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0호 박현준⁄ 2013.08.19 15:29:07
서울에서 출발하는 가까운 지역은 이제 모두 전철화가 되어 기차 타는 재미는 반감되었다. 양평, 춘천, 천안, 문산, 동두천 등 모두 옛날 기차 타던 재미는 없는데 그 중에서 다행히 문산행 경의선은 통근시간을 제외하면 제법 쾌적한 여행의 즐거움이 아직 남아 있다. 아마도 특별한 행락지가 없기 때문인 듯하다. 경의선은 공덕역과 서울역에서 출발하는데 오늘은 차편이 많은 공덕역에서 출발이다. 목적지는 파주(坡州) 월롱면(月籠面)에 있는 월롱산이다. 서울 근교에는 지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가까우면서도 마음의 거리가 먼 지역들이 있다. 파주라는 지명도 낯선데 월롱은 더더욱 낯선 곳이다. 기차는 40분이 안 걸려 금촌(金村)에 도착한다. 금촌 다음역이 월롱역인데 목적지 월롱산성에 가기에는 금촌이 환승에 편리하다. 역을 나와 길을 건너면 좌측 30m 아래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그런데 오늘이 금촌장날이다. 금촌장은 1,6일장이니 1, 11, 21, 6, 16, 26일에 열린다. 어디 장터에서 국밥이나 한 그릇 하고 출발해 볼거나… 장이 제법 크다. 잊혀졌던 기저귀 고무줄, 팬티에 넣던 검은 고무줄, 새총 만들던 노란 고무줄도 나오고, 그리운 몸빼도 있고 낯선 푸성귀도 나왔다. 아쉽게 잔치국수 한 그릇으로 요기를 한 후 버스정류장으로 돌아온다. 이곳에서 월롱산으로 가는 길은 두 길이 있다. 월롱산 북쪽 파주LCD단지 방향으로 가는 길과 월롱산 남쪽 용상골로 가는 길이다. LCD단지 방향 버스는 025번, 09번이 있고 용상골 방향 버스는 022번이 있다. 버스가 잦지 않은 길이니 어느 버스나 먼저 오는 편을 타야 한다. 우리가 가는 길이 월롱산을 남북으로 넘는 길이라 어느 방향으로 오르든지 문제는 없다. 오늘은 09번 버스를 타고 LCD단지 기숙사정류장에서 내린다. 기숙사라고 하지만 우리 학창시절 조그만 기숙사가 아니고 고층아파트로 죽죽 뻗어 올라간 건물이다. A동 아래로 내려오면 안쪽으로 ‘이모’라는 이름의 간이음식점이 있다. 이 길로 들어서 풀밭 좌측(남쪽)을 바라보면 산으로 통하는 작은 오솔길이 보인다. 이 곳 기숙사 사람들이 즐겨 다니는 월롱산 등산로이다 이곳에서 월롱산 정상까지는 1.5km의 가벼운 산행길이다. 숲 사이 흙길 900m 오르면 좌측으로 약수터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약수터까지는 1km의 완만한 경사길이다. (만일에 남쪽 용상골로 올랐을 때는 이 갈림길에서 약수터로 내려가야 한다.) 둥근 통나무로 보강한 흙계단을 오르니 넓은 평탄지가 나타난다. 몇 해 전까지 군부대가 자리했던 곳으로 지금은 헬기장과 산불감시초소가 자리하고 있다. 이 평탄지가 끝나는 곳에 ‘월롱산성’ 안내판이 서 있다.
