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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림의 현대사진산책+] 디지털 판타스마고리아: 번쩍임, 그리고 밤

김천수·신정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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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천수림(사진비평)⁄ 2026.02.03 09:34:00

18세기 환등기 쇼인 판타스마고리아와 현대의 디지털 기술(VR, AR, 알고리즘 피드)은 ‘환상을 통해 실제를 가린다’는 본질에서 닮았다. 19세기 파리의 아케이드를 거닐던 ‘산책자(플라뇌르, flâneur)’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지금 우리에게 온다면 그는 어떤 말을 들려줄까. 가상과 현실이 뒤섞인 디지털 세계를 유영하는 현대작가들은 기술 이면에 내재된 숨겨진 사회적 오류와 균열을 포착하고 있다. 서울대미술관 ‘오류를 거니는 산책자’(1월 29일〜3월 29일)전에 참여 중인 김천수와 신정균은 특히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기술의 빛에 가려진 사회적 오류에 주목하고 있다.

*칼럼명 ‘번쩍임, 그리고 밤(Un éclair... puis la nuit!)’은 샤를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에 수록된 소네트, ‘지나가는 여인에게(À une passante)’ 시 구절을 차용한 것이다.

‘오류를 거니는 산책자’

서울대미술관 '오류를 거니는 산책자'전 전경. 사진=서울대미술관

“번개불…그리고는 밤! — 귀여운 나그네여, 그대의 눈길로 나를 순식간에 다시 태어나게 하더니, 영원 속이 아니면 내가 그대를 다시 보지 못하단 말인가?”, “우리는 서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오, 내가 사랑했을 당신, 오, 그것을 알고 있었을 당신!”

이 시는 샤를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에 수록된 소네트인 ‘지나가는 여인에게(À une passante)’ 의 한 구절이다. 지나가는 여인에게는 19세기 당시 가장 현대적인 도시인 파리를 배경으로 스쳐 지나간 익명의 여인에 대한 동경과 고독을 그리고 있다.

‘신곡’의 저자가 단 한번 스친 베아트리체를 영원히 사랑한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지만,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이 시를 통해 ‘대도시 산책자’의 에로티시즘과 트라우마로 해석했다. 보들레르의 시에서 사랑은 ‘군중’이라는 매개체가 있어야만 가능하며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그 찰나의 마법도 없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이를 두고 ‘군중은 여인을 시인에게 데려다주는 동시에, 즉시 낚아채 간다’고 분석했다.

서울대미술관 오류를 거니는 산책자는 디지털 시대의 결함과 소외를 포착하는 작가 12명을 소개한다. 전시 제목 오류를 거니는 산책자는 발터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제시한 ‘산책자(플라뇌르, flâneur)’ 개념에서 가져온 것이다. 19세기 급변하는 도시를 거닐며 자본주의의 허상을 비판했던 산책자처럼, 오늘날의 예술가들도 디지털 세계를 유영하며 기술 이면에 숨겨진 사회적 오류와 균열을 포착한다.

환등기 쇼를 뜻하는 ‘판타스마고리아’는 어두운 방에서 조명과 렌즈를 이용해 유령이나 환영을 허공에 띄워 보여주는 장치로 18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다. 벤야민은 이 용어를 빌려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거대한 환상을 비판했다. 벤야민의 산책자가 아케이드의 진열창을 보며 자본주의의 환상을 읽어냈다면, 현대의 산책자는 디지털 공간을 배회한다.

메타버스(Metaverse)는 발터 벤야민이 19세기 파리에서 목격했던 ‘아케이드’가 21세기 디지털 공간으로 진화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벤야민의 시각으로 메타버스를 들여다보면, 이곳은 자본주의의 환상이 극대화된 새로운 아케이드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현대판 아케이드를 어떤 방식으로 관찰해야 할까. 심상용 관장은 “완벽을 향해 달려가는 디지털 시대에, 오류는 제거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미지로 안내하는 관문”이라며, “오류는 기술적 결함이나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허구와 환상으로 그린 장밋빛 미래를 의심하도록 하는 예기치 않은 틈”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오류는 실패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창이 될 수 있을까?

김천수, ‘로우-컷(Low-cut)’ 연작

김천수, '로우-컷 #08', 종이에 디지털잉크젯프린트, 채색, 144×183cm, 2018. 사진=서울대미술관

김천수는 사회 시스템 내부의 구조적 오류와 사건을 작가 고유의 시선으로 포착해왔다. 이번 전시작 ‘로우-컷(Low-cut)’ 연작에 등장하는 고층건물들은 도시 재개발 지역이다. 사진 속 건물은 제대로 된 건축물이 없다. 뜨거운 한 여름 모든 것이 흔들리며, 흐느적대고, 뒤틀리며 녹아내린다.

이 이미지는 ‘젤로 이펙트(Jello Effect)’로 인한 현상으로 카메라의 기계적 오류에 의해 발생된 것이다. 고해상도 카메라의 이미지 센서는 단위 면적당 스캔해야 할 정보량이 많아 이미지를 읽는 데 시간이 걸리고, 그 과정에서 카메라가 움직이면 화면이 젤리처럼 왜곡된다. 작가는 이 기술적 결함을 의도적으로 활용해 더 나은 삶을 약속했던 도시개발이 경제위기와 이해관계의 충돌로 좌절된 현실을 은유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김천수, '로우-컷 #27', 종이에 디지털잉크젯프린트, 채색, 144×183cm, 2018. 사진=서울대미술관

카메라의 오류로 생성된 로우-컷 연작은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복제기술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논의했던 기술적 무의식 개념과 맞닿아 있다. 작가의 작업에서 카메라의 오류는 작가의 의도적 구도나 미학적 계산을 배제하고, 카메라라는 기계가 스스로 자신의 ‘내부적 무의식(오류)’을 드러낸다. 음향 장비에서 저주파를 차단하는 필터를 의미하는 로우-컷은 전시 제목이자,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도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가 소음처럼 제거된 것은 아닌지 묻는 작가의 질문이기도 하다.

