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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놀러도 못간 내 차, 이제 늙어 예술이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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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76호 안창현 기자⁄ 2016.03.31 08:59:43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4월 21일까지 진행하는 ‘브릴리언트 메모리즈: 동행’. 사진 = 현대차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안창현 기자) 자동차와 함께 한 순간들은 삶의 추억이 된다. 그래서 마이카는 삶의 동반자이자 인생의 소중한 경험을 함께 나누는 반려이기도 하다. 이렇게 삶과 맞닿아 있는 자동차가 예술가의 상상력을 입고 현대미술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현대자동차가 서울시립미술관과 공동기획으로 전시 ‘브릴리언트 메모리즈(Brilliant Memories): 동행’을 개최했다. 현대차는 이번 전시를 위해 자신의 애마를 폐차시킬 예정이거나 또는 중고차로 팔 사람들의 사연을 응모 받았다. 그 중 8명의 사연이 선정됐고 그들의 자동차는 작품이 됐다. 응모 받은 사연 이외에 탈북 새터민들의 자동차 관련 사연도 작품이 됐다. 

사연 1.

“처음이란 말처럼 설레는 것이 또 있을까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 발을 뗀 1994년 만난 첫 차, 유로 엑센트와 함께 한 지 어느새 23년이 되었습니다. 월급 대부분을 차 할부금에 쏟아 부으며 구매한 이 차는 저의 발이 돼 전국을 수없이 누비며 고락을 함께한 파트너였습니다. 몇 년 후 결혼하게 된 아내와의 연애를 책임져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중학교 2학년이 된 딸에게 엑센트는 단순한 차가 아닌 첫 자동차 친구이자, 아주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49살이 된 저처럼 엑센트도 나이 들어가며 아픈 구석이 잦아졌네요. 여러 번 이별을 고민했지만, 우리 가족 곁에서 모든 ‘처음’을 함께해준 엑센트와는 도저히 헤어질 수 없어서 어느덧 23년째 함께 하고 있습니다.”

사연 2.

“무일푼으로 결혼해 올해 30주년을 맞은 우리 부부에게, 듬직한 복덩이로 17년을 함께 달려준 포터입니다. 가난한 집안 장남이었지만 천성이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가정적이던 남편이 20여 년 전 일어난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수술하며 인생의 고난을 겪게 됐습니다. 

36개월 전액 할부로 구입한 중고 포터로 할 수 있는 일은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가족 여행이라고 꼽을 추억도 아이들에게 만들어주지 못하고 그저 일에 빠져 아등바등 살았지만, 그래도 이제 빚도 갚고 내 집 장만도 했습니다. 이곳저곳 아픈 곳이 늘어나는 포터를 보며 짠한 마음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네요.”

전시장 한켠의 아카이브 실에는 작품의 주인공이 된 자동차 주인들의 이런 사연들이 하나하나 소개돼 있다. 그 사연들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자동차 추억들을 고백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후 월급을 쪼개가며 구입한 엑센트를 처분하지 못하고 23년 동안 함께한 사연은, 이번 전시에서 김상연 작가의 ‘길’이라는 설치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작가는 엑센트의 차체부터 계기판, 핸들, 손잡이, 기어까지 손때가 묻은 차량의 부품들을 뫼비우스의 띠 형태로 재구성했다.

▲이주용 작가의 ‘창 너머의 기억(Memories, Beyond the Window)’ 전시 전경. 사진 = 현대차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채하 큐레이터는 이 작품에 대해 “차 주인은 첫 차와 함께 창업과 청춘을 시작했고, 가족의 탄생까지 20여 년을 함께 했다. 이를 설치작품으로 만든 작가 역시 유행에 휩쓸리기보다 단단하게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심화시켜왔다. 작가와 차주의 호흡이 상통한다”고 설명했다.

박문희 작가의 ‘사막에서 핀 생명’은 환갑을 넘긴 노부부의 삶을, 2000년식 포터로 표현했다. 사연에서 보듯, 생활이 막막하던 시절 “트럭 하나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남편 말에 구입한 중고 트럭이었다. 노부부에겐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결국 내 집 마련까지 하게 만든 원동력이자 든든한 복덩이였다.

▲김승영 작가의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Where Are You)?’ 제작 과정. 사진 = 서울시립미술관

박문희 작가는 “운전석과 적재함을 오가며 많은 시련과 노고를 겪었을 노부부에게 그 끝에 찾아온 행복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이 낡은 트럭을 이용해 거친 사막의 척박함을 뚫고 자라나는 생명의 이미지를 재현했다”고 말했다.

자동차에 얽힌 추억이 작품으로

현대자동차는 이번 전시를 위해 지난해 말부터 자동차에 얽힌 다양한 추억 사연을 공모했다. 그리고 이렇게 선정한 사연들이 12점의 작품으로 거듭났다.

현대자동차 측은 “사람과 자동차가 함께 하는 시간이 ‘인생의 행복을 나누는 소중한 친구와의 동행과도 같다’는 의미에서 이번 전시의 콘셉트를 동행으로 정했다”고 밝혔다.

국내외를 오가며 드로잉, 퍼포먼스, 조각, 설치, 비디오 등 다양한 예술적 실험을 해오고 있는 김기라×김형규, 김상연, 김승연, 김진희, 민우식, 박경근, 박문희, 박재영, 이주용, 전준호, 정연두, 홍원석 등 12명 작가가 참여했다.

▲김기라×김형규 작가의 ‘잘자요 내사랑!!(Good bye my love Tra!!)’ 전시 전경. 사진 = 서울시립미술관

작가들은 자동차를 주제로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였다. 자동차와 관련된 특별한 사연들을 토대로 한 작품이 큰 줄기를 이뤘다. 앞서 소개한 김상연, 박문희 작가의 작품 이외에도 작가들은 자동차에 얽힌 개인의 소중한 추억을 작품화했다.

