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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나는 왕당파인가 공화파인가? … 기자들은 이것부터 결정하고 기사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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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최영태⁄ 2025.05.02 11:16:33

프랑스 혁명 당시의 공화파(왼쪽)와 왕당파를 그린 그림. 진보냐 보수냐는 공화파 안에서의 분류일 뿐인데, 한국에서는 진보-보수와는 아무 상관없는 왕당파를 보수로 분류하는 참칭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전우용 교수의 진단이다. 

전우용 교수의 책 ‘K민주주의 내란의 끝’을 읽었다. 필자는 평소 방송에 나오는 전 교수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진 못했다. 너무 엘리트 티를 내는, 즉 너무나 아는 것이 많은 사람 특유의 버릇, 즉 자신도 모르게 뿜어져 나오는, 잘 모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가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전 교수에 대해 ‘서울대 출신 특유의 엘리트주의자 지식인’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이 탄핵되기 전인 지난 1월 25일 발간된 ‘K민주주의 내란의 끝’은, 아주 작고 간결한 책이지만, 12.3 계엄 이후의 한국 역사의 흐름을 왕당파와 공화파의 투쟁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확 눈길을 끌었다.

 

기자들은 왜 편향적일까 하는 의문


필자는 스스로 기자로서, 항상 ‘기자들은 왜 주로 있는자들 편을 드나?’라는 의문을 갖고 있었다.

기자들이 있는자 편을 드는 한국적 기이한 현상은, 특히 부동산 뉴스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부동산 기자들은 대개 강남 집값의 오르내림을 집중적으로 보도해왔다. 그것만이 부동산 뉴스의 거의 모두인 것처럼.

그래서 누군가가 이들 부동산 기자들의 주거지를 파악해보니 ‘열 중의 아홉은 강북에 살더라’는 얘기를 해 웃은 적이 있다.

특정인의 성향을 진보냐 보수냐로 쉽게 진단하는 한국의 풍습을 보여주는 SBS TV의 화면 캡처. 그러나 "왕당파는 제외하고 진보-보수를 나눠야 한다"는 전우용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낄 자리가 없는 왕당파가 보수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해볼 수 있다. 

강북에 사는 부동산 기자가 강남 집값을 주요 기사 소재로 삼으면, 강남 집값은 더 오르기 쉽다. 강북에 집을 가진 부동산 기자에겐 손해다. 스스로에게 손해가 되는 기사만을 집중적으로 써대니 ‘계급 배반적’이 아닐 수 없다.

 

계엄 겪고도 과거로 쉽게 회귀하는 기자들


또 한 가지. 지난 12월 3일 계엄의 밤에 용산 대통령실과 국방부 기자실 등에 기자들의 출입이 일부 통제됐었다. 그러자 보수지든 진보지든을 막론하고 기자들은 대개 분노했다. 계엄을 빙자해 기자실 출입을 막는 관(官)의 조치는 기자들의 밥줄을 끊는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험까지 하고 난 뒤, 기자들의 친(親)출입처(자신의 출입 관공서에 유리한 기사만을 쓰는 태도)적인 태도가 줄어들 걸로 기대했건만, 웬걸, 대통령 탄핵이 늦어지면서 기자들은 다시 옛날 투, 즉 있는자와 출입처 편만 일방적으로 드는 기사들을 써대기 시작했다.

묘하다. 하찮은 돈-권력을 겨우 거머쥔 기자들이 왜 틈만 나면 거대 권력과 거부들을 위한 기사를 주로 써댈까?

전우용 교수의 진단에 따르면 그런 기자들은 ‘왕당파 기자’라서 그런 것 같다. 일반 백성들이 지배하는 민주주의보다는 한 사람의 독재자가 또는 소수의 귀족이 지배하는 독재정-귀족정이 자신에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기자들은 ‘왕당파 기자’가 되는 모양이다.

기자라는 직업을 ‘힘세거나 인기있는 사람에 대해 알리는 일’이라고 정의한다면, 소수의 독재자 또는 귀족들에게 돈과 권력이 몰려 있는 편이 유리하다. 그 소수로부터 배척받지만 않는다면 수입이 보장되고, 끄트머리 권력이나마 휘두를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 사회에선 기자들 먹을 거리가 없다?


