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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야~ 박씨 하나 물어다 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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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86호 편집팀⁄ 2008.09.30 15:23:13

초가 지붕 위에 둥근 달처럼 함박 웃고 있는 박을 본 지가 몇 해 전인가. 족히 삼십 년은 되고도 남는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초봄이면 제비 한 쌍이 어김없이 처마 밑에 둥지를 틀고 박씨 하나를 던져주었다. 할머니는 정성껏 호미질을 한 뒤꼍 텃밭에 박씨를 심고 이가 빠진 잇몸만 보이며 수줍은 소녀처럼 웃으셨다. 나는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믿고 자랐다. 콩쥐 팥쥐 이야기도 실제로 존재했었다. 옆집 정희와 재희는 자매인데, 정희는 콩쥐, 재희는 팥쥐라는 것을 모르는 동네 사람이 없었다. 정희의 친엄마는 병으로 일찍 죽고, 대신 재희 엄마가 새엄마로 들어왔으나, 모녀가 어찌나 표독스럽고 앙큼스러운지 정희의 아빠가 없는 틈만 노려 정희를 구박하니, 정희의 얼굴엔 이내 병색이 돌면서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했다. 착하고 영특하며 재희보다 훨씬 예쁘기까지 한 정희였지만, 새엄마와 재희의 온갖 구박과 누명엔 당할 재간이 없어 정희는 귀신이 많다는 동진강 나루에 빠져 죽고 말았다. 중학생이던 정희는 운동화를 곱게 빨아서 신고 나가, 강둑에 가지런히 한 켤레의 운동화만 남겼다. 재희 엄마는 그야말로 동네가 흔들릴 만큼 눈물 없는 곡을 해댔고, 정희가 몇 해 전 물에 빠져 죽은 아랫말 총각귀신에게 홀려서 죽게 되었다며 사흘 밤낮을 푸닥거리를 했다. 결국 정희의 머리칼을 어떻게 찾았는지, 무당은 온몸에 경기를 일으키며 정희의 흉내를 내면서 넋을 위로했다. “아버지 불쌍허요~.” “엄니 가고 지도 가니, 이제 누굴 의지허고 살으실꼬~.” 그러더니, 갑자기 무당의 시퍼런 눈빛이 재희 엄마의 얼굴을 노려보며 삿대질을 했다. “저 여자가 날 죽였어라오~!” “아버지 없는 사흘 밤낮을 밥 안 주고 나가라고 구박혔소~!” 망자의 넋을 찾아 위로한다는 푸닥거리 후, 재희 엄마는 동네에서 손가락질로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되었고, 정희네 집안에서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쫓겨났다. 그날이 일요일인데, 교회에 다녀오다 나는 신작로에서 재희와 그 엄마가 초라한 행색으로 보따리 몇 개를 허름하게 머리에 이고 들고 재희 엄마는 분에 못 이기는 표정으로 재희에게 뭐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아는 콩쥐 팥쥐 이야기는 실제로 이렇게 끝이 났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도 흥부와 놀부 이야기만큼은 끝을 맺지 않으니, 이유는 무엇일까? 할머니가 심은 박넝쿨은 처음엔 호박과 별다르지 않아 구분이 되지 않았으나, 떡잎이 벌어지면서 박과 호박의 구분이 확실해졌다. 호박잎은 진초록의 잎이 선명하고, 박잎은 바랜 듯한 초록잎에 잔털이 많았다. 나는 어서 빨리 박넝쿨이 자라서 지붕 위에 둥근 달 만한 박덩이가 주렁주렁 열리기만 기다렸다. 우리는 흥부 가족이니, 올해는 박 속에서 진기한 보물이 꼭 나오고야 말 것이다. 또한, 아랫말 심술쟁이 심 씨 아저씨네는 놀부인 만큼, 도깨비나 뱀들이 박 속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학교 길에 오가면서 보면, 놀부 심 씨네도 박넝쿨이 우리집 박넝쿨 못지 않게 탐스러워 힘있게 지붕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팔월이 다가오자 박은 열여섯 순님이의 볼처럼 탱글하고 뽀얗게 차오르더니, 며칠 사이 여물어 시집 못 간 노처녀 복순 언니의 반질거리는 얼굴빛을 닮아가고 있었다. 나는 어서 빨리 박을 타고 싶어, 아침마다 할아버지께 박이 너무 무거워서 마당으로 곧 떨어질 것 같다고 걱정을 끼쳐드렸다. 마침내 할아버지는 추석을 앞두고 가장 크고 잘 여문 박을 따 마루에서 손수 톱으로 타기 시작하셨다. “스르렁~스르렁~.”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중심이 틀어지지 않게 단단히 잡으라 하시면서 정성껏 톱질을 하셨다. “스르렁~ 스르렁~.” “쩌억~!” 할아버지의 호령에 맞춰서 박은 반듯한 반달 모습으로 입을 쩌억 벌렸다. 텅 빈 공간과 허연 속살에 잘 여문 박씨. “허허~, 고놈 참 잘 여물었고만~!” “내년엔 더 큰 놈이 열리겄다.” 아직 우리는 흥부처럼 가난하지도, 착하지도 못했나보다. 갈라진 박 속엔 진주도, 보석도, 쌀도...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아랫말 심 씨네도 박을 탔는데, 뱀도, 도깨비도 나오지 않았단다. 심 씨도 그다지 나쁜 놀부가 아니었나보다. 나는 박만 보면 떠오른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 제비가 박씨 하나 던져주길 기다리던 그해 춘삼월. 아~, 나는 아직도 포기할 수 없다. 제비가 물어다준 박씨를 심어 탐스럽게 잘 여문 박을 타서 꼭 보석을 꺼내고 싶다. 글·이수인 (작가·시낭송가) <유년의 기억>이란 주제로 격주연재 수필을 담을 이수인 시인은 서울예대에서 극작을 전공하고, MBC·KBS 드라마 과정을 수료하였다. <시문학>을 통해 등단한 뒤, CBS TV에서 시낭송을 진행했다. 저서로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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