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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선의 문화산책 ⑦]큐레이팅의 묘미 국립 중앙 박물관의 ‘초상화의 비밀’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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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45호 박현준⁄ 2011.10.24 14:16:21

역시 위대한 예술은 매번 새롭게 태어나기를 거듭한다. 영원불멸의 오페라작품은 작곡가의 시대, 연주자의 시대, 지휘자의 시대를 지나 연출자의 시대에 돌입했을 정도로 하나의 작품이 재창조를 거듭해 왔다. 미술도 다르지 않다. 요즘 미술관의 전시를 보면, 이제 미술은 원작자의 시대, 관객의 시대를 지나 큐레이터의 시대로 들어온 듯하다. 큐레이터는 전혀 다른 시대의 작품들을 나란히 옆에 걸어 우리로 하여금 수백 년의 세월을 초월해 교감하게 한다. 거기에 흐르는 작가의 애증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미술 작품도 큐레이터의 손에 의해 다시 한 번 창조되는 시대가 됐다. 그래서 요즘 ‘화가 OOO회고전’이니, ‘현대 미술전’, ‘근대 미술전’, ‘OOO미술관 XXX전’ 등의 제목을 단 전시들을 보면, 이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는 무척 게으른 사람입니다’라고 외치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미술 관객 들은 다 안다.

부지런하고 창조적인 큐레이터의 능력은 현대 미술에서만 발휘되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의 전통 미술 전시 또한 그런 큐레이팅의 묘미를 발휘해 우리 눈을 즐겁게 한다. 바로 국립 중앙 박물관의 ‘초상화의 비밀’ 전이 그렇다. 국립 중앙 박물관의 초상화 전시는 우선 테마를 재미있게 나눴다. ‘통치자의 위엄’, ‘여인’, ‘역사의 맞수’, ‘영원한 우정’, 그리고 ‘가문의 위상’. 이렇게 주제를 정하다 보니 자칫 평면적이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 있는 조선의 그림들이 마치 오늘의 인물들을 만나는 것처럼 생동감이 생겨났다. 부부, 가족, 형제의 초상이 한 장에 들어 있는 작품을 보니 마치 부모님 회갑연을 기념해서 온 가족이 기념사진을 찍은 듯,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변치 않음을 볼 수 있었다. 명나라에 대한 입장 차이로 스승 우암 송시열의 노론에 대항하고 소론을 이끌게 된 명재 윤증의 초상화, 사명대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초상화를 나란히 놓음으로써, 이들 역사의 맞수 간에는 비록 그림에 불과하나 불꽃이 튀는 긴장이 흐르는 듯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은 일본의 재침 야욕을 확인하고자 사명대사를 일본에 보냈다. 문득 초등학교 때 남상섭 선생님이 들려준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사명대사의 소임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화친 제의에 대한 ‘회답’과 포로의 ‘쇄환’이었다. 적진에 홀로 담판을 지으러 들어가는 사명대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이나, 모두 적수에 대한 탐문으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던 터였다. 호사스런 저택에 머물게 된 사명대사는 일본식 목욕탕으로 안내 됐다. 주인이 이끄는 대로 목욕탕에 든 사명대사는 욕탕 바닥에 독사가 한 마리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이를 보고도 전혀 개의치 않고 욕탕 안으로 들어갔고, 그 의연한 모습을 본 일본인들은 사명대사의 기개에 눌려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비밀은, 독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사명대사는 지니고 있던 염주알 한알을 떼어 욕탕 바닥에 떨어뜨려 봤고, 독사가 아랑곳하지 않자 욕탕 바닥과 독사 사이에는 유리판이 놓여 있다는 걸 알아챘다. 자신의 담력을 시험하려 했던 얄팍한 꾀를 그가 꿰뚫어 보았다는 얘기다.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어린 나이에 얼마나 통쾌하던지. 사명대사와 도쿠가와의 초상화를 보자 갑자기 수십 년 잊고 있었던 얘기가 불현 듯 생각이 났다. 뉴욕에서 연수하던 시절, 나는 시내에 있는 프릭 컬렉션을 자주 찾았다. 그곳에 소장된 그림, 가구, 조각, 책들이 기막힌 수준이라는 것 이외에도 그곳을 찾은 이유는 또 있었다. 바로 전시의 묘미였다. 그들은 영구 소장품 전시에도 큐레이팅의 맛을 살렸다. 그 미술관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던 공간은 주인 프릭의 서재였다. 책상 뒷면 벽에는 ‘역사의 맞수’의 두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영국 튜더 왕조, 헨리 8세 시대의 토머스 크롬웰과 토머스 모어의 초상화였다.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가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로 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는 데까지는 소극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왕이 카톨릭 교회와 교황을 부정하고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려 하자 그의 입장을 옹호하지 않았다. 당시 헨리 8세의 측근이었던 토머스 크롬웰은 ‘토머스 모어가 왕이 교회의 수장임을 부정했다’는 증언을 유도, 유죄판결로 그를 참수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결국 5년 뒤, 토머스 크롬웰은 왕을 도와 앤 불린을 처형하고, 정치적인 이해에 휩쓸려 왕의 혼사를 좌지우지한 혐의로 역시 참수되고야 말았다. 왕의 노여움을 산 그는 참수당할 때에도 신참 망나니가 두 번이나 실패하고 세 번째 휘두른 칼에 목숨이 끊길 정도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당시 앤 불린을 참수할 때 왕은 특별히 프랑스에서 노련한 망나니를 초빙해 단 한칼에 처형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참수 당하는 왕비에 대한 각별한 배려였다는 기록이다. 초상화 속에서 온화한 얼굴과 지적이고 예쁜 손을 가진 이는 피해자였던 토머스 모어다. 가해자였던 토머스 크롬웰은 완고하고, 욕심 많고, 노회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화가는 이렇게 그림으로 역사를 말하고, 노련한 큐레이터는 이렇게 화가를 대변하는가 보다. -조윤선 (한나라당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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