이곳 헬기장이 자리한 평탄지를 포함하여 월롱산 정상부까지 넓은 평탄지가 모두 월롱산성(月籠山城)이었다 한다. 산성 둘레가 1315m나 되는 테뫼식(산의 정상부를 폐곡선으로 둘러 쌓은 성) 산성이었다. 지표조사 결과 회청색격자문토기(灰靑色格子紋土器)가 많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3~4세기 경 백제의 최전성기인 근초고왕(近肖古王) 연간(年間)의 산성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근초고왕 연간의 산성이라면 그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만주 집안현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에는 이 시기의 일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부여계(夫餘系)로서 주몽으로부터 시작된 형제의 나라였으나 필연적으로 국경을 맞대게 되고 자연히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산성 둘레 무려 1315m 테뫼식 원롱산성 4세기에 고구려는 선비족이 세운 연나라와 분쟁이 잦았는데 급기야는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고 미천왕능에서 시신(屍身)이 탈취되는가 하면 왕모(王母)가 포로로 잡혀가는 수모까지 당하였다. 이에 북쪽으로 막힌 활로를 남쪽에서 찾으려 했는데 이 과정에서 한성백제의 영역인 황해도 지역과 임진강 한강 유역을 탐하게 되었다. 고국원왕 39년(369년, 백제 근초고왕 24년)에는 황해도 배천으로 비정되는 치양성(雉壤) 공격을 시작으로 백제를 향한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2년 후 왕 41년(371년, 근초고왕 26년) 겨울에는 백제 근초고왕의 역습으로 고국원왕은 평양성에서 전사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로써 고구려는 위축되고 백제는 근초고왕과 그 아들 근구수왕으로 이어지는 전성시대를 맞이한다. 이 전성시대에 백제군이 활약했던 성(城) 가운데 하나가 바로 월롱산성이라는 것을 유물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장맛비가 오래 계속된 관계로 여기저기 물길이 생겼는데 곳곳마다 얇고 단단한 경질의 회청색격자무늬 토기편이 무수히 많이 보인다. 16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많은 토기편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주둔한 군대 규모가 적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열흘 붉은 꽃이 없다했던가, 392년 광개토왕 원년부터 상황은 뒤바뀐다. 이때의 일을 광개토왕비에서 살펴보자. “백잔(百殘 : 백제)과 신라(新羅)는 옛날부터 우리의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 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辛卯年 : 391년)에 바다를 건너 왔기에 백잔(백제)과 신라를 쳐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6년(396년) 병신년에는 왕(광개토왕)이 몸소 수군(水軍)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이어지는 비문에는 이 때 함락시킨 수 십 개의 성(城)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 때 탈취한 성이 58개라고 한다. 백제의 아신왕은 고구려에 굴복하였다. 아마도 이때에 월릉산성도 고구려의 영역으로 넘어 갔을 것이다. 1600여 년 전 치열했을 전장에 이제는 한여름 햇빛만이 눈부시다. 그러나 아픔은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산성 안에는 ‘6·25 전사자 유해발굴’이라는 플랜카드가 걸려 있다. 우리 시대에도 이곳에서 전쟁은 있었고 잃어버린 주검들이 산성 어딘가에는 묻혀 있을 지도 모른다. 그저 무심한 것은 어쩌자고 이런 유적 자리에 체육공원을 조성했는지 모르겠다. 경기도 기념물 196호로 지정해 놓았으면 제대로 된 발굴도 하고 남은 유지나마 잘 보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상에는 작은 정상석을 세워 놓았다. 218.5m 월롱산. 월롱산(月籠山)? 이름이 특이하다. 동국여지승람 파주목(坡州牧) 산천조에는 ‘주 서쪽 15리에 있다(在州西十五里)’라는 기록이 있으니 예부터 월롱산으로 불렀던 산이다. 파주읍지에도 ‘주 서쪽 15리 교하군 경계에 있다(在州西十五里 交河郡界)‘고 했으며 대동여지도에도 월롱산이 그려져 있다. 월롱산은 과연 달(月)을 담는 바구니(籠) 모양의 산이란 말인가? 아무리 보아도 바구니는 연상되지 않는다. 파주목 옛 지도나 대동여지도를 보면 월롱산 남쪽에 樓峴(누현, 다락고개)라는 고개를 그려 놓았다. 다락고개가 무슨 뜻일까? 집에 방 중에서 제일 높은 곳의 방이 다락방이요, 산 위 저 높이 있는 밭이나 논이 다락밭, 다락논이요, 언덕배기 마을이 다락골이다. 그러니 다락고개는 높은 고개일 것이다. 우리 옛말에 산(山)이나 높은 곳을 가리키는 단어 중 하나가 ‘달’이라 한다. 이 ‘달‘은 기록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月’이 되기도 하고 ‘닭(鷄)’이 되기도 하였다 한다. 백두대간을 걷다 보면 탄항산이 있고 그 산의 세 봉우리를 월항(月項)삼봉이라고 부른다. 또 고개이름으로 강릉 왕산에 ‘닭목재’가 있다.
