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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 미술 평론] 보기 싫은 걸 왜 미술은 보여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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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59호 이문정(조형예술학 박사, 미술평론가, 이화여대/중앙대 겸임교수)⁄ 2015.12.03 08:5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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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글·이문정(조형예술학 박사, 미술평론가, 이화여대/중앙대 겸임교수)) 지난 10월 미아리 집장촌에 위치한 ‘더 텍사스 프로젝트’에서 ‘알로호모라! 아파레시움!’이라는 전시가 열렸다. 전시 제목은 해리 포터 시리즈(Harry Potter series)에 나온 말로서, ‘알로호모라(Alohomora)’는 잠긴 문이나 창문을 열어주고, ‘아파레시움(Aparecium)’은 감춰지거나 숨겨진 것을 나타나게 하는 주문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전시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어온 집장촌이라는 낙인(烙印, stigma)의 공간을 드러내고 의미를 전환시키며 건강한 소통을 이뤄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전시된 작품들은 집장촌의 흔적을 드러내고 사회를 풍자하는 동시에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을 노래했다. 미아리 집장촌이 예술가들과 만난 것은 독립문화공간 ‘더 텍사스 프로젝트’가 개관한 2013년 8월부터이다. 예술가들은 의미의 전환이 불가능해 보이는 공간을 예술을 통해 전환시키고자 했다. 사회적 낙인의 공간에도 예술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경계를 조금이라도 지워내기를 원했다. 

이처럼 언젠가부터 미술은 미술관과 갤러리라는 공인된 전시 장소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평범한 일상의 장소뿐 아니라 거부감이 들고 기피되는 장소를 찾아갔다. 숨겨진 공간을 들춰냈다. 기대되지 않는 장소에서 진행되는 예술 행위의 많은 경우는 의미의 전환과 재생, 치유, 소통이라는 공공성의 맥락에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오늘날의 예술이 가진 긍정적인, 중요한 역할이다. 

현재의 미술이 기대되는 행보를 벗어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주제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미술은 개인과 사회의 숨기고 싶은 어두운 면을 부각시키고, 망각되고 회피되어온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성(性)과 관련된 금기와 트라우마(trauma) 같은 주제뿐 아니라 인간이 자행해온 모든 파괴적인 행동과 그 결과들, 비극의 역사들, 인간이 가장 지우고 싶어하는 죽음과 소멸까지도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향해 폭풍처럼 밀려왔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들을 전달하기 위해 저속하고 혐오스럽거나 잔혹한 이미지와 재료들이 전시장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전시 공간의 변화보다 훨씬 더 강한 불편함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아름다운 걸 볼 시간도 부족한데…”

혹자는 아름답고 좋은 것만 보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왜 이런 것들까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봐야 하냐고 불평을 쏟아낸다. 예술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비판도 있다. 일부 사람들은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끔찍하고 기괴한 작품으로 낙인찍고 이해하기를 포기한다. 

물론 그러한 이야기도 백번 공감이 간다. 미술을 감상하는 데에 있어 개인의 취향은 중요하다. 누구나 자유롭게 작품을 감상하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왜 작가들이 이러한 작품을 만들어내며, 이토록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불편한 작업들이 지속적으로 전시되고 이야기되는지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이에 대한 이론적 근거들은 다양하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채 미화하고 회피하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저항, 편견과 고정관념의 폭로, 규정된 이상적인 미(美)에 대한 반발, 예술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추구하며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했던 모더니즘(modernism) 미술에 대한 비판, 삶으로부터 분리된 예술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실현하기 위한 시도 등이 그것이다.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같은 이론가들은 비천한 것들이 어떻게 예술적으로 승화되고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근거를 제시해주는 대표적인 이론가들이다. 그러나 굳이 이러한 전문적인 지식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낙인찍고 밀어냈던 불편한 작업들과의 공감대 형성을 시도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라리오뮤지엄에 설치된 레슬리 드 차베즈의 ‘야수의 복부 아래서’ 설치 모습. 사진 = 왕진오 기자

이미 오래 전 이야기이지만 마크 퀸(Marc Quinn)의 ‘자아(Self)’(1991년)를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자신의 피를 얼려 만든 자화상,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정원(Garden)’(2000년) 같은 그의 다른 냉동 조각과 대리석 초상 조각, 무지개 조각 등을 알게 되었고 도록에 실린 그의 작업 노트들을 읽게 되면서 오해를 풀 수 있었다. 

퀸은 삶과 죽음, 미와 추 같은 이분법적인 대립항의 구별을 거부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는 동시에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의 모호함을 비판한다. 동시에 ‘자아’는 자신의 몸에서 사라진 4500g의 혈액을 다시 만들어내는 인간의 생명력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안드레 세라노(Andres Serrano)와 크리스 오필리(Chris Ofili)의 작품 속 배설물들은 다양한 문화적 관점을 무시하는 획일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다양성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채프먼 형제(Jake and Dinos Chapman)의 잔혹한 미니어처 인형들은 전쟁, 인종 차별 등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도구가 된다. 

작품의 주제-소재-전시장을 바꿈으로써
세상의 다양한 방식을 이야기하는 작가들

이들이 다루는 주제는 모두 편하지 않은 것들이다. 지우고 싶은 상처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우리의 일부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 우리의 세상은 진정으로 아름다워질 수 있다. 한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물방울무늬(polka dot)로 유명한 야요이 쿠사마(Yayoi Kusama)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의 인상은 예쁨, 발랄함과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물방울무늬는 쿠사마 자신까지도 뒤덮어버리는, 그녀를 아프고 고통스럽게 하는 강박신경증에 의한 환각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게 작품에 찍었던 낙인들을 지워야만 했다. 

미술은 더 이상 무균실에 존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인간 존재의 고뇌, 사회의 아픔을 함께 하기를 원한다.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지워지는 세계의 부분들을 되살리고자 한다. 세계에 대한 통찰과 저항인 것이다. 인간의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고 받아들이는 것은 진실된 삶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예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의미 있으며 살만한 것’이라고 말하기를 잊지 않는다. 

역사, 로맨스, 공포,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을 이야기하듯이 작가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과 세상, 그리고 예술을 이야기한다. 이제 용기를 내어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려고 하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 놓기 위해 찾아간 낯설고 새로운 공간에 발을 들여 보는 것도 괜찮은 경험이 될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한 번 들어보고 판단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정리 = 최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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