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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큐레이터 9인 ② 서울시립미술관 신은진] 대중성과 미술 담론 사이에서 균형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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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24호 윤하나⁄ 2017.03.28 17:58:39

▲'서울 바벨' 전시 모습. (사진=조재무,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두 번째로 만난 기획자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신은진 큐레이터다. 신 큐레이터는 공공미술관에서 시민과 미술계 종사자들의 눈을 동시에 사로잡는 이색적인 전시들을 기획해왔다.

 

가수 지드래곤의 전시와 홍대 인디음악 씬의 20년을 한 곳에서 펼쳐 보이는가 하면, 한국 1세대 전위작가 김구림 선생을 재조명하고, 서울 내 신생공간을 제도권 미술관 안으로 불러 모으기도 했다. 미술관의 역할과 방향 속에서도 자신만의 관심사를 도전적으로 실현해온 신은진 큐레이터를 만났다

    

▲신은진 큐레이터.

 

“제도권 미술관이 고리타분? 소모적인 비난은 사양”


- 지난 몇 년간 시립미술관에서 진행한 전시들이 꾸준히 화제를 불러 모았다. 진행했던 전시들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 달라.


공공성과 전문성의 영역을 50:50으로 놓고 그 간극을 오가는 큐레이팅적 실험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공공미술관에서 미술계 관계자들의 흥미를 끌면서도 대중성을 유념하는 방식으로 전시를 준비하면서 체득한 방법론이다. 실제로 서울시립미술관의 방문객 10%가 미술계 종사자들이라면 나머지 90%는 시민이다. 그래서 둘 사이의 균형 감각이 필수적이다. 특히 일반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제도권 내의 구태의연한 포맷이 있다고 하면, 오히려 그런 편견 또는 단단하게 굳어진 생각들을 교묘하게 다른 방향으로 보게끔 유도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전시를 만드는 편이다.


예를 들면, ‘행복의 나라전의 경우, 민중미술을 역사화-사료화하기보다 시의적 주제를 중심으로 여전히 반복되는 역사의 기시감을 드러내고자 했다. 작품의 캡션을 가리고 보면, 90년대 플라잉 시티와 2000년대 믹스라이스, 2010년대 리슨투더시티의 작업의 주제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80년대의 민중미술과 90년대 포스트 민중미술은 비교적 멀지 않은 과거의 사조이기 때문에 미술적 재평가를 내리거나 담론을 이끄는 방식보다 2016년 현대의 시점에서 민중미술의 시의적 주제를 다른 시각을 보여주려 노력했던 것 같다.”


▲권오상 작 ‘무제의 지드래곤, 이름이 비워진 자리’. 성미카엘 대천사가 악마와 싸우는 유명한 도상에 지드래곤의 모습을 대입했다. (사진=서울시립미술관)


- ‘피스마이너스원’, ‘서울 바벨’, ‘행복의 나라등 특히 이슈가 됐던 전시들이 눈에 띈다. 이슈메이커라는 수식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웃으면서) 절대 동의할 수 없다. 나는 해당 전시의 담당자일 뿐이다. 이전엔 기관 소속의 큐레이터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대가 바뀌며 개별 큐레이터가 조명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피스마이너스원전시의 경우, 지드래곤의 소속사 ‘YG’의 사무실이 홍대에 20년 가까이 터를 잡고 있다. 홍대의 인디밴드들을 함께 놓고 보면, 대중성과 서브컬처의 성격이 섞여 있는 이중적인 모습이 홍대의 문화적 단면처럼 보였다.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전혀 다른 문화 현상을 한 공간에서 보여주기 위해 지드래곤의 피스마이너스원옆에 서브컬처: 성난 젊음전을 함께 기획했다.

 

