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내 신념을 지킬 것이다!” 루퍼스 그리스월드의 울부짖음이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그의 분노는 에드거 앨런 포를 향한다. 포는 19세기 미국의 시인·소설가·비평가로, '미국의 셰익스피어'로 불린 인물이다. 대표작으로 ‘황금 풍뎅이’ ‘검은 고양이’ ‘도난당한 편지’ ‘갈가마귀’ 등이 있다.
그리스월드는 포의 라이벌 작가이자 비평가였다. 포에게 앙심을 품은 그는 포에 대해 ‘약물중독증 환자’ ‘소아성애증 환자’ ‘시체애호증 환자’ 등 무수한 거짓말을 퍼뜨렸다. 포의 편지를 위조하는 짓도 서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뮤지컬 ‘에드거 앨런 포’는 포, 그리고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 그 시대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작곡가 에릭 울프슨의 유작으로, 한국에 초연되는 이번 작품의 연출은 노우성이 맡았다. 노 연출은 “에드거 앨런 포는 ‘미치광이’ ‘한 세기를 뛰어 넘은 천재’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다양한 모습을 지닌 포의 내면과 그의 작품을 통해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가난과 신경쇠약을 동반한 채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 첫사랑과의 아픈 이별 등 외롭고 어두운 삶을 살았던 무명작가 포. 어느 날 잡지사 사장의 요청으로 라이벌 작가 그리스월드의 새 작품에 대한 비평을 쓰게 되고, 이에 분노한 그리스월드는 조수 레이놀즈를 시켜 포의 불우한 삶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다.
포와 그리스월드 사이 갈등의 첫 시작은 ‘첫 대면’, 갈등의 고조는 ‘함정과 진자’, 갈등의 폭발은 ‘널 심판해’에서 각각 드러난다. 첫 대면부터 둘은 날이 서 있다. 포는 자신의 글에 대한 날선 비평이 담긴 그리스월드의 책을 보고, 이후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신경전을 벌인다. 그리스월드는 포의 시 ‘갈가마귀’를 듣고 그의 작품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고 분노하며, 신의 뜻에 따라 자신의 모든 걸 다 바쳐 포를 심판하겠다고 외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뭔가 익숙한 이미지가 포착된다. 그리스월드 역을 맡은 최수형과 윤형렬. 그들은 각각 ‘살리에르’와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무대에 선 바 있다. 최수형은 천재 모차르트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히는 살리에르를, 윤형렬은 지저스를 배신하는 유다를 연기했다. 특히나 최수형은 이번 ‘에드거 앨런 포’에서도 검은색 계열의 의상을 입는데, 살리에르에서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 세기를 앞선 천재 시인 포와 갈등하는 모습이 모차르트 뒤에서 울부짖던 살리에르의 모습과 처음엔 강하게 오버랩 된다.
평범한 사람이 천재, 또는 절대적인 자와 마주했을 때 인식하게 되는 자신의 초라함, 그리고 여기서 생기는 절망감, 나중에는 분노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살리에르와 그리스월드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살리에르가 절망감에 더 빠져들었다면, 그리스월드는 분노하는 과정에 더 집착한다. '살리에르'에서 살리에르가 극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모차르트와 화합하는 장면을 보여준다면, 그리스월드는 포가 죽고 나서도 "내가 옳다"고 끊임없이 외치며 분노한다.
절망하는 살리에르 vs 분노하는 그리스월드
최수형은 “살리에르와 그리스월드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인자의 비애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두 인물을 연기하며 차이점을 느꼈다”며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좋아해서 그에게 빠져들고 집착하게 됐다. 하지만 그리스월드는 자신의 신념을 전파해야 하는데, 이에 걸림돌이 되는 자유분방한 포를 그냥 두면 안 되겠다고 여기며 제지하려 나선다. 자신이 믿는 것만 바라보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포가 태어난 1809년은 미국이라는 국가가 태동한 시기다. 또한 남북 갈등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던 때였다. 이 가운데 포는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지 않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비평을 펼쳐 눈길을 끌었다. 포는 미에 대한 철학적 연구보다는 예술이 인생에 어떻게 표현되고 어떤 중요성을 가지는지 집중하는 유미주의를 추구했다. 그러나 당대 미국 문단엔 실용주의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리스월드에게 포는 자신의 신념을 방해하는 눈엣가시와도 같았을 터.
윤형렬은 그리스월드에 대해 “‘레미제라블’의 자베르와 같은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다가 지저스를 배신하긴 하지만 둘 사이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리스월드는 그보다 신념이 앞섰다. 포를 천재라 인정하면서도 신념 앞에서는 그럴 수 없는 것”이라며 “레미제라블에서는 자베르가 장발장을 체포하려는 과정에서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려 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런데 그리스월드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살이 아니라 상대방을 죽이는 방법을 택한다. 여러 감정이 혼합된 복합적인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품은 포의 문학 세계를 무대 위에 시각화한 특징이 있다. 김성수 음악감독은 포의 대표작 ‘갈가마귀’를 새롭게 작곡해 추가했다. 그리스월드의 신작 발표장에서 포는 자신의 신작 ‘갈가마귀’를 발표하는데, 원래 공연에서 내레이션 형태로 진행됐던 이 장면이 한국 초연에서는 드라마틱한 선율까지 추가된 무대로 재구성돼 색다른 매력을 더한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관객이 주목하게 되는 부분이 그리스월드의 분노다. 극 중 그리스월드가 하는 비열한 짓은 관객의 분노를 산다. 하지만 완전히 등을 돌리지 못하는 공감 요소가 분명히 있다.
과거엔 천재, 또는 1인자의 인생만 부각되는 이야기가 많았다. 스스로의 삶을 되새기기도 힘든 시절, 따라갈 선망의 대상을 찾기에 급급했다. 2인자는 주로 그런 1인자를 질투하고 방해만 하는 부정적 캐릭터로 비춰졌다. 1인자의 능력이 더 빛날 수 있기 위해 고통과 시련을 주는 서브 캐릭터 정도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1인자 뒤의 서러운 2인자의 삶에 주목하는 콘텐츠가 늘어나고 있다. 뮤지컬 ‘모차르트’ 이후 ‘살리에르’가 나왔고 이번에 포와 그리스월드의 갈등이 부각된 것처럼. 왜 그들이 서러울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에 접근하는 형태다. 분노부터 절망감까지 나타내려는 감정도 다양해졌다.
사실 세상엔 온통 범인(凡人)뿐이다.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도 앞에 서지 못하는 2인자의 비극과 열등감은 현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 ‘또 오해영’에서도 이런 모습이 포착된다. 이름이 같은 두 여주인공이 나오는데, 화려하고 예쁘고 집안 배경도 좋은 오해영보다 초라하고 평범한 오해영에 대중은 더 감정이입을 하고 응원을 한다. 멀리 동떨어지지 않은, 바로 내 이야기 같은 스토리에 친근감을 느끼고 감정 이입하며, 극 속에서라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현상이다.
2인자 스토리가 계속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뮤지컬 ‘에드거 앨런 포’는 천재 포와 그의 문학 세계, 그리고 그와 대립했던 2인자의 울분까지 껴안아 눈길을 끈다. 공연은 광림아트센터 BBCG홀에서 7월 24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