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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 재벌사]부영그룹 편 1화

‘세발자전거’ 돌다리 경영, 임대주택 올인 기초 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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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24호 박현준⁄ 2013.04.29 14:49:52

창업자 이중근은 1941년에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건국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등록금을 조달할 길이 없어 대학을 중도에 포기해야만 했다. 이후 1972년 3월에 우진건설산업을 설립했다. 우진건설은 중동건설 특수가 한창이던 1977년에는 중동에 진출해서 한국도시개발, 삼환, 한신공영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등 순탄한 성장을 거듭하면서 상장기업으로까지 도약했으나, 1979년에 부도로 폐업하기에 이르렀다. 1978년부터 중동건설 시장이 서서히 냉각되는 터에 국내 건설업체들 간의 과당경쟁에 따른 덤핑수주까지 가세해 해외건설업체들의 경영난을 가중시켰던 것이다. 부도 이후 재기에 성공하면서 임대주택사업에 특화 하지만 이중근은 1983년 3월 서울 영등포에서 주택건설 업체인 자본금 5000만 원의 삼진엔지니어링을 설립하면서 재기했다. 공업화에 따른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주택난이 갈수록 심화됐다. 급기야 부동산불패 신화가 자리매김하면서 주택건설사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삼진은 설립 이듬해인 1984년에 총 280세대를 분양했으나, 1985년에는 740세대를 건축한 뒤 전부 임대주택으로 전환했다. 여타의 주택건설업체들과는 달리, 삼진은 처음부터 임대주택사업 쪽으로 특화한 것이다. 무주택 서민을 대상으로 한 임대주택은 건축비가 비교적 저렴한데다가, 정부 차원의 재정지원까지 기대되면서 소자본으로도 영위가 가능한 탓이었다. 국내에서는 1972년에 제정된 주택건설촉진법과 1984년에 제정된 임대주택건설촉진법에 의해 생활보호 대상자를 위한 임대주택 건설이 개시됐다. 임대주택법에 따르면 임대주택의 경우 건설교통부 장관이 택지공급 계획을 수립하면 국가나 지방자치체, 대한주택공사(토지개발공사와 합병해서 LH공사가 됨), 토지개발공사 등이 토지를 개발해 공급하고, 중앙 및 지방자치단체, 대한주택공사(공공임대주택) 및 임대 전문업자(민간임대주택)가 정부예산 또는 국민주택기금 등을 재원으로 사용해 건설한다. 국·공유지나 체비지 등은 임대주택 건설에 우선 공급해야 한다.

임대보증금과 임대료는 공공임대주택인 경우에는 건설교통부 장관이 고시하고, 민간임대주택은 고시가의 100분의 150을 넘을 수 없다. 의무임대 기간은 공공건설 주택의 경우 국가, 지방자치단체의 재원으로 건설된 주택이나 국민주택기금으로 건설된 주택 가운데 영구임대주택은 50년 이상이며, 그 중 근로자를 위한 임대주택은 10년 이상이다. 임차권은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전대(轉貸)할 수 없도록 했다. 다만, 의무임대 기간이 50년이 아닌 임대주택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임대사업자의 동의를 거쳐 양도할 수 있었다. 입주 자격은 임대주택 건설지역의 거주자로서, 임대주택 건설 최초 공고일 1년 전부터 입주 때까지 무주택자이고, 전용면적 15평 이하인 경우 세대주의 월평균 소득이 전년도의 도시근로자 평균소득 이하이어야 한다. 선정 순위는 주택의 공급에 관한 규칙에 따르며, 다만 생활보호 대상자, 의료부조자, 도시계획사업에 의한 철거민 등에 대하여는 건설교통부 장관이 따로 정한 기준을 따를 수 있도록 했다. 삼진은 1986년부터 분양과 임대주택 건축을 겸했으나, 주로 임대사업에 주력한 결과 1992년에는 임대주택만 3808세대를 완성, 사업개시 년인 1984년 대비 건축물량 면에선 13.6배나 커졌다. 1984~1992년 동안 전국 각지에 총 1만3251세대를 건축했는데, 이 중 64.0%인 1만1091세대가 임대주택으로 삼진은 굴지의 민간 임대주택업체로 성장했다.

삼진은 1993년 3월에 자본금 70억 원의 주식회사 부영으로 상호를 변경했는데, 부영이 주목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였다. 같은 해에 부영은 전국 7곳에 분양용 주택 796세대와 임대주택 7053세대 등 총 7849세대를 건축해서 국내 주택건설 실적 2위 업체로 부상한 것이다. 1994년에는 전국 4곳에 일반분양 3547세대와 임대용 1280세대 등 4827세대를 건설하고, 이듬해인 1995년에는 전국 19곳에 임대용과 분양용을 각각 1만996세대와 3617세대 등 총 1만4613세대를 건축했다. 불과 1년 만에 건설 실적이 3배나 늘었는데, 그 중에서도 임대주택은 전년대비 무려 8.6배나 신장했다. 초기 투자가 큰데 비해 부가가치가 적어 주택건설업자들이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996년에는 전국 15곳에 임대주택 1만2523세대와 분양용 3521세대 등 총 1만6044세대를 새로 건축하면서 부동의 2위 자리를 지켰다. 당시 부영은 경기도 도농 그린타운 부지를 매입할 때 현대와 삼성 등 쟁쟁한 건설업체를 물리치고 낙찰을 받아 세간에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그러나 부지확보를 위해 무려 3800억 원의 타인자본을 끌어들임으로써 일시적으로 자금압박을 받기도 했지만, 부영은 일반분양을 통해 확보한 자금과 가구 당 3500~4000만 원씩 지원되는 국민주택기금을 재원으로 해서 임대주택사업을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