반면 모든 권력이 전 국민에게 골고루 분배된다는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이런 기자들이 먹을 게 거의 없어진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말을 먼저 듣는 태도가 민주주의’라는 전 교수의 정의에 따르자면, 이런 민(民)의 말을 듣고 취재해봐야 달콤한 밥과 술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전우용-최지은 저 ‘K민주주의 내란의 끝’.

전 교수는 이 책에서 “귀족제의 현대적 변형이 엘리트주의예요. (중략) 이번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도 20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왕당파 대 공화파의 대립이 극단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올해가 광복 80주년인데, 이 80년간 공화파가 집권한 기간은 15년, 김영삼 정권기를 합쳐도 20년밖에 안 돼요. 게다가 국민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정보의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왕당파의 기반은 계속 침식되는 형편이고요. 이런 상황에 초조감을 느낀 왕당파의 일부 극렬 세력이 공화파를 일거에 제거하고 ‘유사 왕정 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내란을 시도한 것 아닐까요?”(109~116쪽)라고 진단했다.

대한민국은 왕이 없는 국가를 지향하지만 실제로 한국의 이른바 엘리트들에선 왕당파적인 태도가 쉽게 관찰된다. 힘있고 돈있는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경심의 태도들이다. 특히 이런 태도는 명문대 출신에게서 쉽게 관찰된다. “나는 명문대 출신이니 귀족이지”라는 자신감이다.

 

'명문대 나온 귀족들' 양산하는 한국 교육 시스템


스스로를 ‘명문대 나온 귀족’이라 생각하니 일반 국민과 같은 레벨에 서는 게 싫다. 최소한 고위 관리 또는 재벌 기업의 오너-임원 정도는 돼야 상대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태도다.

전 교수는 이런 말도 한다. “현대의 국제 기준에서 보수, 진보는 기본적으로 공화파 내에서 대립하는 이념이에요”(107쪽)라고.

충성의 대상이 왕인지 아니면 공화국인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유튜브 조갑제TV의 화면 캡처.

한국에서 흔히 진보니 보수니 하고 편을 가르지만, 국제적 기준으로는 ‘왕당파는 제외하고’, 즉 독재나 귀족정을 지지하는 왕당파는 별개로 하고, 공화파(왕이 없는 체제를 지향하는) 중에서 진보냐 보수냐를 갈라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괴이하게도 왕당파 = 보수, 공화파 = 진보라고 분류해 왔다는 지적이다. 이런 괴이한 분류를 상식으로 만든 주역은? 물론 언론이다.

 

그간 '대한민국은 완성된 민주주의 국가'라는 인식들을 대다수 한국인이 갖고 있었지만, 실제 과연 그랬나? 전 교수는 "대다수 사람은 왕조시대 백성처럼 ‘좋은 지도자’, 다른 말로 하면 ‘좋은 임금’이 나오기를 바라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죠"(84쪽)라고 썼다. 

'착한 대통령'이 필요하다는 문재인 지지자의 발언을 소개하는 SBS TV의 화면. 

서구적 기준으로는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착한 대통령'(유능한 대통령이 아니라)을 뽑겠다고 언론과 국민이 나서고, 일단 대통령(=왕?)이 뽑히고 나면 "제발 선정을 베풀어 주십사"고 희구했던 태도는 흡사 왕정 시대 백성들의 자세 아니었던가? 

 

'국민을 전쟁 포로 취급한다'는 계엄령 사태를 겪어낸 한국 국민들은 이제 이런 '제발 왕이 착해주십사' 하고 바라기만 하는 태도를 벗어나고 있다. "좋은 정치인을 도구로서 뽑아서 쓴다"는 민주적-공화적 태도가 대두하는 모양새다. 

 

'사상 처음'을 뿜어대는 사법-관료-언론계


이런 민주적 전환이 정녕 두려운 것일까? 작년 12월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선 ‘난생 처음 보는’ 괴이한 현상들이 줄을 잇고 있다. 사상 처음으로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만 적용되는 사법-언론적 조치들이 줄을 잇고 있다. 반대편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이재명 민주당 후보에게만 적용되는 사법-언론적 현상들 역시 이어진다.

‘명문대 출신 왕당파’들이 포진한 사법-관료-언론계가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 ‘사상 처음’을 남발 중인 모양새다. 파면된 대통령을 다시 모시자는 '윤어게인'이란 움직임도 거리낌이 없다. 왕을 없애기로 한 대한‘민’국 안에서 암약하는 시대착오적인 왕당파들을 대청소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 느낌이다.

관련태그
왕당파  공화파  윤어게인  진보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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