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0년 세조 6년 매월당의 나이도 26세가 되었다. 마음을 못 잡고 지낸 지도 어언 6년, 매월당은 날이 풀리자 다시 길을 떠난다. 이번에는 동해 바다를 향해 가는 길이다. 평해로(平海路: 일명 관동대로)인데 동대문을 나서 중랑포 건너고 망우리를 넘어 팔당 ~ 양평 ~ 원주 지나 대화, 진부 지나고 이어서 대관령을 넘어가는 길이다.
그런데 매월당의 출발 지점은 전례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 그의 문집 유관동록(遊關東錄)에 따르면 왕심역(枉心驛: 왕십리) ~ 도미협(渡迷峽: 팔당대교) ~ 용진(龍津: 양수리 위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가 왜 전통적인 코스인 동대문 ~ 망우리 ~ 팔당 코스를 택하지 않고, 왕십리 ~ 팔당 코스를 택했는지 이유는 알 수가 없다. 한양 문안에서 왕십리로 가려면 동대문을 나서 일부러 청계천에 놓여 있었던 영도교를 건너 돌아가는 코스이거나, 아니면 광희문을 나서 왕십리로 직접 가는 길이 있으니 이 길을 택했을 것이다.
지금의 왕십리는 여러 전철 노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으나 매월당의 시절에는 한가한 교외 촌락에 불과했다. 다행히 이곳이 송파나루 건너 경기도 광주로 이어지는 길목이라서 작은 역원(驛院)과 민간의 주막이 있었다. 매월당도 출발 길에 이 역관에 들러 간 것 같다.
왕심역
동쪽 근교 빈 역관에
봄바람은 버들가지 흔들고 있네
이내 자욱하여 뽕밭은 희미하고
길 저 멀리 물과 구름 뒤섞였는데
풀빛 촌마을 다리에 저녁은 오고
초가 들 주막에는 닭소리 꼬끼오
오늘 오봉으로 떠나면
소나무 우거진 절에 학(鶴)과 함께 깃들겠지
枉心驛
空館近東郊. 春風拂柳梢. 煙迷桑柘暗. 路遠水雲交. 草色村橋晚. 鷄聲野店茅. 五峯今日去. 松寺鶴同巢.
길 떠나는 나그네의 마음이 촌마을 봄 풍정과 어울려 아련하다.
왕십리라는 지명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설화에서부터일 것이다. 이태조에게 천도할 새로운 땅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무학은 전국을 다니며 천도할 땅을 찾아다녔는데 하루는 지금의 왕십리 지역을 지나게 되었다.
소를 끌며 밭을 갈고 있는 노인이 무심히 하는 말: “이놈의 소 미련하기가 마치 무학 같구나.” 퍼득 정신이 든 무학: “노인장 제가 무학입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노인 왈 “여기서 십리(十里)를 가 보시오(往). 거기 가면 목멱산이 있는데 거기 올라 보시오.” 이렇게 해서 한양을 찾았기에 왕십리(往十里)가 되었다는 설화. 이 노인은 도선국사였다고 한다.
또 한 설화는 무학이 지금의 왕십리 지역을 새 터전으로 생각하고 땅을 파보았더니 글자가 새겨진 돌이 나왔는데 거기에 쓰여 있기를 ‘왕심(枉尋: 잘못 찾았다)’이라 해서 왕심리(枉尋里)가 되었다는 설화. 그 이외에도 왕십리의 표기는 매월당의 표기처럼 왕심리(枉心里), 또 왕심리(往心里), 왕심리(旺心里) 등 다양하다.
이런 왕십리는 어떤 땅이었을까? 조선 시대의 성내과 성저십리 교외에는 생업으로 하는 특산물들이 있었다. 당시 ‘목덜미가 까맣게 탄 사람은 왕십리 미나리 장수’, ‘이마가 까맣게 탄 사람은 마포 새우젓 장수’라는 말이 있었다. 새벽부터 한양 저잣거리로 들어오려면 동쪽 왕십리에서 출발하는 미나리 장수는 뒷목덜미가 까맣게 타고, 반대로 서쪽 마포에서 출발하는 새우젓 장수는 이마가 까맣게 탄다는 우스갯소리였다.
