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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의 요즘 미술 읽기] ‘아름답지 않은’ 자연으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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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71호 이문정(조형예술학 박사, 미술평론가, 이화여대/중앙대 겸임교수)⁄ 2016.02.25 08:5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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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이문정(조형예술학 박사, 미술평론가, 이화여대/중앙대 겸임교수)) 

3. 문명 대신 자연   

작년 12월, 우리는 유래 없이 따뜻한 겨울을 보냈다. 그러나 새해가 시작된 후 갑자기 15년 만의 기록적인 한파가 몰려와 전국이 얼어붙었고, 폭설로 비행기가 결항돼 많은 사람들이 고립되기도 했다. 2월 초순인 지난주는 이른 봄을 기대할 정도로 훈훈했지만 주말이 되자 또 한 번의 강추위가 몰려왔고 일부 지역에는 한파 특보가 발효됐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변덕스러운 날씨를 견뎌야 했다. 앞으로 이상 기후가 더욱 증가할 것이라는 관측이 계속되고 있다. 고온과 한파, 가뭄과 폭우 같은 이상 기후는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기상 변화로 인한 자연 재해, 새롭게 등장하는 질병들은 전 세계가 직면한 문제다. 인간이 자연에 관심을 기울어야 할 때임은 분명하다.

미술을 이야기하는 글을 날씨 이야기로 시작했다. 자연을 담아내는 작품들을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자연은 오래 전부터 미술의 소재로 사용돼 왔다. 낭만주의(Romanticism), 바르비종파(École de Barbizon)와 인상주의(Impressionism)는 풍경화라는 장르를 발전시킨 대표적인 미술사조다. 모더니즘 시기의 미술가들 중 일부는 문명에 대비되는 원시성을 추구하며 자연의 모습을 담아내기도 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기에 이미 훌륭하고 아름다운 산수화들이 그려졌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하려는 미술은 이들과 다르다.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근거하여 문명 속 인간에 의해 관찰되는 객체도 아니고, 이상향을 꿈꾸기 위해 혹은 누워서 절경을 유람하는 와유(臥遊)를 위해 그려진 자연도 아니다. 

▲황민규, ‘반복될 줄무늬’(2015), ‘단지 종속될 뿐이다’(2015). 유기견 털, 시멘트, [제 3의 과제전] 설치 모습. 사진 제공 =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최근 들어 전에 없던 새로운 방식으로 자연에 눈을 돌리는 미술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연을 통해 인간 중심주의를 반성하고 환경에 대한 위기의식을 전달한다. 한국 여성 미술의 대모라 불리는 윤석남은 2008년 나무를 깎아 1025마리의 유기견을 제작하고 그들의 넋을 기렸다. 유기견들은 모이고 모여 숲을 이루었고 슬픔에 빠진 자연이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동물도 상품으로 둔갑시켰다. 팔리기 위해 태어나고, 소비되며, 쓰레기로 버려지는 동물들은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안하무인적 태도를 보여주는 극명한 증거다. 윤석남이 2013년에 진행한 개인전의 제목을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로 지은 것 역시 인간의 독재적인 태도에 묵묵히 저항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소나무가 소나무라 불리기를 원했을까? 인간은 알지 못한다. 그 이름은 그저 인간의 편의를 위해 붙여진 것이다. 우리는 한 번이라도 자연을 중심에 놓고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자연 보호’라는 단어도 지극히 인간중심적이지 않은가? 생각해볼 일이다. 

황민규는 도시의 삶과 자연의 연결점으로 유기견을 선택했다. ‘제 3의 과제전’(2015)에 전시됐던 작품 ‘반복될 줄무늬’(2015)는 인간이 일방적으로 만들어낸 문명과 자연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잔혹한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유기견 보호소에서 자원 봉사를 하는 작가는 청소 중에 모은 강아지 털로 추상 미술을 완성했다. ‘단지 종속될 뿐이다’(2015)에서는 강아지 털과 시멘트가 섞인 벽돌을 제작했다. 추상 미술은 진보와 발전의 상징인 모더니즘 시대를 대표하고 벽돌은 도시 건축을 상징한다. 인간의 문명은 자연의 희생 위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인간의 종속물로 존재하는 자연에 가해지는 폭력은 무한히 반복된다. 

▲윤진숙, ‘풀과 바람’(2015). 한지에 먹, 분채, 콩즙, 67 x 143cm, 사진 제공=윤진숙 작가

사실 자연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이 세상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요란하게 자연을 보호하겠다고 생색내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치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새로운 관계맺음을 위해 미술가들은 숭고함을 체험시키는 장대한 자연이나 정복해야 하는 자연이 아닌, 평범한 자연의 모습에 눈을 돌린다. ‘자연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을 체현하고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순환과 재생의 진리를 느끼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작업들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정감과 온기가 느껴지는데, 그것은 작가들이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이자 그에 대한 자연의 응답이다.  

애완견(인간화된 자연)과 유기견(망친 자연) 사이를 헤매는 인간들

따뜻하고 온유한 자연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 작가로 페이퍼 커팅(paper cutting) 작업을 하는 유켄 테루야(Yuken Teruya)를 들 수 있다. 테루야는 낡은 지폐, 신문지, 쇼핑백 등을 오려 나무와 풀들을 심는다. 쉘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 The Giving Tree’(1964)를 잘라 만든 나무들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은유하며 인간의 자만과 욕심을 부끄럽게 한다. 현대인들은 걱정한다. 자연이 예전 같지 않다고, 병들었다고. 그리고 외친다. 인간은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고.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인간은 틈이 날 때마다 병든 자연을 찾는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도, 심지어 치유 받는 것도 인간이다. 자연은 그냥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줄 뿐이다. 한편 길 위의 풀과 잡초, 들꽃을 그리는 윤진숙의 작업은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맡기는 자연을 느끼기 위한 것이다. 인간이 머무르는 곳에 언제나 가득한, 과잉의 휘황찬란한 인공미는 이제 폭력으로 다가온다. 콩기름을 발라 건강한 윤기가 흐르는 한지 위에 자라나는 풀들은 꿋꿋하다. 그러나 부드럽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처럼, 풀 사이를 흘러가는 바람처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자연이다.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를 중요시하는 생태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미술가들이 자연을 위해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 스스로 그러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조금은 자만심을 버리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자연을 느껴보는 것을 어떨까. 

(정리 = 최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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