외환위기 광풍에도 불구 최대 임대주택업체로 부상 부영의 분양 실적은 1984년부터 1992년까지 10년 가까이 고작 2000가구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적을 기록했으나, 1993년 한 해에만 무려 3000가구가 넘는 분양 실적을 기록한 후 내리 3년간 신장세를 거듭했다. 부영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1995년에 급성장해서 건설업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던 것이다. 따라서 업계 일각에서는 당시 정부의 실세이자 국회의원을 역임한 모 정치인이 부영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기도 했다. 1997년 말에 초래된 외환위기는 가히 재앙수준이었다. 전국적으로 2만2000여 기업들이 도산했는데, 그 중에서도 7000여 기업들은 흑자도산으로 무너져 무려 250만 여명이 일자리를 잃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서 건설업은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 부영의 확장추세도 다소 둔화되었으나 외환위기 광풍이 휩쓸던 1998년에는 일반분양 120세대와 임대용 9813세대 등 총 9933세대를 건축함으로써 국내 임대주택건설 실적 1위 업체로 등극했다. 이 무렵부터 부영은 신안종합건설, 성원건설과 함께 건설업계 ‘호남 3인방’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영의 존재는 잘 부각되지 않았다. 2003년 현재 부영의 연매출이 80억 원 정도에 불과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영은 종종 언론에서 주목되었는데, 일례로 2002년에는 농수산물유통공사로부터 평택시 고덕면 여염리 11번지 일대 한국낙농목장 부지 42만 5000평을 800억500만 원에 낙찰 받은 것이다. 2000년 1월에 공포된 도시개발법에 의해 민간이 택지를 개발할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된 이래, 민간업체가 40여만 평이 넘는 택지를 개발하는 것은 부영이 처음인 때문이었다. 건설업체 부영이 유독 임대주택사업에만 올인한 것은, 창업자 이중근의 경영철학인 ‘세발자전거론’에 기인한 것이다. 임대주택 건설업은 일반분양과는 달리 큰 수익을 기대하기 힘든 대신, 무주택 서민들이 많은 탓에 아파트공급 그 자체가 사업성패의 관건일 정도로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적다. 즉 임대주택사업은 세발자전거처럼 빠르게 달리기에는 적당하지 않지만, 대신 안전하게 사업의 외연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영의 확장 정책은 총매출 3300억 원에 당기순이익 46억6000만 원을 기록한 2004년까지였다. 2005년에는 주택건설 물량이 전년대비 무려 54%로 격감했다. 이후에는 더욱 감소되어 2009년에는 1920세대로 1987년 수준으로 위축됐다. 전국적으로 임대아파트 수가 급증하면서 곳곳에서 세입자들이 집단으로 민원을 제기하는 등 임대주택사업의 한계성이 노출된 때문이었다. 부영의 세입자 전국단체인 부영연대 결성은 설상가상이었다. 또한 점증하는 임대료 수입도 새로운 사업구상 욕구를 자극했다.

비자금 및 정경유착 의혹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그 와중인 2004년 4월 8일에 이중근이 200억 원대의 비자금 조성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건설경기가 되살아난 2000년부터는 또다시 한 해 2000가구가 넘는 분양 실적을 기록했는데, 그 과정에서 부영이 협력업체에 지급할 공사대금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거액의 비자금을 챙긴 것으로 검찰이 판단했던 것이다. 항간에서는 ‘땅 짚고 헤엄치기’사업으로 회사를 키웠다거나 혹은 김대중 정부시절에 동교동계의 지원을 받았다는 소문도 무성했었다. 이중근 부영 회장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명예총재로 있던 봉사단체 “사랑의 재단” 후원회장을 맡았던 점도 의혹을 증폭시켰던 것이다. 부영이 사업을 최초로 다각화한 것은 1980년 2월 토목시설물 건설업체인 광영토건을 설립한 것이다. 이는 1979년 우진건설이 부도로 폐업되면서 대안으로 설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부영의 전신인 삼진이 자리를 잡을 무렵인 1986년 7월에는 주거용 건물 개발 및 공급을 목적으로 동광주택산업을 설립했다. 부영그룹도 여느 재벌들처럼 초기에는 비용절감 차원에서 수직다각화로부터 출발했다. 1988년에는 대화도시가스를 인수했다. 동사는 전남 여수시(남면, 화정면, 삼산면 제외) 전역에 도시가스 공급을 목적으로 1984년 8월에 자본금 1억 원의 (주)공단도시가스로 설립됐다. 1988년 5월에 자본금을 3억4000만 원으로 증자, 상호를 대화에너지로 변경하고 도시가스(LPG+AIR) 공급을 개시했던 것이다. 2000년 11월부터는 도시가스 원료를 천연가스(LNG)로 전환했다. 건설업 특유의 불안정한 수입을 보완키 위한 방편으로 해석된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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