필자에게 왕십리역은 입영열차(入營列車)가 떠나는 역이다. 1970년대 서울에서 논산훈련소로 가는 입영열차는 왕십리역에서 떠났다. 한양대 교정(교련 과목이 있었을 때니까 연병장이 더 어울리겠다)에서 입영 절차를 밟고 왕십리역에서 연무대 수용 연대로 떠났다. 창밖에서 손을 흔들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던 그때 그 사람들이 생각난다. 한밤에 도착해 깜깜하기만 한 연무대 길은 지금 돌아보아도 멀고먼 길이었다. 후대에 김광석은 이렇게 노래했다. ‘집 떠나 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던 날…’. 또 김흥국은 ‘왕십리 밤거리에 구슬프게 비가 내리면…’.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군대에 가던 날도 비가 내렸었지….
600년 전 일어난 쿠데타
매월당은 소나무 우거진 절에 학(鶴)과 함께 깃들 것(松寺鶴同巢)을 꿈꾸며 왕십리를 떠났다. 오늘도 순간순간 기차는 도착하고 또 떠난다.
왕십리(往十里). 이름부터 떠날 것을 전제로 한 지명이다. 필자도 매월당과 함께 관동으로 떠나 볼까? 왕십리를 출발하여 동으로 길을 잡으면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중랑천이다. 개울 폭은 넓고 수량도 많으니 바지를 걷어 올리고 건너기에는 만만치 않다. 동대문에서 출발하여 망우리를 넘는 관동대로 길에는 중랑천(中浪川)을 배로 건너 주는 중랑포가 있었다. 왕십리에서 중랑천을 건너는 길은 일찍이 세종 때 시작하여 성종 때 완공한 살곶이 다리(箭串橋)가 있었다. 아마 매월당도 이 다리를 건넜을 것인데 아직 완공되지 못했으니 반은 돌로 되고 반은 가교(架橋)로 연결된 다리를 건너 동교(東郊)로 넘어갔을 것이다. 우리 시대에 국가의 보물로 지정된 이 다리에는 다리 이름에 대한 내력이 야사로 남아 있다.
‘왕자의 난’으로 알려진 방원의 쿠데타 탓에 어린 두 아들 방번, 방석을 잃고 실각한 태조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소요산으로, 회암사로, 안변 석왕사로, 함흥으로 옮겨 다녔다.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지 못한 태종 방원은 어버지의 절친 박순을 특사로, 이른바 함흥차사(咸興差使)로 파견하여 아버지를 모셔 오게 했다 한다. 태조의 영접 연회는 태조와 태종이 즐겨 사냥을 다니고, 함흥에서 한양으로 오는 길목인 동교(東郊)에서 열렸다. 이때 하륜은 태종에게 미리 귀띔하기를 ‘큰 기둥을 세우고 차양을 치되 예를 올릴 때는 기둥 뒤편에서 하십시오’. 태종은 그 충고를 따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방원이 예를 올리는 사이 태조는 화살을 날렸다 한다. 명사수 태조의 화살이 어디 빗나가겠는가? 방원이 몸을 피한 바로 그 기둥을 꿰뚫었다. 태조는 ‘이것도 하늘의 뜻이구나’ 하고 마음을 돌려 방원의 왕위 계승을 인정했다 한다. 이렇게 하여 이 뜰은 살곶이(箭串) 들이 되고, 이곳에 놓인 다리는 살곶이 다리(箭串橋)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도 살곶이 다리는 중랑천 위에 건재하는데 매월당이 읊은 촌 마을과 뽕 밭 대신 아파트와 산책로가 중랑천 변을 차지하고 있다. 저 멀리 물과 구름이 뒤섞였다는 물길은 여전히 개울 가득 흐르고 철새는 물질을 계속한다. 중랑천은 그때나 지금이나 철새들의 보금자리로 자리 잡고 있어 우리 시대 서울 사람들은 손쉽게 탐조(探鳥) 나들이에 나설 수 있다. 매월당은 우리 시대 이름 뚝섬, 화양동 지역을 지나서 광나루(廣津)에 닿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관동대로로 이어지는 길은 물길로 가면 광나루 ~ 미음나루(渼陰津, 독음나루: 禿音津, 禿浦)로 이어진다. 미음나루는 지금의 구리 수석동 왕숙천 옆으로, 일찍이 고려의 목은 이색도 이 뱃길을 이용하여 남경(한양)으로 온 일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세미선(稅米船)이 다니는 길이었고 정선 아우라지 뗏목이 다니는 길이 되기도 하였다.
또 하나의 길은 육로로 가는 길이었다. 광나루에서 우리 시대에 세워진 워커힐 앞 강가 길로 나서면 박완서 선생이 사시던 아차산 아래 구리시 아천동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왕숙천을 건너면 덕소 삼패에 자리 잡고 있던 평구역(平丘驛)에 닿는다. 고려 시대에도 존속한 역이었다. 매월당이 뱃길로 갔는지 육로로 갔는지는 아쉽게도 기록이 남지 않았다.
