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호⁄ 2025.04.11 09:25:52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정병국, 이하 아르코) 아르코미술관(관장 임근혜)은 아르코 산하 신진 예술인 지원 공간인 인사미술공간(이하 인미공)의 운영 종료(‘25.6)를 앞두고, 공간의 문화적 자산을 되돌아보는 전시 및 프로그램을 아르코미술관과 인미공에서 연이어 개최한다.
2000년도 개관 후 신진 예술인을 위한 공간으로 사랑 받아온 인미공은 대안공간과 공공기관의 가교 역할을 표방하며 신진작가의 발굴과 양성, 지식생산과 교류, 창작과 연구 지원을 통해 동시대 한국 미술의 중요한 이정표를 남겼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지역 개발과 임대료 상승 등의 이유로 공간 운영의 어려움에 직면해 온 인미공은 오는 6월을 끝으로 운영을 종료하게 되었다.
기자 간담회에서 임근혜 아르코 미술관 관장은 “과거의 시간을 보내는 ‘굿바이’보다는 임미공 이후 아르코 미술관의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헬로우’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좋겠다. 인미공은 공간의 기능은 종료되지만, 수많은 신진 미술인을 배출하고 성장시킨 창작실험과 담론 생성에 기여한 청년 정신을 아르코미술관이 지속적으로 이어갈 것”이라 밝혔다.
이번 전시는 ‘미니버스’(기획 권혁규), ‘ㄷ떨:안녕인사’(기획 김도희), ‘오르트 구름(기획 김신재)’ 등 3개의 옴니버스형 전시로 열린다.
망각의 매체로서 전시, 어떤 역사에 어떻게 다가설까
먼저 전시장 1층의 ‘미니버스’는 역사 기술의 방식과 태도를 다시 생각하며 사라진 공간과 전시가 현재의 시공간에 어떻게 남을 것인지 질문한다. 그리고 사라진, 혹은 사라질 시간과 과거, 또는 미래에 대한 집착 대신 미결정의 상태에 주목하고, 각기 다른 ‘현재’의 시간들을 전시장으로 소환한다. 참여 작가들(강석호, 권오상, 김솔이, 노은주, 문이삭, 박광수, 야광)은 인미공 전시에서 선보였던 작품과 작업 방식을 재구성하고 재맥락화하여 인미공의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중첩한다. 이로써 전시는 인미공이 표방했던 정체성을 단순화하거나 일련의 통일된 논리로 설명하지 않고 개별적인 ‘지금’을 제안한다.
‘미니버스’를 기획한 권혁규 씨는 사라짐을 다른 시간으로 운반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제목을 지었다. 공간의 사라짐과 전시의 사라짐을 다른 시공으로의 이동으로 생각한 것이다.
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면, 전시장 초입 강석호 작가의 ‘무제’는 작고 전까지 강석호 작가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큐브 시리즈’의 일부이다. 작가는 큐브를 상상의 시작점으로 보고 다양한 시공간을 그 안에 내재화했다.
옴니버스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미니버스는 권오상 작가의 초기 사진 작업부터 문신을 참조한 조각, 사진 조각을 브론즈로 재현한 최근 작업까지 아우른다. 그의 조각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어긋남을 시차와 갱신의 운동성 개념으로 탐색한다. 권오상 작가의 조각은 지속해서 어긋남을 물질화했다. 그 조각에서 지속해서 목격되는 어긋남을 일종의 시차와 갱신의 운동성 개념으로 탐색한다.
노은주 작가의 ‘작업실 연작’은 인미공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만났던 작가들의 작업실을 회화로 옮긴 작업이다. 작가의 회화는 시간과 장소/공간의 감각을 그만의 방식으로 가꿔왔다. 도시에서 쓰임을 다한 물질들, 원래 기능에서 이탈한 사물들은 드로잉, 모형 제작, 촬영 그리고 그리기를 통해 화면 안에서 구성되고 배열되며 새롭게 맺어진다. 이처럼 시간, 장소/공간의 관계-구성체로서의 회화는 이번 전시에서 인미공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된 동료 작가 박보마, 손현선, 윤지영과 자신의 작업실로 옮겨진다. 작가는 직접 촬영하거나 전달받은 작업실 장면을 이어 붙이고 가공하며, 또 상상하고 보정해나가는 그리기의 과정을 이어간다.