산성 안에는 ‘6·25 전사자 유해발굴’ 플랜카드 호사가들은 이 지명을 시적(詩的)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풍수를 끌어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다 만들어 낸 말일 것이다. 모두 높다란 산고개길의 길목인 ‘달(山,嶺, 峙) +목(項)’일 것이다. 탄항도 ‘달목’이요, 월항도 ‘달목’이요, 닭목도 ‘달목’일 것이다. 월롱산을 민간에서는 ‘다랑산’이라 불렀다 한다. 다락고개와 연관이 있는 말일 것이다. 다락이라는 말도 ‘달’에서 온 말이니 평지에서 볼 때 높은 곳을 이르던 말이다. 파주들에서 보면 월롱산은 다락처럼 솟은 산이니 다락산(다랑산)이라 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요 한자로 월롱(月籠)이라 쓴 것은 아닐까. 아쉽게 산성의 흔적은 거의 가름하기 어렵다. 산성의 동쪽을 제외하고는 세 방향이 거의 절벽에 가까운 경사면이어서 천연의 성벽을 구성하고 있다. 특히 서쪽 바위 지역은 수직의 석벽인데 일제 때 금광(金鑛)을 개발하면서 깎아낸 흔적이라 한다. 수직석벽이라 연전(年前) 일산클라이머스에서 15개의 암장코스를 개발했었는데 사적지라서 철거하였다.
아직도 헬기장, 체육공원, 이동통신기지가 자리하고 있어 옛 산성의 상처는 여전하다. 성을 한 바퀴 돌아본다. 토성(土城)으로 보이는 흔적들이 간간히 남아 있다. 북으로 임진강도 내려다보이고 강 넘어로는 송악산 덕물산 군장산 연이산 등도 가지런히 보인다. 월롱산길은 앞쪽 건지산 지나 통일전망대가 있는 오두산(烏頭山)으로 이어지는 오두지맥의 주요 중간 지점이다. 여암 신경준 선생의 산경표(山經表)에는 한북정맥을 한강봉~첼봉~ 울대고개~ 도봉산으로 이어 교하의 장령산으로 끝맺음하였는데 최근에는 한강봉 3거리에서 월롱산~ 오두산으로 이어지는 신한북정맥 코스가 개발되었다. 산경표상의 한북정맥길을 걷는 이들은 이 곳 월롱산 지나는 길을 오두지맥이라 부른다. 이름을 무어라 부르든 우리나라 긴 산길 걷는 이들에게는 월롱산길은 중요한 산길이 되었다. 월롱산 동남쪽에는 용상사(龍床寺)로 내려가는 하산로가 있다. 용상사까지 450m의 거리다. 하산길 50여m 접어들면 흙길 계단이 나타나는데 좌측 능선 방향으로 갈려나간 오솔길이 보인다. 이 길로 접어들면 발길에 기와편이 밟힌다. 잠시 뒤 좌측 비스듬한 경사면에 무너져 내린 석축(石築)과 기와편, 자기편들이 풀숲에 어지럽게 널려 있다. 무엇하던 터였을까? 동국여지승람 파주목 불우(佛宇)조에는 이곳에 있었던 절이 소개되어 있다. “용상사(龍床寺): 월롱산에 있다. 민간에 전해지기를 일찍이 고려왕이 피난길에 이곳에 잠시 머물렀기에 용상사라 이름 지었다.(在月籠山 俗傳 高麗王嘗避亂駐蹕于此 遂名之)”. 또한 파주읍지에는 용사(龍寺)라는 절이름이 보인다. 피난길에 이곳에 머물었던 고려 임금은 누구였을까? 역사기록에는 파주 월롱을 지나간 피난길은 나타난 것이 없다.
