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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 재벌사] SK그룹 편 1화

조선과 교토에서 이름따 ‘선경’ ‘닭표’ 안감 상받으며 정부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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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91호 박현준⁄ 2012.09.10 13:12:31

선경직물은 1940년 10월에 수원역에서 서쪽으로 2km가량 떨어진 수원시 평동4에서 설립된 직물제조회사였다. 선만주단(鮮滿綢緞)과 경도직물(京都織物)이 공동으로 투자하여 설립했는데 상호인 ‘선경’은 선만주단과 경도직물의 머리글자인 ‘선’과 ‘경’을 조합한 것이다. 선만주단은 만주지역에 직물류를 수출하기 위해 1929년에 국내에서 설립된 일본인 포목상이었고 경도직물은 일본 관서지방을 대표하는 견직물 제조업체였다. 선만주단은 공장부지 8000평과 공장건축비 및 기타비용을 부담하였으며 경도직물은 직기 및 부대설비를 각각 현물 출자했다. 선경직물과 인연 맺으면서 시작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이 북중국 일대를 점령하면서 일본 상품시장도 덩달아 확대된 결과 중국 내에서 일본제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선경이 설립될 무렵에는 국내 섬유업계도 호황을 누려 전국에 수많은 군소 제조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선경직물은 제1, 2공장에 기모도식(木本式) 직기 100여 대와 염색가공 설비, 보일러, 기숙사 등을 완비하고 종업원 200여명(남자 약 40명)으로 태평양전쟁 와중인 1943년 봄부터 인견과 시루빠(Silver)를 직조하였다. SK그룹 창업자 최종건(崔鍾建, 1926~1973)도 이 무렵에 선경직물과 인연을 맺는데 계기는 다음과 같다. 최종건의 부친 최학배는 21세 때 결혼과 함께 서해 바닷가인 수원군 팔탄면 해창리에서 수원 평동으로 이주, 그곳에서 대성상회를 개설하고 수원잠업시험장에 볏짚과 왕겨 등을 납품하는 한편 미곡상을 겸영하였다. 이재(理財)에 밝아 사업이 번성했을 뿐만 아니라 인근의 선경직물공장을 건설할 때는 골재와 자재류를 납품하기도 했다. 최종건은 1926년에 최학배의 8남매 중 장남으로 수원 평동 7에서 출생하였다. 수원 신풍소학교를 거쳐 1944년 4월에 경성직업학교 기계과 졸업과 동시에 선경직물의 공무과 견습기사로 입사하였다. 당시 그는 3급 기계정비사 자격증도 소지해 취직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으나 부친의 권유로 선경직물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추정된다. 선경직물은 1944년 8월에 수원의 다른 직물공장들과 함께 ‘전시기업정비령’에 의해 조선직물로 흡수되었다. 조선직물은 1934년에 경기도 안양에서 설립된 인견직 전문생산업체로 부지 4만1000평, 건물 9100평으로 수도권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직물공장 중의 하나였으나 안양공장은 항공기제조창으로 징발당했다.

대신 조선직물은 수원에 산재해 있는 직물공장들을 전부 접수했는데 당시 수원에는 선경직물 외에 선일직물공장, 수원직물공장, 동흥직물공장 등 6개 공장이 있었다. 전황이 일본군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선총독부는 방산시설 확충차원에서 강제로 기업구조조정을 단행한 것이다. 조선직물은 이들 직물공장을 접수함과 동시에 선일직물을 제1공장으로, 선경직물을 제2공장으로 개편하였다. 이 무렵 최종건은 직보반 제2조장으로 승진되었다. 2조장은 100여명의 제직(製織)조 여공들을 통솔하면서 교대작업반을 편성, 운용해야 하고 생산계획을 차질 없이 수행해야 하며 또한 품질관리도 책임져야 했다. 제직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선경 브랜드의 부통령상 수상 이후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성장발판 마련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계기로 선경직물은 여타 일본인 소유의 기업들처럼 미군정청에 귀속되면서 관리인에 황청하와 김덕유가 임명되었다. 황청하와 김덕유는 선경직물의 총 주식 50만주 중 각각 100주씩을 소유한 군소주주들이었으나 미군정법령 ‘적산관리요령’의 내용 중 “적산업체의 주주 또는 당해 적산업체에서 5년 이상 근속한 자에게 관리인 자격을 부여한다”는 조항에 따라 선임되었던 것이다. 선경직물은 1946년 2월부터 조업을 재개했는데 공장장은 황청하의 동생 황철하가, 총무부장에는 김덕유의 조카 표덕은이, 생산부장에는 21세의 청년 최종건이 임명되었다. 해방과 함께 일본인 경영자들이 철수함으로써 선경직물 공장의 기계설비 및 원재료의 안전관리가 초미의 과제였다. 당시 일본인 소유 공장의 경우 한국인 근로자들이 자주관리 형식으로 운영되었으나 기술 및 원료부족에다 좌우익의 대립으로 공장경영이 원활하지 못했던 터에 절도마저 기승을 부린 탓이었다. 선경직물에서는 자체 경비를 위해 선경치안대를 결성했는데 최종건이 주체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 공로를 높이 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47년부터 직물업계의 호황으로 선경직물의 경영도 활성화되었다. 해방을 계기로 국내 일본계 기업들의 동시적인 생산중단에다 일본으로부터의 수입 또한 단절되어 물자난이 극심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8년부터 북한이 남한에 대한 송전(送電)을 중단함으로써 선경직물은 동력원을 확보하지 못해 조업에 차질을 빚었다.