문이삭 작가의 ‘리컨스트럭트’는 작가의 작업에서 반복되는 ‘쌓기’를 보여준다. 여기서 ‘쌓기’는 단순한 행위를 넘어 재료의 물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이자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도이며, 이미지-조각의 정면성을 배반하는 전략이자 지극히 기능적 장치이다. 이를 통해 서로 다른 이유와 방법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쌓기의 관계성을 가늠하며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는, 나아가 그것을 문제적으로 확장하는 가설처럼 자리한다.
김태리와 전인으로 이루어진 시각예술가 듀오 콜렉티브 야광은 이번 전시에 ‘크세노스’를 전시한다. 이 작품은 ‘침입자’(2024)의 B사이드로 출연진들의 신체 일부에 부착한 보디캠 영상으로 같은 상황을 다른 시점에서 기록한다. 때로는 진짜 촬영 현장이 노출되기도 하고 내/외부 상황과 대화가 여과 없이 드러나기도 한다. 본래의 시간에서 탈주한 작업은 또 다른 시간의 층위를 가설하며, 불화의 정서를 확장해 나간다.
인미공이 남긴 흔적, 책과 함께 소품 전시
전시장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전시 ‘ㄷ떨:안녕인사’는 인미공이 남긴 흔적을 책과 함께 관련 소품 전시를 통해 다각도로 조망한다. 미술 저널 ‘ㄷ떨’의 첫 특별판을 중심으로 인미공과 인연을 맺은 작가(고재욱, 권세정, 김용관, 문이삭, 신제현, 신지선, 조습, 조영주, 조은지), 기획자(이생강, 임성연, 정희영, 최소연), 연구자(마실, 박혜연) 및 기자(조상인)의 글과 인터뷰를 통해 공간의 예술적 흐름을 살핀다.
‘ㄷ떨’은 인미공 주변 이웃들의 인터뷰를 비롯하여, 인미공에서 배우고 일했던 사람들의 인터뷰, 인미공에 대한 작가들의 미시적 경험, 그리고 해학을 담은 픽션으로 구성된다. 특히 이번 전시에 참여한 다른 기획자 권혁규, 김신재의 연구 노트를 통해 이번 전시를 형식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연결한다. 기획자 김도희 씨는 “전시는 임미공과 함께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골고루 담아 서로의 안부를 물어보며 우리의 기억을 한데 모으고 새로운 기억을 생성해 보는 과정”이라고 전했다.
신지선 작가는 오랜 시간 인사미술공간 건물 바로 맞은 편에 있었던 원서동 놀이터를 그렸다. 신지선 작가의 ‘원서동 놀이터’는 원서동 프로젝트 ‘담을 두른 동네’의 일환으로 제작된 드로잉 작품이다. 동료 작가인 조은지, 조영주 작가는 서로의 얼굴을 그려, 존중하지만, 경쟁하는 모습과 상대 작가에 대한 주관적 상상을 표현했다.
보이저 1호가 3만 년 걸려 지나갈 수 있다는 오르트 구름
마지막으로, 2층에 마련된 전시 ‘오르트 구름’은 인미공의 미디어 아카이브 기반 배급 프로그램의 중단된 역사와 아카이브가 남긴 공백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동시대 미디어를 환경과 인프라로 보고 이미지가 물리적 현실, 빛, 물질, 시간과 맺는 관계를 재조명한다.
참여 작가들(김규림, 이민지, 한우리, 홍진훤, 황효덕)은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자연과 기술,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이미지의 물질성과 시각적 인프라를 드러내고, 빛과 입자의 행위성에 주목한다. 그리고 아카이브 푸티지, 로우 테크놀로지, 아날로그 기법 등을 통해 과거의 유산을 소환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엿본다. 오르트 구름은 오랜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를 보존하고 있는 거대한 저장소이다. 빛의 화석들은 과거의 잔재나 노스텔지어가 아닌, 현재의 표식과 미래의 단서를 품고 있다.
