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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 재벌사 _ 롯데그룹 편 2화]80년대 반값 땅불하로 특혜시비 잇달아

일본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자본력으로 유통·부동산에 주력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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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96호 박현준⁄ 2012.10.15 13:39:02

1967년 4월 3일 신격호는 국내의 (주)롯데와 롯데화학공업사를 해산하고 새로 자본금 3000만 원을 투자해 롯데제과(주)를 설립하였다. 기능직 사원 350명과 일반직 사원 150명 등 500여명의 중견기업으로 출발했는데 신격호는 사장을, 막내 동생 준호가 기획실장으로 제조와 영업을 총괄하였다. 롯데제과 회장에는 유창순(劉彰順, 1918~2010)을 추대하였는데 그는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평양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에 입사해 1951년 도쿄지점장으로 부임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신격호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유창순은 이후 한국은행 총재, 상공부 장관,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전략 수립에 일조했을 뿐만 아니라 1982년에는 국무총리에 취임한 정관계의 거물급이었다. 막강한 자본력 토대로 사업다각화 시작 롯데제과는 제1, 2공장 등 2개의 공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갈월동의 제1공장에서는 껌을, 양평동의 제2공장에서는 빵과 비스킷, 캔디, 캐러멜 등을 생산하였다. 당시 국내 제과업계는 동양제과, 해태제과 등이 시장을 양분하고 있었다. 해태제과는 1945년 10월에 민후식(閔厚植), 신덕발(申德鉢), 박병규(朴炳圭), 한달성(韓達成) 등 4인이 서울 용산구 남영동 131 소재 귀속기업인 영강제과(永岡製菓)를 공동으로 인수해 키운 것이다. 동양제과는 이북출신의 기업인 이양구(李洋球)가 서울 용산구 문배동 30-10 소재의 귀속기업을 1956년 7월에 인수해서 키운 것이다. 후발주자인 롯데제과는 막강한 자본과 질 좋은 상품, 선진화한 마케팅 등으로 단기간에 업계 정상을 차지하였다. 롯데제과는 1970년대에 급속히 다각화하였다. 1970년 10월에 껌과 과자포장에 필요한 은박지생산을 위해 동방알미늄을 인수해서 롯데알미늄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1973년 11월에는 공해방지 시설업체인 롯데기공과 오디오 생산업체인 롯데파이오니아(현 롯데전자)를 각각 설립하였다. 1974년 1월에는 사무기기 메이커인 롯데산업을, 같은 해 11월에는 그룹의 무역창구인 롯데상사를 설립하였다. 또한 그해 4월에는 국내 최대의 청량음료 메이커인 칠성사이다를 인수해 롯데칠성음료로 상호 변경하였다.

1973년부터 시작된 관광진흥 정책에 따라 서울을 중심으로 호텔신라 등 국제수준의 매머드급 관광호텔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롯데는 1975년에는 서울도심의 금싸라기 땅인 반도호텔과 고급요리점인 아서원, 국립도서관을 한꺼번에 매입해 그 자리에 지상 38층 지하 3층에 객실 1020개의 특급호텔 호텔롯데를 신축, 1979년 10월에 완공하였다. 1978년 1월에는 한일향료(현 롯데식품)를 설립하였으며 2월에는 삼강하드 아이스크림을 인수해 롯데삼강으로 변경하였다. 4월에는 롯데햄우유를 설립하였으며 9월에는 마산의 크리스탈 관광호텔을 인수, 롯데크리스탈호텔로 명명하였다. 또한 그해에 평화건설을 인수, 롯데건설로 변경하였는데 중동 건설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롯데는 이 무렵에 중화학공업에도 진출했다. 1970년대 말의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국영 한국종합화학의 자회사인 호남에칠렌과 여수석유화학, 그리고 한국 정부와 일본 미쓰이물산이 50대50 비율로 합자한 호남석유화학이 주도하고 있었다. 호남석유화학은 에칠렌(연산 35만 톤)을 베이스로 폴리에칠렌, 폴리프로핀 등의 석유화학제품의 대규모 공장을 전남 여천공단에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는데 정부는 석유화학공업 민영화정책의 일환으로 이 회사의 정부 지분 매각을 추진했다. 정부 지분 불하를 놓고 롯데와 현대그룹이 경쟁했으나 롯데가 1979년 1월에 정부 지분 40%를 160억 엔에 매입했다. 1997년 3월 롯데는 일본 미쓰이그룹이 보유 중이던 이 회사의 지분 33% 중 23%를 마저 인수해서 이 회사의 최대주주가 되었다.