김기라, 김형규 작가는 협업으로 낡은 엘란트라에 얽힌 한 남자의 첫사랑 이야기를 두 편의 영상과 조각으로 만들어냈다. 또 김진희 작가는 자녀 셋을 키워온 한 가정의 사연이 담긴 싼타모의 차내 라디오를 미세한 단위로 분해-재조립해 가족의 추억을 회상하는 공간으로 재구성했다. 자동차를 매개로 형성된 가족의 관계들을 되새긴 작품들이다.

자동차와 함께 한 추억에서 환기되는 정서에 주목한 작품도 있다. 이주영 작가는 홀로그램과 깃털을 이용해 자동차를 꿈과 판타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비밀스런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박주영 작가 또한 쏘나타를 물려준 어머니에 대한 사연을 바탕으로, 어린 시절의 향수와 가족 관계에서 일어나는 복합적인 감정을 공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작품을 내놨다.

▲홍원석, ‘블랙스타(Blackstar)’. 1채널 영상, 개조 차량, 가변 크기, 2016. 사진 = 서울시립미술관

작가 스스로가 자신의 자동차를 대상으로 삼은 작품도 흥미롭다. 김승영 작가는 자신이 직접 몰던 리베로 운전대를 수천 개의 나침반과 함께 설치해 작가로서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시각화했다.

“작가로서의 삶에서 늘 리베로가 나와 함께 해왔다. 운전을 하면서 창밖으로 미끄러지는 풍경의 속도는 작품에 대한, 삶에 대한 여러 생각을 하게 했다. 이 차를 이용해 작품의 재료를 구하고, 작품을 조립해 미술관에 설치하고 다시 철수를 하는 일을 수없이 했다”라고 김 작가는 말했다.

“그렇게 내 곁을 지켜준 차에 남다른 애정이 생길 수밖에 없고, 단순한 이동 수단 이상의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오랜 시간 작가로서의 삶을 지탱해준 동반자였다. 이런 차를 작품으로 남기고 싶었고, 그래서 이번 전시에 참여했다.”

“단순한 탈 것 아닌, 그 문화에 주목”

앞서 살핀 작업들이 자동차를 개인적인 혹은 사적인 차원에서 다뤘다면, 좀 더 공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자동차를 바라보는 작업들도 있다.

▲이주용, ‘창 너머의 기억’(부분). 메탈, 인조털, 합판, 홀로그램, 레이저, 플라스틱 꽃, 180 × 450 × 190㎝, 120 × 100 × 160㎝, 2016. 사진 = 서울시립미술관

박경근 작가는 현대자동차 제조공장 내부를 촬영한 영상 작업을 통해, 한국의 산업화를 상징하고,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가까운 미래의 산업 구조를 보여줬다. 

홍원석 작가는 직접 자동차를 운전해 지역 주민들을 태우고 다니는 체험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이처럼 자동차는 산업화의 상징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탈 것으로서 관계 형성의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보통 사람들에게 자동차가 삶의 동반자이듯, 작가들에게는 예술적 영감의 동반자가 되기도 한다.

정연두 작가는 1994년 탈북한 한 새터민의 이야기로 일련의 사진 사운드 설치 작품으로 제작했다. 자동차에서 비롯하는 남북한의 문화적 차이를 보여줘 관심을 끈다.

북에서 온 새터민은 남한 거리를 가득 메운 자동차에서 강한 첫 인상을 받았다. 북한의 대도시 함흥에서도 잘 볼 수 없던 고급 승용차들이 거리를 줄지어 달리는 것을 보고, 처음엔 남한 사람들이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탈북 새터민의 이 에피소드에서 출발해 정연두 작가는 1994년 당시 대중적이었던 현대자동차와 거리의 풍경들을 카메라로 다시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아크릴판에 1㎝ 간격으로 11개의 이미지를 겹쳐서 하나의 프레임 안에 재구성했다. 화면 안쪽에는 보이지 않게 오디오 시스템을 설치해 그 풍경에 대해 사연을 제공한 새터민의 인터뷰를 틀었다.

정 작가는 이에 대해 “이방인 혹은 맹인들의 시각 경험도 이런 효과가 있다. 애초에 실재와 허구, 시각과 착시, 현실과 가상 등 이분법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경험은, 작품 속에서 적어도 11개의 이미지 간극들 사이사이를 배회하는 또 다른 감각이 된다. 그러니까 그의 이야기를 듣는 청각처럼 다른 지각 경험을 필요로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에 마련된 아카이브 실은 각 자동차들에 얽힌 사연을 보여준다. 사진 = 서울시립미술관

이 외에도 두 세대의 인생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자동차로 키네틱 조각을 제작해 불완전한 현실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세대의 모습을 재현한 전준호 작가, 단단한 자동차와 대비되는 유연한 소재를 이용해 자동차 바퀴가 구를 때 만드는 자취와 풍경을 표현한 민우식 작가 등 자동차는 예술적 영감을 주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이번 ‘브릴리언트 메모리즈: 동행’ 전시는 서울 노원구 소재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4월 21일까지 진행한다. 서울 전시가 끝나면 5월 4일부터 8월 7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전시가 이어진다.

현대자동차 측은 “자동차에 얽힌 감동적인 사연이 예술가의 상상력을 통해 작품으로 거듭나 더욱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게 됐다”며 “자동차가 더 이상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닌,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스며든 중요한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고, 향후 삶의 일부로서 자동차와 그 문화를 적극적으로 알리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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