먼저 황효덕 작가의 ‘머리가 헝클어져서’는 오르트 구름을 지나는 데 3만 년 이 걸린다는 1977년 발사된 보이저호를 모티프로 한 설치작품이다. 물질과 비물질, 공간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가는 이를 입체 형태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종종 기계적 구조를 활용한다. 작가는 보이저호의 통신 시스템을 로우 테크놀로지가 적용된 요소로 변형하고, 데이터가 전파 신호로 변조되고 다시 복원되는 일련의 추상적 흐름을 광물 오브제, 검은 돌이 든 수조를 촬영한 근실시간 영상, 파라볼라 안테나 형태의 구리 스피커, 그리고 그 주변을 유영하는 빛 등의 물질과 사물로 복원해 새롭게 해석한다.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는 김규림 작가의 ‘600분’은 특정 공간으로 인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우리에게 드러나는 속성을 감각하게 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2019년 시작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 렘브란트의 회화 ‘야경’의 복원 프로젝트에서 생성된 8400여 장의 사진을 결합해 만든 고고해상도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초고해상도 이미지와 16mm 필름을 함께 병치해 복원 과정에서 나타나는 시간성과 동적인 구조를 탐구한다. 복원은 원본의 시간성을 지우고,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작가는 그 과정이 이미지의 속성을 어떻게 변형하고 재구성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작품은 이질적인 매체와 디스플레이 장치를 어긋나게 중첩시키며, 매개된 이미지를 둘러싼 시간의 비선형성을 감각적으로 환기한다.
홍진훤 작가의 ‘언다큐먼티드 모나리자’는 모나리자로 불리며 빈곤의 상징이 된 한 이주 여성의 사진을 출발점으로 삼아 아직 사건이 되지 못한 이미지들을 다시 들여다본다. 영상 옆에 전시된 사진은 2009년 서울 용산 참사 당시 불타는 망루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담고 있다.
작가는 “그때는 망루가 사건이 되었다고 믿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불타는 망루가 우연히 수많은 카메라 앞에 있었고 그 카메라들이 생산해 낸 이미지들로 인해 용산은 사건이 되었다. 사진은 특정한 조건의 시공간을 우연히 지날 때 불현듯 힘과 방향을 지니며 우리 앞에 드러나는데, 이를 우리는 비로소 사건이라고 부른다”라고 설명했다.
서로 다른 세 개의 전시는 모두 인미공의 기억과 흔적에서 비롯한 문화적 자산을 현재와 미래로 연결하는 각기 다른 방식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유산을 단순히 되새김질하거나 그 성취에 경도되는 것이 아니라, 현시점에서 재조명하고 다시 맥락화하여 유산의 다양한 결을 미래 시점으로 연결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번 전시를 시작으로 향후 아르코미술관에서 인미공의 활동들이 다각적 방식으로 재차 소환되고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전시 기간 중 세 개의 전시별 기획자 및 작가와 함께 전시에 대해 심도 있게 살펴보는 릴레이 토크를 비롯해, 조상인 기자와 함께 ‘ㄷ떨’을 둘러싼 이야기를 나눠본다. 나아가 25년 동안 실험적이고 진취적인 신진 예술인을 양성해 온 인미공의 주요 역할과 기능이 향후 아르코미술관에서 어떤 지원 방식으로 설계될 수 있을지 현장의 예술인들과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을 마련한다.
또한, 아르코미술관 2층 라운지에는 인미공에서 생산된 자료를 디지털로 열람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한편, 종로구 원서동 소재 인미공에서는 4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종료 기획전 ‘그런 공간’을 개최한다. 인미공의 또 다른 주요 기능이었던 담론 생산은 아르코의 새로운 비평 프로그램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문화경제 안용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