1979년 11월에는 호텔롯데 옆에 국내 최대 규모의 롯데백화점을 건설하였을 뿐만 아니라 같은 해 10월에는 국내 최초의 패스트푸드 체인업체인 롯데리아도 설립하였다. 롯데그룹 성장을 견인하는 삼두마차인 제과, 호텔, 쇼핑 체제를 완성한 것이다. 롯데는 1967년에 창업한 지 10여년 만에 기업인수 및 설립 등을 통해 식품, 호텔, 유통, 건설, 전자, 관광, 중화학 분야로의 다각화를 통해 복합기업군을 형성함으로써 1970년대 말에는 10대 재벌에 진입하였다. 롯데그룹은 식품, 유통, 서비스업 등 자본회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업종을 중심축으로 해서 복합기업집단을 완성했다. 특혜시비 의혹 속에 유통전문 최대그룹 완성 롯데제과가 국내 제과업계의 정상에 올라선 것은 1979~80년이었다. 1945년 해방 이래 국내 제과업계를 석권하던 해태제과와 동양제과와의 경쟁에서 롯데는 1980년 매출액 1000억 원을 달성해 업계 수위로 올라섰다. 그 여세를 몰아 ‘1986 아시안게임과 1988 서울올림픽 제과공급 업체로 지정되는 등 1986년에는 매출액 2000억 원을 돌파했다.

신격호의 사업다각화 노력은 1980년대 들어와 더욱 과감해졌다. 1980년에는 식품저장을 목적으로 롯데냉동(주)을 설립하고 사진감광제 메이커인 한국후지필름(주)을 인수했다. 한국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에는 (주)롯데자이언츠를 출범시켰으며 광고대행업체인 (주)대홍기획과 롯데물산도 설립했다. 1985년 2월에는 옛 산업은행 부지에 35층의 롯데백화점 신관을 착공해서 1988년에 개관했다. 또한 같은 해 11월 12일에는 서울 잠실의 대지 2만3000 평에 호텔, 백화점, 쇼핑몰, 스포츠센터 등을 아우르는 롯데월드를 오픈한 결과 1991년에는 롯데백화점 매출이 1조5000억 원을 기록, 업계 전체 매출액의 30%를 점할 정도로 도약했다. 1984년 5월에는 (주)호텔롯데부산을 설립하고 그해 11월에 부산 서면의 옛 부산상고 부지 1만7060평을 348억 원에 사들여 이 자리에 지상 41층, 지하 5층 규모에 900여 객실을 갖춘 ‘호텔롯데 부산’과 롯데백화점 부산점을 1996년 12월에 오픈했다. 1986년에는 국내 최초의 민자역사이자 지하 5층, 지상 8층, 연건평 2만6000 평의 서울 영등포 역사 운영을 목적으로 (주)롯데역사를 설립했으며 1987년 12월에는 서울시로부터 송파구 신천동 29번지의 2만6000 평의 체비지를 시가의 절반인 819억 원에 인수해서 영등포 역사 특혜임대 시비에 이어 또다시 특혜시비가 불거지기도 했다. 전국의 요지 곳곳의 부동산투자에 주력했던 것이다. 1990년대에는 비관련 다각화에도 주력해서 1990년 5월에는 부산 지역 유수의 지방일간신문인 국제신문을 인수했으며, 1994년 10월에는 (주)코리아세븐을 인수해서 편의점사업에도 진출했다. 1995년 11월에는 부산할부금융을 설립해서 새로 금융업에 진출했을 뿐 아니라 1996년 10월에는 롯데리아와 일본 미쓰이물산이 합자해서 자본금 15억 원의 롯데로지스틱을 설립했다. 계열사들의 물류비 절감과 유통 부문 경쟁력 강화가 목적이었다. 1997년 1월에는 롯데텔레콤(현 롯데정보통신)을 설립해서 그룹 내 정보통신사업을 전담케 했으며 그해 7월에는 세계적 아케이드게임 개발 및 운영업체인 일본의 (주)세가 엔터프라이즈와 50대50 합작으로 자본금 110억 원의 (주)롯데세가를 설립했다.

