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서태지 음악이 뮤지컬에 과연 잘 어울릴까? 이른바 서태지 뮤지컬, 즉 ‘페스트’가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가장 먼저 든 의문이다. ‘페스트’는 실존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문호 알베르 카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서태지의 음악을 결합시킨 작품이다.
의학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시대, 원인불명의 불치병이 사라진 지 오래인 첨단도시 오랑에서 수백 년 전 창궐했던 페스트가 발병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이 펼쳐진다. 생각지 못한 재앙 앞에 시스템이 제공하는 풍요 속에서만 살아온 시민들과 완벽하게만 보였던 도시는 대혼란을 겪는다. 그 속에서 페스트에 대항해 살아남기 위한 천태만상의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의사 리유와 식물학자 타루는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나서고, 기자 랑베르는 처음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사를 쓰다가 변화를 겪는다.
손호영, 김다현, 박은석, 황석정 등 스타 캐스팅도 화제가 됐지만 무엇보다 화제가 된 것은 서태지의 음악을 기반으로 공연이 만들어진다는 점이었다. 故 김광석의 노래를 바탕으로 한 ‘그날들’이 흥행에 성공했고, 80~90년대 인기 노래들을 바탕으로 한 ‘젊음의 행진’도 꾸준히 관객들에게 사랑받으며 공연되는 등 대중가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콘텐츠는 늘 많은 관심을 받아 왔다. 특히 ‘페스트’는 서태지가 관심을 표한 공연으로 알려져 더욱 화제가 됐다.
일단 첫 번째 의문 해결은 성공적이었다. ‘테이크원’ ‘휴먼 드림’ ‘슬픈 아픔’ ‘죽음의 늪’ ‘시대유감’ ‘라이브 와이어’ 등이 관현악부터 록, EDM사운드까지 활용해 과감하면서도 너무 동떨어지지 않는 편곡으로 자연스럽게 무대와 조화를 이뤘다. 힙합부터 록, 메탈, 펑크, 발라드 등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성을 지닌 서태지의 음악이 무대 위에서 제대로 매력을 발휘하며 관객들에게 막힌 속이 뻥 뚫리는 듯한, 마치 사이다 같은 쾌감을 준다.
가사가 주는 힘도 무대에서 발휘됐다. ‘페스트’는 하나의 공화국으로 합쳐진 뒤 사회통제시스템에 의해 행동 하나하나, 결국엔 행복까지 통제받는 오랑시가 배경이다. ‘기억 제거 장치’ ‘욕망 해소 장치’ 등에 의존해 사람들은 불편함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시스템의 기준이 바로 개인의 삶을 좌우하는, 그야말로 섬뜩한 상황이다. 이 가운에 페스트가 발병되면서 사람들은 혼돈에 휩싸이고, 자신들을 외면하는 시스템에 의문과 저항 의식을 품기 시작한다. 부조리한 현실을 꼬집고 비트는 시대저항적인 의미가 강한 서태지의 노래는 이 상황과 맞물려 극적인 효과를 더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장면은 ‘죽음의 늪’이다. 페스트에 전염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벗어나려 해도 이제 소용없어. 늦어버린 거야. 우리는 다 죽을 거야!” 하며 처절하게 노래를 부르는데 마치 원래부터 뮤지컬을 위해 만들어진 곡인마냥 조화가 잘 이뤄진다. '시대유감'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의 죽음을 외면하는 코타르가 불러 더욱 섬뜩하다.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부러져버린 너의 날개로 너는 얼마나 날아갈 수 있다 생각하나" 등 가사 하나에 묵직한 의미가 들어 있다. 극 속의 상황과도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원래 있던 서태지의 노래 가사에 알베르 카뮈의 원작 소설 내용까지 맞춰야 했던 그 지점에 대한 고민이 느껴지는데, 노래와의 조화는 자연스럽다.
‘마지막 축제’의 경우 안타까움을 더욱 극에 살리는 방식으로 편곡됐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페스트로 죽어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또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가야 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보며 “너를 보내기 위한 춤을 추고 있어. 짧은 시간만이 남았어” 하고 노래를 부르는데 원곡과는 또 다른 매력을 무대에서 볼 수 있다.
원곡과 또 다른 매력의 서태지 노래가 무대에
급작스런 캐릭터 변화와 몰입 깨는 의상은 추후 변화 기대
무대 장치도 화려하다. 원작 소설과 달리 가까운 미래로 설정된 ‘페스트’에는 무대 전환과 영상을 활용한 구성이 눈에 띈다. 특히 영상이 다양하게 활용된다. 극 속의 기자 랑베르는 손가락에 기계를 낀 채 살짝 까닥이는 식으로 기사를 쓴다. 그가 쓴 기사는 영상으로 화면에 펼쳐진다. 리샤르 시장이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는 장면도 영상으로 펼쳐진다. 시대적 배경이 미래이다 보니 영상을 다채롭게 활용하려 한 노력이 색다르게 다가온다.
여기에 우울한 시대의 느낌을 더하는 세트들이 거대해 압도감을 준다. 높게 쌓인 철물 구조물부터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고 치료하는 의사 리유가 있는 병원, 식물연구자인 타루의 정원 등이 끊임없이 무대 위에 재현된다.
하지만 창작 초연인만큼 아직은 아쉬운 점도 눈에 띈다. 무대에 오른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캐릭터들의 감정 변화가 아직은 자연스럽지 않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랑베르가 기사를 쓰는 장면은 분명히 심각한 장면인데 관객들의 웃음이 터지곤 한다. 손가락을 움직이며 기사를 쓰는 듯한 제스처가 어색하기 때문. 아마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톰 크루즈가 손으로 영상을 휙휙 움직이는 듯한 이미지를 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되는데, 무대 위에서는 이 제스처가 구현되는 장면이 아직은 자연스럽지 않다.
의상도 아쉬운 부분이다. 미래라는 배경 하에 등장인물들의 의상이 통일성이 없이 각자 따로 노는 느낌이다. 오히려 영화 '아일랜드'의 복제인간들의 의상처럼 심플한 버전으로 갔으면 통일성도 갖추고, 더욱 극에 몰입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중 가장 아쉬운 건 타루의 의상이다. 환자들을 치료할 때는 어깨 부분에 구멍이 뚫린 흰 천을 두르고 나오는데, 혼자 동떨어진 시대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처럼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창작 초연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개선될 여지가 있다는 부분은 긍정적이다. 또한 다소 생소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안정을 추구하지 않고 다각도의 영상 활용과 서태지 음악의 조화 등 여러 시도를 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응원을 보내고 싶다. 아직 첫 발걸음을 뗀 지 얼마 안 되는 공연이기에, 추후 아쉬운 점을 보완해 더욱 성장할 모습도 궁금해진다. 새로운 스타일의 공연을 통해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공연은 LG아트센터에서 9월 3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