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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박,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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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54호 편집팀⁄ 2010.01.25 17:08:54

글·윤영상 ysangyn@naver.com 28살의 청년이 성탄절이던 지난 12월 25일 오후 5시경, 두만강을 건너 북한 땅으로 들어갔다. 북한인권운동가이자 기독교 선교사로 알려져 있던 그 청년의 이름은 로버트 박(한국명:박동훈). 과연 무엇이 그로 하여금 얼어붙은 강을 건너 북한 땅으로 향하게 하였을까? 알려지기로, 그의 이번 행동은 돌발행동만은 아니었다. 국내외에서 수년 간 끊임없이 북한인권운동을 펼쳐왔고, 언제나 자신의 몸과 생명보다 북한의 인권을 소중히 생각하던 그였기에, 어쩌면 그의 행동은 전혀 예견치 못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28살의 청년이 바라보며 수년 동안 눈물을 흘리고 애태우도록 만들었던 사연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북한의 처참한 인권 실태였다. 미국에서 태어난 그가 북한 인권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중국에서 북한 인권 상황을 목격하면서부터, 특히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실태에 대한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북한에는 다양한 용도의 수용시설이 존재한다. 1990년대 후반 들어 더욱 심해진 기근으로 생긴 유랑·걸식인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 외에도, 대규모 정치범 수용소가 존재하고, 우리의 일반 감옥에 해당하는 노동교양소와 교화소, 임시 구치를 위한 집결소, 단기 ‘육체노동을 통한 계도’ 처벌을 내리는 노동단련대 등이 있다. 그리고 이 중 가장 인권 유린이 심각한 곳이 정치범 수용소이다. 정치범 수용소는 보통 ‘OO호 관리소’로 불리게 되는데, 이는 수감자들과 수용시설에 이름을 붙여주지 않음으로써 기본적인 인권마저 말살하기 위한 방편이다. 그리고 1959년에 탈북한 강철환 씨에 의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수용소는 요덕수용소(제15호 관리소)로서, 주로 정권에 대한 적대계층들이 수용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2008년에 막을 내린 뮤지컬 <요덕 스토리>를 보면, 성경을 나누어 읽었다든가 불난 집에서 김일성 초상화를 꺼내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감되어 평생을 수용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요덕수용소를 포함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실태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탈북자들에 의해 국내외에 여러 차례 소개된 적이 있으나, 북한 사회의 특성상 그 정보의 정확성을 따지기가 쉽지 않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자비한 고문과 만행이 기술되고 있기에 굳이 글로 자세히 옮겨 적고 싶지는 않다. 다만, 잔인하고 끔찍한 수용소 생활은 차치하더라도, 정치범 수용소 수감의 이유가 되는 적대행위라는 것 자체가 탈북, 종교 활동, 정치 의사 표현 등 개개인의 생존과 자유로운 사상을 위한 기본적인 행위마저 포함하고 있기에 그 문제의 심각성이 더한 것이다. 예컨대, 북한은 세계 최고의 종교탄압 국가로 알려져 있으며, 종교인들에 대한 대량학살 사례 역시 너무나 많이 보고되어 있다. 로버트 박은 이러한 북한 인권 유린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수년 간 인권운동에 매달려왔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대였을 것이다. 때로는 북한과 남한의 관계를 고려한 정치적인 이유로 묵살될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무관심 속에서 그는 북한에 직접 들어가겠다는 극단의 결심을 내리게 된 것이다. 물론 그는 두만강을 건너자마자 바로 국경수비대에 붙잡혀 감금되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다. 그는 국경을 넘으며 보란 듯이 찬송가를 부르면서,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강을 건넜다고 한다. 핍박과 고문, 아니 죽음을 각오한 그의 결의에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첫 번째 목적은 북한 땅에 히로시마 원자탄보다 강력한 ‘사랑의 원자탄’을 떨어뜨리는 것, 즉 그들에게 죽음을 넘어선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선포함으로써 북한 사회에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 사랑의 파급력이 북한 정권에까지 전이되기를 기대하며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넜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북한 정권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도 담겨 있었다. 두 번째 목적은 대한민국, 더 나아가 미국 사회에 북한 인권의 실태를 알리고, 전 국민적인 또는 범정부적이거나 범세계적인 개입과 관심을 유도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로버트 박이 북한으로 간 까닭은… 이러한 로버트 박의 행동의 동기는 ‘사랑’이었다. 종교를 떠나서 ‘사랑’을 지닌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내 동포·친지들의 아픔에 대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로버트 박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사랑’이 넘쳤을 뿐이다. 그를 만나본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세상 속의 헐벗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찾아다니며 누구보다 아파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고 한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멕시코에 머무르며 그곳의 노숙자들을 돕는 일에 그의 푸른 젊음을 바쳤고, 한국에 와서는 서울역에서 북한인권운동 집회를 열고 나면 역전의 노숙자들을 염려하여 점퍼와 가진 돈을 모두 내어주고 차비도 없이 집으로 걸어오곤 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의 몸은 언제나 늘 말라 있었는데, 그것은 북한 주민들의 굶주림을 생각하며 늘 금식했기 때문이었고, 그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북한 주민들에 대한 생각뿐이었으며, 다른 종교인들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북한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이제 그 ‘사랑’을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로버트 박이 자신의 생명을 바쳐 전하고자 했던 북한 인권의 실태는 먼 나라의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도 아니며, 바로 우리 이웃의 이야기,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다. 국내에 들어온 2만의 북한이탈주민들은 대부분 탈북 과정에서 수 차례 수용소 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심각한 인권 문제가 교육·복지·경제·문화예술·체육 등 전 분야에 걸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는 남북의 격차 확대로 이어지고, 통일과 화합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며, 대한민국으로서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된다. 사실 북한인권운동가들에게도 좌우의 구분은 있다. 어떤 이들은 북한의 인권과 권리의 회복을 위해서 냉철한 투쟁에 나설 것을 촉구하며, 어떤 이들은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회유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리고 너무나 순수하거나 순진한 분들이라 가끔은 정치에 이용되기도 한다. 모두 장단점이 있겠으나, 필자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정치 이념이나 개인의 사리를 위한 것이 아닌 ‘사랑’에 기반한 행위와 생각이라면 무엇이든지 환영이다. 그래서 로버트 박의 이번 행동도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어떤 행동을 취하건, 일단 우리는 북한 동포들의 실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이 기회에 강조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는, 우리가 남한에 거주하는 북한이탈주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관심을 기울일 때 북한이탈주민들의 뼈저린 경험과 아픔, 그리고 그들의 순수한 사랑과 열정 역시 정치이념에 휩쓸리지 않고 올바르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박이 남한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북한으로 들어간 대사였다면, 북한이탈주민들은 우리에게 북한의 상황과 현실을 알려주기 위해 대한민국에 파견된 소중한 대사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음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보자. 남한과 북한의 상처를 치료해줄 수 있는 것, 세상에서 가장 상처받고 소외된 이웃인 북한 주민들을 치유해줄 수 있는 것은 바로 로버트 박이 품고 있는 ‘사랑’뿐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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