추측이 가능한 사람은 8대 현종과 31대 공민왕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 때 경기도 광주와 음성을 거쳐 안동으로 갔으니 이 길과는 거리가 있다. 8대 현종은 즉위하던 해 거란의 성종이 이끄는 40만 대군을 맞이해야 했다. 당나라가 무너진 공백기에 동아시아 패자(覇者)로 등장하여 발해조차 멸망에 이르게 한 거란이었기에 국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현종은 충장(忠將) 지채문의 호위를 받으며 적성(단조역)~ 양주(창화현)~ 양주(도봉사)~ 광주(요탄역)~ 양성(안성)~ 여양(홍성)~ 공주~ 전주~ 나주까지 피난길에 올랐다. 다행히 전란을 극복하고 개경으로 돌아와 고려의 튼튼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신경준의 산경표(山經表)에 나온 한북정맥길 불륜의 씨앗으로 태어나 왕에 오르기까지 이모 천추태후가 보내 온 자객으로부터 여러 번 목숨을 위협받다가 간신히 강조의 정변으로 왕위에 오른 힘없는 왕으로 시작하여 전란을 겪고 고려를 안정시킨 인간승리 현종이었다. 그가 대량원군 시절 목숨을 위협 받던 신혈사(神穴寺)는 진관사 서북쪽 둘레길 근처에 묻혀 있을 것이며 자신을 지켜준 진관조사를 위해 지어 준 진관사는 지금도 북한산 북녘에 웅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 용상사터도 진관사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야은 길재의 시조(時調)처럼 ‘인걸은 간 데가 없다.’ 하산 길 400여m 내려오니 새롭게 지은 요즈음의 용상사가 자리하고 있다. 일주문도 번듯하고 세웠고 법당도 번듯하게 세웠다. 법당에는 대웅전이라 편액(片額)하였고 주불은 아미타불을 봉안하였다. 아미타불 곁에는 호분(胡粉)을 칠한 자그마한 흰색 여래가 앉아 계신다. 용상사터에서 발굴된 ‘正統十年乙丑五月OO'이라는 명문(銘文)이 기록된 부처상인데 정통은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로 1445년(세종 10년)에 조성된 것이다. 대웅전 기둥에는 네 줄의 주련(柱聯)이 걸려 있다. 잘 읽혀지지가 않는다. 집에 돌아와 자료를 찾아본다. 주련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었다. 月巢鶴作千年夢(월소학작천년몽) 달 비친 둥지에 학은 천년 꿈을 꾸고 雪屋人迷一色空(설옥인미일색공) 눈 덮인 초옥에 사람은 색공으로 미혹하네 座斷十方猶點額(좌단십방유점액) 앉아 시방세계를 끊어도 여전히 미진하니 密移一步看飛龍(밀이일보간비룡) 한 발자국 슬쩍 옮겨 나는 용을 보시게나 앉아서 무얼 안다 하지 말고 슬쩍 움직여 보란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다. 용상사를 벗어나면 좌측 산쪽으로 새롭게 단장한 깔끔한 포장도로가 언덕을 향해 뻗어 있다. 그 길로 올라 본다. 파주시민을 위한 지하수원지이다. 지상에는 넓은 공원을 갖추어 놓았다. 동쪽 능선으로는 산으로 향하는 등산로가 이어져 있다. 이 등산로길 잠시 오르면 지능선길에 닿는데 이정표가 붙어 있다. 정상 1.7km, 약수터 80m. 고개를 넘어 약수터로 내려 간다. 수량도 풍부하고 물맛도 좋다. 산쪽 방향 큰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잠시 공장지역을 지나고 툭 터진 넓은 터에 한옥(韓屋)으로 지은 건물들이 보인다. 용주서원(龍洲書院)이다. 이 고장 출신으로 조선 중기 청백리인 휴암 백인걸(白仁傑)선생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이 지방 유생들이 선생의 집터자리에 세웠는데(선조 31년,1598년) 그 후 폐쇄되었다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그 자리에 세웠던 유허비(1862년, 철종 13년)가 지금도 서원 좌측 담 옆에 있다. 지금의 서원은 1924년 이 지방 유생들이 다시 지은 것이다. 파주 향토유적 1호로 보호되고 있다. 기왕이면 선생의 훌륭한 업적이나 덕행을 살필 수 있는 자료가 함께 비치되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단순히 건물만 보는 것은 의미가 반감된다.