일본의 (주)롯데는 1990년에 일본 제과업계 최정상 기업으로 성장해서 일본 200대 기업에 진입했을 뿐만 아니라 22개 계열사를 거느린 기업집단화에 성공했다. 신격호가 일본에서 쌓은 재력과 신용으로 30여 년간 30억여 달러를 투입해서 완성한 한국의 롯데그룹은 1997년 현재 계열사수 29개사, 종업원수 3만5000여 명에 매출액 9조 원으로 국내 10위에 랭크되었는데 그룹 총매출액의 60% 이상을 서비스업종에서 벌어들이는 등 전형적인 부동산 및 유통전문 그룹이었다. 사업다각화 외연 확대로 재벌순위 5위로 부상 2000년대 이후의 다각화는 그간에 벌려 놓은 사업의 외연적 확대였다. 첫째는 유통사업 확충으로, 개시는 2002년 7월에 롯데쇼핑이 경쟁업체인 미도파백화점을 5420억 원에 대농그룹으로부터 인수한 것이다. 미도파백화점은 일제하인 1938년에 일본인들이 설립한 정자옥(丁字屋) 명동점으로 출발한 신세계백화점과 함께 현존하는 국내 최고의 백화점 중 하나였다. 1945년 해방 후에는 귀속재산화해서 경영진이 자주 바뀌었다가 1969년 5월에 대농그룹 창업자인 박용학이 무역협회 지분 40%를 2억 원에 인수했던 것이다. 이후 미도파는 신세계, 화신백화점과 함께 서울 장안의 대표적 백화점으로 성장, 재계순위 34위인 대농그룹의 주요 계열사로 자리매김했다. 대농 또한 롯데쇼핑처럼 지방의 주요 도시에 분점을 확대하는 등 외형적 확장에 주력했으나 그 과정에서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1996년 결산에서 2931억 원의 적자를 기록하는 등 외화내빈의 처지로 전락했다. 신동방그룹이 미도파백화점에 대한 경영권을 노린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하면서 미도파의 주가는 1996년 말 1만2000원에서 1997년 3월 초 4만5000원까지 급등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이 미도파에 대해 광범위한 공동지원을 약속하자, 그동안 꾸준히 주식을 매수해 왔던 성원건설이 보유지분을 모두 미도파에 매각하면서 적대적 M&A는 미도파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경영권 방어를 위해 무리하게 자금을 조달하다가 미도파는 부도가 나서 롯데쇼핑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롯데쇼핑은 2003년 11월에 한화그룹 계열의 한화마트와 스토어 24개 점포를 1700억 원에 인수했으며 2006년 8월에는 당시 뜨는 업종인 홈쇼핑에 진출하고자 우리홈쇼핑(현 롯데홈쇼핑)의 지분 53.03%를 4667억 원에 인수했다. 2007년 3월과 9월에 빅마트 14개 점포와 나이스마트 5개 점포를 1000억 원에 인수했다. 해외진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2007년 12월에는 중국 마크로 8개 점포를 1615억 원에, 2008년 10월에는 인도네시아 마크로 19개 점포를 3900억 원에, 2009년 12월에는 중국 타임스를 7300억 원에 각각 인수해서 국내외 유통망을 확충했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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