요즈음은 원효폭포라 부르는 이 작은 폭포는 그때는 이름이 없었던 모양이다.
문 앞 폭포 날리고
한 줄기 시원한 샘 먼 峰(봉)에서 떨어지고
문을 마주하니 늘 옥수 영롱하게 뿜는구나
임금님 가마는 돌아오지 않고 구름은 적막하네
물소리는 恨(한)을 끌어 종소리에 흩는구나
門前飛瀑
一道寒泉落遠峯. 對門常噴玉玲瓏. 龍駕不回雲寂寞. 水聲牽恨和疏鐘.
매월당은 가슴아팠던 모양이다. 폭포 소리를 들으면서도 이태조의 한(恨)을 생각한다.
지금 소요산 자재암(소요사)은 선덕여왕 14년(645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사력(寺歷)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폭포도 원효폭포, 굴도 원효굴, 대(臺)도 원효대, 샘도 원효샘이다. 더욱이 재미있는 것은 요석공주(瑤石公主)가 여기까지 와서 원효와 지냈다고 스토리텔링하여 만든 요석공주의 별궁터다. 좀 불편하기는 하지만 관광 활성화에 애쓰는 안간힘이기도 하다. 폭포 옆 바위에는 돈의대(敦義臺)라 이름 붙이고 아홉 사람이 자신들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아마 이 지역 선비 9인이 모여 의(義)를 다진 모양이다. 폭포 옆 자연 굴은 원효굴인데 대사께서 수행했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폭포와 굴을 돌아 골짜기로 들어가는 입구는 108 계단을 만들어 번뇌를 내려 놓으라 한다. 매월당이 이곳을 지날 때는 자연 바위를 돌아 골짜기로 들어갔을 것이다. 이제는 편안한 길이 닦여져 있지만, 매월당은 계곡가 오솔길을 걸어 소요사로 갔을 것이다. 바위 틈 사이를 지나면 소요사(자재암)가 보인다. 한때 영원사(靈源寺)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다.
소요사
길은 서늘한 계곡 골짜기로 들어가고
천봉은 지는 해에 밝구나
온 산은 모두 삐죽이 가파르고
한 줄기 골짜기 물 정말 차고 시원하네
대웅전엔 금은 불상 계시고
스님들 운수의 정 정에 겨워라
상왕께서 일찍이 수레 멈추셨으나
길은 끊기고 인적은 드물구나
逍遙寺
路入寒溪洞. 千峯落照明. 四山皆崒嵂. 一澗正淸泠. 殿有金銀像. 僧多雲水情. 上王曾駐輦. 徑廢少人行.
매월당은 인적 드물다(少人行)고 했지만, 오늘의 소요산에는 가을 단풍을 맞으러 온 사람들이 참 많다(多人行). 부처님은 국화 꽃 가득한 속에 앉으시어 그때와 변함없이 중생을 살피고 계신다. 앞 바위의 샘은 차가운 샘물을 올리고 있다. ‘원효샘’인데 안내판은 원효 스님을 ‘차(茶)의 달인’으로 소개하고, 고려 때 이규보가 여기에 와서 ‘젖처럼 맛있는 차가운 물’이라 했다 전한다. 자랑하는 것이야 좋지마는 신라 35대 경덕왕 때 충담사가 생의사 석미륵에게 차 공양 드린 것이 최초의 차 기록이니 원효가 차의 달인이 되기에는 너무 이른 듯하다. 또한 이규보의 ‘젖처럼 맛있는 물’은 부안 변산 원효방을 찬하는 ‘제능가산 원효방병서(題楞伽山 元曉房幷序)’의 기록이니 재검토하면 좋겠다.
이제 소요산을 올라야겠다. 매월당이 대전(大田)을 지나면서 소요산 정상에 한 번 오르겠다(何當一上逍遙頂) 했으니 그는 소요산 정상에 올랐을 것이다. 만만치 않은 산길을 어느 코스로 올랐을까? 아마도 절이 있는 길로 오르지 않았을까?
동국여지승람은 소요산에 중대암(中臺菴), 백운암(白雲庵), 소요사(逍遙寺), 소운암(小雲菴) 있다고 기록하였다. 미수 허목도 소요산에 올랐는데, 그는 중백운 아래 큰 절터, 소요사, 현암, 사자암을 기록했다. 그가 오른 코스는 소요사(자재암)를 출발하여 깊은 골짜기로 들어간다. 그 골짜기 끝 무렵 갈림길에 현암(懸庵)이 있었다. 그런 다음 능선에 올라 상백운, 의상대를 거쳐 내려왔다. 아마 매월당도 이 코스를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도 이 코스를 택한다. 이제는 소요사(자재암)를 제외하고 3개의 절은 모두 터만 남았다. 너덜 길과 바위 계곡 길을 통해 오르니 현암(懸庵) 터에는 기왓장만 남아 마음을 싸하게 한다. 무엇을 찾겠다고 하늘도 제대로 안 보이는 이 골짜기에 그 옛날 절을 지었을까? 숨이 턱에 차 오르는 상백운(上白雲), 이성계가 그 기상을 읊었다는 싯귀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칡넝쿨 부여잡고 푸른 봉에 오르니(引手攀蘿上碧峰), 흰구름에 암자 하나 높이 누웠네(一菴高臥白雲中). 시계에 보이는 것 내 것이라면(若將眼界爲吾土), 강남 땅 초, 월인들 마다하랴?(楚越江南豈不容).
이렇게 호방한 기상의 이태조가 늙으막에 이곳 소요산에서 눈물로 지냈다니 아이러니하다.
이제 나한대 지나고 최고봉 의상대에서 원점회귀한다. 소요산 단풍은 장관이다. 눈과 마음의 시원함이 다리의 고단함을 씻고도 남는다. 매월당도 꽃보다 더 붉은 소요단풍(逍遙丹楓)을 보며 나그네 시름을 날렸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