작가는 사진 표면에 공사 현장에서 직선을 표시하는 먹줄로 흰 선을 그었다. 이 선들은 실제 재개발 이전 골목의 지도, 과거 집의 평면도 등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선들을 현재의 고층 빌딩 이미지와 중첩시킴으로써 우리가 갈아엎은 풍경 너머의 진실을 소환해낸다. 로우-컷의 깨진 픽셀과 오류 데이터, 먹줄은 재개발 현장의 ‘매끄러운 청사진’ 뒤에 숨겨진 현실, 자본이 선전하는 완벽한 미래가 사실은 불안정한 데이터의 조합은 아닌지에 대해 질문한다.

신정균, ‘캐시 메모리(Cache Memory)’

신정균, '캐시 메모리', 단채널 비디오, 6분 40초, ed. 1/5, 2023. 사진=서울대미술관

신정균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적 시스템, 안보 국가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디지털 기억의 불완전성을 영상과 설치 작업을 통해 탐구해 왔다. 마술이나 초능력, 혹은 완벽하다고 믿는 디지털 아카이브(캐시 메모리)를 소재로 삼아, 시스템의 오작동이나 믿음이 무너지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다. 0과 1로 저장돼 언제든 완벽히 복구될 것이라 믿는 시대. 자본주의가 말하는 ‘끝없는 진보’를 추앙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면이다.

전쟁과 전염병, 경제 위기가 반복되는 시대에 작가는 ‘보존’이라는 문제에 주목해왔다. 완벽해 보이는 디지털 환경은 국가 정보 시스템 화재 같은 사건을 통해 얼마나 허술하고 불안한지 드러났다. 작가는 디지털 정보가 모두 복구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이 과연 타당한지 질문한다. 오류를 거니는 산책자 전시장에 풀어놓은 가상의 저장소는 물리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이 더 안전한 대안일 수 있다는 가설을 실현한 프로젝트다.

‘캐시 메모리’는 원래 빠른 처리를 위해 임시로 저장했다가 금방 지워지는 데이터를 일컫지만, 작가는 이곳을 보존에 대한 허상을 드러내는 장소로 봤다. 작가가 디지털 쓰레기, 임시 잔해에 주목하는 것은 벤야민이 아케이드의 버려진 물건에서 시대의 징후를 읽었듯, 작가가 디지털 세계의 사소하고 휘발적인 데이터 파편들을 모아 새로운 가상 저장소를 구축하는 행위와 연결된다.

신정균, '세레모니', 단채널 비디오, 5분 48초, ed. 1/5, 2023. 사진=서울대미술관

캐시 메모리는 디지털 정보가 영구적이고 복구 가능하다는 믿음이 하나의 ‘디지털 판타스마고리아(환상)’일수도 있다. 작가는 복구되지 못한 채 휘발되거나 왜곡된 가상 저장소의 이미지를 통해, 디지털 기억 역시 물리적 기억만큼이나 취약하고 파편적임을 드러낸다. 촬영장처럼 꾸며진 가상의 저장소는 인간 문명의 중요한 것들을 미래에 재현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가상 저장소는 ‘완벽한 백업’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데이터가 깨지고, 중첩되고, 유실된 상태 그대로를 보여줌으로써 디지털 역사의 불연속성을 시각화한다. 이는 승리자의 기록(완벽한 복구)에 대항해 패배하고 잊힌 데이터들의 자리를 마련하는 벤야민적 역사 쓰기 방식과 연결된다. 작가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불완전한 복구’는 주체자가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남긴다.

<작가소개>

김천수(b.1981)는 사진 매체를 기반으로 장소와 시간의 흔적을 탐구한다. 주로 폐쇄된 스키장, 재개발 현장 등에서 물리적인 흔적과 사진적 기법을 결합해 대상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작업을 진행한다.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스코틀랜드 글라스고 스쿨 오브 아트에서 수학했다. 2017년 일우사진상을 수상했다. ‘로우-컷’(BMW 포토스페이스, 부산, 한국, 2020), ‘알프스’(스페이스22, 서울, 2019), ‘로우-컷, 로우-패스’(일우스페이스, 2018) 등 개인전과 ‘MMCA 사진소장품전 :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24), ‘정착세계’(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022)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신정균(b.1986)은 일상적 풍경이 특정한 기호로 치환되는 순간을 포착해 그 안에 존재하는 불안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발견된 오브제로 이루어진 아카이브와 모큐멘터리 형식의 영상을 통해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서사를 만들어 낸다. 이는 사회에 만연한 보편적 관념을 재검토하고 그것이 형성된 경로를 역추적함으로써 개인이 집단과 맺게 되는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서울대 서양화·판화 전공 박사 수료, 서울대학교 서양화 전공 석사 서울대 미술 서양화과/영상매체예술 연합전공했다. ‘예언과 시나리오’(아마도예술공간, 서울, 2025), ‘라스트 오브 어스’(상업화랑 을지로, 서울, 2023), ‘리프트 & 드리프트’(송은 아트스페이스, 서울) 등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부산현대미술관, 송은문화재단, 아르고스 시청각예술센터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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