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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윤기 변호사의 법 이야기] ‘땡처리’ 항공권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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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65호 고윤기 로펌고우 변호사⁄ 2016.01.14 08:58:45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고윤기 로펌고우 변호사/서울지방변호사회 사업이사) 주말 저녁에 TV를 보다가 우연히 홈쇼핑 채널을 보게 됐습니다. 마침 유럽 여행 패키지 상품을 팔고 있었는데, 혹여나 아내가 볼까 재빨리 채널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다른 홈쇼핑 채널에서 이번에는 동남아 리조트 여행 상품을 팔았습니다.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신문 하단의 광고 지면에는 여행사의 여행 상품 광고가 빽빽하게 게재되곤 했습니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유럽 10개국 8일’이란 식으로 게재된 광고를 보면서 여행하는 상상을 하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새 홈쇼핑에서 영상과 함께 여행할 지역을 소개하면서 상품을 판매하는 걸 보니 좀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결제 버튼에 손가락이 올라가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홈쇼핑이 판매하는 여행 상품은 보통 우리가 항공권을 구매하고, 호텔과 리조트를 예약하고, 개인적으로 차량을 빌리는 가격보다 훨씬 저렴합니다. 어떤 여행 상품은 항공권보다 싼 가격에 호텔과 관광 코스가 모두 포함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여행 상품에는 쇼핑 옵션이 포함됐다든지 대량 구매에 따라 할인되는 등 가격이 싼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은 항공권 가격입니다.

여행사는 특정 항공사와 일정 기간 일정 수의 좌석을 미리 확보해놓는 계약을 합니다. 여행사 입장에선 그 기간에 좌석을 판매하지 못해도 해당 좌석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이를 ‘항공 하드블록(hard block) 계약’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드블록 계약이란 여행사가 항공사와(또는 여행사 사이에서) 계약을 체결하면서 좌석 이용 조건을 비교적 엄격히 정해 이뤄지는 항공 좌석 공급 및 운영 형태를 말합니다.

이 계약이 이뤄진 후에는 해당 좌석에 대한 취소나 환불, 양도를 할 수 없거나 상당히 제한적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항공사의 경우, 하드블록 계약을 하면 항공기를 운항하기만 하면 좌석이 판매되지 않아 공석이라 하더라도 항공권 대금을 지급받을 수 있습니다.

가끔 ‘땡처리’라고 나오는 특가 항공권은, 이 하드블록 계약으로 확보했지만 여행사가 미처 팔지 못한 항공권입니다. 여행사는 공석인 채 그대로 내버려두면 손해이기 때문에 여행사가 구입한 가격보다 낮게라도 팔아야 합니다.

물론 이렇게 싸게 파는 항공권을 우리가 쉽게 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워낙 비정기적으로 판매되기 때문에 땡처리 표를 구하긴 매우 어렵습니다.

필자가 예전에 맡았던 사건 중 ‘하드블록 계약’ 관련 사건이 있었습니다. 2008년 당시 이 사건을 의뢰한 여행사는 태국의 S항공사 좌석을 구매하는 하드블록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정확하게는, 규모가 큰 여행사가 S항공사와 좌석에 대한 하드블록 계약을 체결하고, 필자의 의뢰인이 다시 이 대형 여행사와 계약을 체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2016년 신정 연휴를 맞아 짐 부치는 승객들로 붐비는 영종도 인천공항 출국장. 사진 = 연합뉴스

문제는 2008년 말경에 발생했습니다. 당시 태국은 여러 문제로 치안과 정세가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그해 11월 태국의 반정부 시위대가 돈므앙 국제공항과 수완나품 국제공항을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항공 좌석 미리 확보하는 하드블록 계약 분쟁

이에 따라 태국의 항공기 운항은 마비 상태였습니다. 여행객들은 발이 묶여 며칠씩 움직일 수 없었고, 이 과정에서 일부는 숙박비, 식비, 교통비 등 추가 비용을 직접 부담해야 했습니다. 당시 신문을 보면, 이런 여행객들 중에는 태국 공군의 허가를 얻어 공군 비행장을 이용하거나 파타야까지 가서 임시 항공편으로 귀국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태국 여행이 재개된 것은 2008년 2월경입니다. 하지만 이때는 우리나라도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고, 관광객들도 불안한 치안 때문에 태국으로 여행가는 것을 꺼렸습니다. 이로 인해 태국 관광 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필자의 의뢰인이 계약한 S항공사도 그랬습니다. S항공사는 재정난으로 파산 지경에 이르렀고, 공항 이용료를 내지 못해 인천공항에 있던 항공기가 압류돼 운행이 불가능했습니다.

보통 하드블록 계약은 항공기 좌석 가격에 상당하는 액수를 보증금으로 지급하는데, 제 의뢰인은 우리 측과 S항공사 사이에서 중간 다리 역할을 한 대형 여행사에 이미 보증금을 지급한 상태였습니다.

의뢰인은 태국 사태로 인해 항공기 운항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대형 여행사에게 보증금 반환을 청구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형 여행사가 의뢰인 측이 여행 상품 판매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하드블록 계약이기 때문에 보증금을 몰취하겠다고 나서면서 결국 소송으로 이어졌습니다.

2년 가까이 계속된 소송 끝에 제 의뢰인은 보증금을 반환하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판결의 요지는 “하드블록 계약은 항공기가 정상적으로 운항되고 항공권이 발권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항공사의 사정 등으로 항공기가 운항되지 못하는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리 = 안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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