평구역은 한양 도성을 떠나 말 타고 하루 여정에 만나는 역원(驛院)으로는 가장 큰 역이었다. 관동대로 길을 떠난 이들이 남긴 글은 대부분 평구역을 노정(路程)에 기록했다. 후대에 송강은 관동별곡에서 ‘평구역 말을 갈아 흑수로 돌아드니 섬강은 어듸메요 치악이 여긔로다’라고 운율울 맞추었다. 매월당도 응당 들러 갔을 곳인데 아쉽게도 매월당의 기록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매월당은 강을 끼고 관동대로 길을 따라 나아갔다. 이 길은 6번 국도인 경강국도(京江國道)가 되었고 길 옆으로는 철로가 놓여 중앙선이 되었다. 이윽고 지금의 팔당대교가 놓인 도미협(渡迷峽)에 도착한다.
도미협에서
도미협의 물빛은 이끼보다 푸른데
관동 가는 길은 얼마나 멀꼬?
지팡이 가로 메고 남들 돌아보지 않으며
맑은 강물 그림자 속 空하게 배회하네
강물과 강꽃 눈 아래 흩어져 있고
짝지은 흰 갈매기 함께 술 잔에 뜨네
우리 같은 이들은 본시 욕심 없는 떠돌이
만 리를 집 삼으니 마음은 넓고도 넓은데
청려장에 기대어 산길을 간다네
고성방가에 크게 웃고 공허히 기다려도 보지만
생전에 벼슬은 바라지 않고
사후에 명성이 빛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네
곧바로 바닥은 닳아 짚신은 너덜대지만
두고두고 바라나니 광려산 언덕에 이름 걸리기를
봄 구름 솜처럼 봄 바람에 일어나는데
양 옷소매 펄럭이며 강물을 건넌다네
때마침 한 쌍의 흰 새 나는데
맑은 물가에서 서로 짖으며 나를 기다리는군
渡迷峽
渡迷之水靑於苔. 關東道路何遼哉. 橫擔楖𣗖*不顧人. 淸江影裏空徘徊. 江水江花眼底迷. 兩兩白鷗同浮杯. 我曹自是淡宕人. 爲家萬里心恢恢. 杖藜扶我峽中走. 放歌大笑空翹首**. 不願簪笏***絆身前. 不願芳聲耀身後. 直將消底破芒鞵. 長願掛名匡廬****阜. 春雲如絮春風起. 飄飄兩袂渡江水. 時見一雙白鳥飛. 相鳴遲我淸江沚.
*즐률(楖慄): 지팡이용 나무
**교수(翹首): 머리를 드는 일. 기다리는 일
***잠홀(簪笏): 옛 관리의 머리 비녀와 손에 드는 홀, 즉 벼슬길
****광려(匡廬): 중국 여산. 이곳 초가에 살던 광속(匡俗)이 신선이 되었다 함. 이백(李白)도 여산에서 시를 읊었음
도미협은 팔당 상류로 검단산과 예봉산이 마주한 좁은 골짜기다. 그 위로는 현재 팔당 댐이 세워져 있다. 팔당대교가 놓인 자리는 예전 나루터였다. 도미나루(도미진, 두미진)인데 한자로는 渡迷津, 度迷津, 斗尾津, 斗渼津 등 여러 글자가 쓰였다. 아마도 백제 시대부터 나루가 있었을 것이다. 고려의 목은 이색도 이곳에 와서 읊은 시가 전해진다. 후세에는 이 나루 남쪽 검단산 산줄기가 강으로 발을 뻗는 위치에 세곡창이 세워졌다. 넓은 광주평야 세곡미(稅穀米)를 모아 한강 하류 광흥창으로 옮기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도미나루는 이때 이름이 창모루나루(倉隅津: 창고 모퉁이 나루)로 바뀌었다. 요즈음도 이 땅 이름은 창우리(倉隅里)다. 땅 이름은 살아 있는 것이라서 그 시대 그 쓰임에 따라 바뀐다.
필자의 시대에 와서는 팔당댐 아래 빠른 물살에 잉어를 비롯한 물고기들이 힘차게 준동하니 견지낚시 하는 이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기도 했다. 다산 선생의 시절에도 이곳에서의 고기잡이는 유명했던 것 같다. 바로 이 도미협 상류 마재에서 살던 다산의 도미협과 검단산, 그리고 주변 자연에 관한 글들이 많이 전해진다.