고려왕이 피난길에 머문 용상사 길을 따라 내려오면 좌로 월롱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방학 중이라 교정은 고요하기만 하다. 길을 따라 내려오면 덕은2동사무실(경로당)을 지나 버스가 다니는 간선도로에 닿는다. 이 길을 따라 덕은 3동 방향으로 작은 고개를 넘는다. 1km쯤 걸었을까 길 옆으로 ‘全義李氏 十三世 襄胡公世阡’(전의이씨 13세 양호공세천)이라 쓴 우뚝한 자연석 비석을 만난다. 그 뒤로는 고목 은행나무가 서 있고 단아한 재실도 자리잡고 있다. 이곳이 전의 이씨 양호공의 세거지(世居地)라는데 500년이나 되었다는 은행나무는 너무도 청청하다. 전의, 예안이씨는 고려 개국공신 이도(李棹) 공(公)의 후손이다. 재실의 정문에는 영인문(迎仁門), 사당에는 인경재(仁敬齋)라 편액하였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조선 세종조 때 이효종공정간(李孝靖公貞幹)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세종은 친히 거둥하여 ‘家傳忠孝 世守仁敬’(집안에는 충효가 전해지고 대대로 인경이 지켜지다)라는 글을 내렸다. 이후 전의이씨 집안에서는 이 글을 가훈으로 삼았다. 편액은 이 글을 살린 것이다. 전의이씨 재실을 떠나 잠시 내려오면 덕은 5동 4거리길에 닿는다. LCD단지로 이어지는 큰 길이 뚫려 있다. 길을 건너 LCD단지 방향으로 400m 정도 올라간다. 우측 산기슭 아래 여러 채의 신축 한옥들이 자리잡고 있다. 수원백씨(白氏) 곡산공(谷山公) 문중 묘소이다. 이 묘역 가운데에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그 입구에는 덕은리 지석묘 안내판이 보인다. 지석묘는 북방식(탁자식)고인돌로 산 중턱과 능선에 20여 기가 흩어져 있다. 주거지 움집터는 훼손되어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1965년 중앙박물관에서 발굴했다는데 그 때 측정한 탄소연대는 BC 7세기 유적이라 한다. 청동기시대에 이 지역에는 집단으로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은 다시 덕은리5리 사거리로 돌아오면 된다. 금촌으로 가는 버스편도 있고 파주역도 눈으로 보이는 거리이며 택시를 타도 역까지는 3000원 남짓이다. 파장하기 전에 금촌장으로 가 파주막걸리 한잔 맛보아야겠다. 교통편 경의선 금촌 하차~ 환승 09번, 25번 버스 LCD기숙사정류장 ~ 환승 22번 버스 용상골 하차 (금촌행 버스노선은 광화문 구파발 일산 등지에서 다수 있음) 걷기코스 LCD기숙사~ 월롱산(성)~ 용상사터~ 요즈음 용상사~ 수원지공원~ 샘터~ 용주서원~ 전의이씨재실~ 덕은리 지석묘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