1949년 여름 최종건은 선경직물을 퇴직하고 방직원료인 원사(原絲) 거래로 재미를 보다가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마산으로 피난하였다. 최종건이 1952년 5월에 수원으로 돌아왔을 때 선경직물 공장은 거의 폐허 상태였다. 시설들을 점검한 결과 직기 10~20여대 정도는 수리하면 사용이 가능한 상태였다. 최종건은 방구현, 차철순과 함께 공동으로 선경직물 불하작업을 추진하였다. 방구현은 최종건이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람으로 해방 후에는 많은 적산(敵産)을 불하 받아 큰돈을 벌어 ‘수원한량’ 소리를 듣던 사람이었다. 선경직물 공장부지 1만2000평 중 차철순의 지분 4000평을 우선 매입한 다음에 귀속재산 우선매수원을 차철순과 공동명의로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정부의 귀속기업 불하 우선순위는 일제하에서 해당기업의 주주 및 경영인, 관리인, 채권자 순이었던 것이다. 선경직물의 우선불하권자는 주주인 황청하와 김덕유였으며 다음으로 차철순이었다. 방구현의 재산과 풍부한 적산불하 경험도 유용했을 것이다. 선경직물은 설립당시 차철순의 땅 1만2000평을 공장부지용으로 매입했는데 8000평에 대한 대금만 지불하고 나머지 4000평에 대해서는 5년 이내에 지불하기로 한 터여서 4000평은 여전히 차철순의 지분으로 등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농지개혁법에 의하여 농지를 매수당한 자에게 귀속재산 매수에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귀속재산 불하규정에 근거해서 차철순은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당시로서는 귀속재산 매각통지서를 손에 넣는다는 것이 곧 큰 행운을 잡는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귀속재산을 불하받아서 손해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귀속재산은 으레 시가보다 싼값에 매각되기 마련이었으며 매수대금도 5년 내지 15년까지 장기분납이 가능했다. 매수계약금에 해당하는 1차 납부금도 매수총액의 1/10만 납부하면 되었으며, 게다가 매수대금은 액면가보다 훨씬 싼값에 살 수 있는 농지증권으로 대납할 수 있었다. 그 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치솟는 인플레로 화폐가치가 자꾸 떨어지기 때문에 귀속재산을 불하받는다는 것은 횡재나 다름없었다.”(선경 40년사<약사>, 378면) 최종건은 부친으로부터 약간의 자금을 지원받아 차철순을 움직여 선경직물 인수준비에 착수한 결과 1953년 7월 27일에 관재청으로부터 130만 환에 불하를 허가한다는 것과 3주일 이내에 매각대금의 10%를 납부하고 계약을 체결하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당시 쌀 한말은 1000환으로써 계약금 13만 환은 쌀 1300가마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불하대금이 예상보다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어 방구현은 동업을 포기했다. 최종건은 차철순 소유의 지가증권을 계약금으로 충당하고 차후에 차철순에 상환하기로 하였다.

1953년 8월에 계약금 13만 환은 지가증권으로 납부하고 나머지 금액은 10년 분할조건으로 선경직물 주식 50만주 중 황청화, 김덕유 몫(각각 100주씩 소유)을 제외한 49만9800주를 차철순과 공동명의로 계약하였다. 27세의 청년 최종건은 거의 적수공권으로 1만2000평의 선경직물공장을 소유하게 되었다. 정부지원 힘입어 대기업으로 우뚝 서 이후부터 선경직물은 최종건 주도로 경영되었는데 운전자금은 선경직물의 고철을 팔아 확보한 돈으로 원사를 구입하여 생산을 개시했다. 그런데 이 무렵은 전쟁직후로 물자부족이 심각해 생산된 직물들은 전부 소진되었다. 최종건은 조업률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생산에 매진한 결과 선경직물 인수 1개월여 만인 동년 9월 30일에 차철순에 지가증권 13만 환을 상환하고 공동매수인 권리포기각서를 받았다. 27세 청년 최종건이 선경직물의 명실상부한 주인이 되었던 것이다. 10월에 제1공장 건물을 복구하고 선일직물과 동흥직물에서 중고 직기 60대를 구입해서 설치했다. 1955년 8월에는 서울 휘경동 태창직물의 중고 직기 50대를 넘겨받아 제2공장마저 복구했다. 선경에서는 양복안감으로 쓰이는 인조견 능직(綾織)을 생산하고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 생산되는 양복안감은 대부분 재단(裁斷) 전에 물세탁을 해야 했으나 선경에서 생산한 제품은 물세탁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날개를 단 듯 팔려나갔다. 이 무렵 국내굴지의 인견직 메이커는 조선직물, 태창직물, 심도직물 등으로 선경직물은 지방에 소재한 중소기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955년 10월 1일 서울 창경궁에서 개최된 전국산업박람회에서 선경의 ‘닭표’ 안감이 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전국 유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한다. 당시 산업은행은 박람회에서 수상한 업체들에 기업육성자금을 융자해주었는데 대통령상에는 500만 환, 부통령상에는 300만 환 등의 장기저리자금이 제공되었던 것이다. 선경은 융자금 300만 환으로 악성고리채 100만 환과 선경직물 매수대금 중 잔금 91만 환을 상환하고 나머지 100만 환으로는 고급견직물을 생산하기 위해 일제 문직기(Jacquard) 25대를 발주, 제3공장을 건설했다. 1956년 3월 24일에 선경직물주식회사로 설립등기하였다. ‘봉황새’ 이불감 등 신상품이 전국적인 히트상품으로 급부상하면서 선경은 서서히 대기업으로 부상해갔다. 해방과 한국전쟁이 초래한 만성적인 물자부족에다 귀속기업 불하, 그리고 엔지니어 출신인 최종건의 경영경험 등이 상승작용함으로써 지방소재의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던 것이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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