두미협 고기잡이 구경
몸 굽혀 유리 얼음에 깊은 구멍 뚫고
천길 깊이 쇠 낚시 매어 걸쳐 놓았네
날은 차서 검은 벙거지에 눈이 덮였는데
햇빛에 불그스름한 비늘 금빛으로 빛나네
斗尾峽觀魚
俯鑿玻瓈萬孔, 橫施鐵鎖千尋. 天寒綠帽盈雪,日射紅鱗耀金.
한겨울 꽁꽁 언 도미나루에서 얼음 낚시 하던 조선의 꾼 모습이 선연하다. 다산 선생은 그 모습을 자세히도 보셨구나. 불그스름한 색깔에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났다면 실한 잉어였으리라. 아드님 정학연도 어느 해인가 어울려 두미협에 그물을 던졌는데 고기를 잡지 못했다고 시를 남겼으니 두미협은 고기 잡는 이들의 성지였던 것 같다.
아쉽게도 매월당은 청려장(杖藜)에 기대어 강가를 거닐며 물새와 벗하였다. 속세의 꿈은 내려놓고 그저 광려산 신선의 한 자리에 앉기를 바랐다. 생전에 벼슬도 바라지 않고 사후에 명성도 바라지 않고…. 속물이 가득 밴 필자에게는 매월당에게 다가오는 봄이 봄 같지 않구나.
지금도 가슴 아픈 도미 부인 이야기
한편 이곳 도미나루에는 슬픈 사연이 전해진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백제 4대 개루왕 때 도미 부인 이야기가 실려 있다.
[도미(都彌)는 백제인이다. 비록 평범한 백성이었지만 자못 의리를 알았다.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고왔을 뿐만 아니라 절조있는 행실을 하여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개루왕(蓋婁王)이 이를 듣고 도미를 불러 말했다.
“대체로 부인의 덕은 정결을 으뜸으로 치지만, 만약 으슥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달콤한 말로 유혹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여자는 드물 것이다.”
도미가 대답하였다.
“사람의 정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제 처와 같은 여자는 비록 죽더라도 변함이 없을 사람입니다.”
왕이 이를 시험해 보고자 하여 일을 핑계로 도미를 붙잡아두고, 가까운 신하 한 사람을 왕으로 가장하여 의복과 말과 시종을 갖추어 밤에 도미의 집으로 가게 하고, 미리 사람을 보내 왕이 온다고 알리게 하였다. 왕으로 가장한 이가 도미의 부인에게 말했다.
“내가 오래전부터 너의 아름다움을 듣고 도미와 내기를 하여 이겼다. 내일 너를 들여 궁인으로 삼을 것이니 지금부터 너의 몸은 내 것이다.”
그가 드디어 음란한 짓을 하려 하자 부인이 말했다.
“국왕께서 헛된 말을 하실 리 없으니 제가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시옵소서! 저는 옷을 갈아입고 나서 모시겠나이다.” 물러 나와 여종 하나를 단장시켜 들여보냈다. 왕이 나중에 속은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도미에게 죄를 씌워서 그의 두 눈을 뽑고 사람을 시켜 끌어내어 조그마한 배에 싣고 강 위에 띄워 보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부인을 끌어들여 강제로 간음하려 하니 부인이 말했다.
“이제 남편을 잃어 혼자 몸으로는 스스로를 부지할 수 없게 되었사온데, 하물며 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제가 월경으로 온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을 기다려 깨끗이 목욕한 뒤에 오고자 하옵나이다.”
왕이 믿고 이를 허락하였다. 부인은 곧바로 도망하여 강 어귀에 이르렀으나 건널 수가 없었다.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는데 홀연히 배 한 척이 물결을 따라 다가왔다. 그 배를 타고 천성도(泉城島)에 이르러 남편을 만났는데, 아직 죽지 않고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 밑에 이르렀다. 고구려인들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옷과 음식을 주었다. 끝내는 구차하게 살며 나그네로 떠돌다가 일생을 마쳤다.]
가슴 아픈 이야기의 현장이다. 도미나루가 도미 부인의 이름에서 유래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 시대에 국경선으로 볼 때 개연성이 커서 이 나루를 도미 부인이 떠난 나루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도미나루 언덕에 이때의 이야기를 써 놓은 설명판이 있다. 근 2000년 전 일에 아직도 마음 아프다. 다 털자.
힘차게 차량들이 다리를 건너다니는 2025년 팔당대교 아래로는 도미 부인도, 매월당도, 다산도 다 품고 한강이 흐른다. 좋은 한 해를 꿈꾸는 날에.
<이한성 옛길 답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