당시 옵티컬 레이스와 정세현이 90년대부터의 대중문화 키워드를 연대기로 만들고, 6학년 때부터 테이프 하나를 사기 위해 인천에서 홍대로 왕복 4시간을 오갔던 박다함 작가의 음악 관련 수집품들을 전시했다. 홍대 앞 문화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변모한 박다함은 두리반투쟁에 가담하고 자립음악생산조합을 결성하는 등 음악을 저항의 용어로 사용했다. 결국 서브컬처전은 공간-젠트리피케이션의 이야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음악 하는 사람들이 계속 공간에서 밀려나면서, 홍대는 더는 문화를 생산하는 공간이 아닌 소비의 공간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의 아이콘인 지드래곤의 피스마이너스원전시도 열심히 준비했는데, 비평보다 이슈만 남아 결과적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서브컬처전시에서 미술을 제외하고 음악만 다룬 이유는 이듬해 치러질 서울 바벨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 바벨도 공간에 관한 전시였다. 단편적으로는 동시대 현대미술의 현상과 예술가의 활동을 보여주지만, 결과적으로는 계속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는 예술과 예술가들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조망하고자 했다. 젊은 작가들이 서울의 생태계에서 버티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재조합되고 해체되는 유닛이 흥미로웠다. 이 전시의 원래 부제는 작동하지 않는 공동체, 개별 신생공간 자체에 큰 의미가 두기보다 작가로서 이들이 저변을 넓혀나가는 행위에 방점을 뒀다. 당시 서울 바벨전을 통해 세대론이 미술계 주요 이슈로 부각되면서 다양한 비평을 양산하기도 했다. 하지만 혹한에도 불구하고 전시 기간 진행된 40여 개의 관련 행사가 성황리에 진행되었으며, 참여 작가 100여 명은 미술관을 작업실 삼아 전시장을 수시로 오가는 등 약 85000명의 관객이 기간 중 전시를 관람했다. 이 기간 동안 느낀 세대론과 동시대 미술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은 같은 해 12월에 열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전시로 이어졌다. 일련의 논쟁과 논란을 겪으며 우리가 예술을 하고자 하는 본질 자체가 호도되는 까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좋은 전시에서 좋은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간절한 시기였다. 준비 기간 동안 작가, 관계자 등 많은 사람을 만나 의견을 경청했다. 특히 내가 보여준 전시 방식에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를 간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모두가 편파적으로 아방가르드하면 긴장감이 없다는 생각에 일정 부분 동의했기 때문이다. 정치, 사회에서도 여러 의견이 양립해야 하듯 미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번 전시는 다른 여타 전시보다 큐레이션의 개성을 자제하고 작가와 작품에 주목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오히려 한국의 아방가르드(전위) 1세대 작가인 김구림 회고전: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가장 파격적인 전시가 아니었을까 한다. 전시의 흥행에 상관없이 당시 아방가르드 작가인 김구림 선생을 조명하는 것 자체가 미술계의 큰 이슈였다. 다른 원로 작가의 전시와 달리 작품활동의 전기를 다루는 전시가 아닌, 특정 시대의 실험적이다 못해 파격적이었던 작품을 위주로 전시했다. 미술관에 3m 높이 얼음을 몇 톤씩 쌓고, 2주간 얼음이 녹는 것을 예의주시하기도 했고, 최초의 실험영화였던 ‘1/24초의 의미16mm필름으로 복각해서 전시 기간 상영했다. 뿐만 아니라 이후의 아카이브 및 유통 배급을 위해 국내외 영상 기록물 전문 기관에 필름을 소장시키는 등 전시 작품의 80%를 재제작하기 위해 많은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관람객도 15만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 전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전시 설치 모습. (사진=조재무,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 큐레이터가 된 계기는 무엇인가?

 

원래 조각을 전공했지만, 학부 2학년 때 우연한 기회로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 좋은 작품을 보고, 좋은 작가를 만나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꼈다. 크리에이티브한 감수성과 활동적인 에너지를 갖고 할 수 있는 일로 기획을 떠올렸다. 그리곤 학교를 그만두고 영국에서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 재학시절 2007년과 2010년 두 차례 한국으로 돌아와 미디어아트 페스티벌에서 일했다. 특히 2007년에 일했던 페스티벌은 기획팀 2~3명이 전시-학술-공연을 3일간 진행했는데, 당시에는 재밌게 일을 배웠지만 지금 생각하니 엄청난 강행군이다. 그때 터득한 일인다역의 멀티태스킹(?) 능력이 지금도 가열차게 프로젝트를 가동하는 전시 체력으로 사용되고 있다.”

 

- 전시에 참여할 작가를 섭외할 때 어떤 점을 고민하는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는 작업 자체도 중요하지만, 스탠스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스스로가 무얼 하고 있는지 자기가 알고 있는 작가들, 그들의 가치관과 태도가 흥미로우면 주로 내가 먼저 다가가는 편이다. 아프리카 나우에서는 아프리카 현대미술의 이질성을 상쇄시키고자 한국에서 익숙한 작가와 시의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를 적절하게 구성하려 노력했다. ‘서울바벨에서는 기존의 신생공간 활동이나 굿-이후를 주목했다. 잔치가 끝난 이후에도 그곳에 남아 할 일이 있었던 공간과 작가를 위주로 섭외했다. ‘행복의 나라에서는 박이소를 중심으로 놓고 민중미술 전후의 지형도를 펼쳐보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에서는 청계천, 을지로라는 단순해 보이는 대주제 아래 장르, 세대, 동시대성 등 다양한 레이어를 통해 작가를 선정했다.”

 

- 기관에서는 어떤 체계로 전시가 기획되나?

 

우선 미술관 전체의 비전과 올해의 비전을 바탕으로 회의를 진행한다. 올해의 굵직한 전시들이 먼저 결정되고, 그 틈에서 큐레이터들이 연구해왔거나 흥미를 갖고 지켜본 분야들을 제안한다. 해당 제안이 올해의 비전과 맞물려 받아들여지면, 해당 큐레이터가 기획을 맡아 진행한다. 간부들도 모두 큐레이터 출신으로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담당자는 디자이너 및 업체 선정부터 작가 라인업 등을 결정하며 동시에 행정 업무도 함께 진행한다. 모두 세금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철저한 체계를 따른다.”


▲'행복의 나라' 전시 전경. (사진=조재무,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 신 큐레이터 전시의 또 다른 특징으로 출판-인쇄물과 공간 디자인을 꼽을 수 있다.

 

그래픽 디자인, 특히 멋진 도록을 만들어주는 디자이너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전시를 구상할 때도 참여 작가들만큼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제안할 때 설렌다. 그래픽 디자이너 홍은주, 김형재는 내가 진행한 미술관 첫 프로젝트부터 지금까지 거의 5년을 함께 일했다. 이제는 서로 눈빛만 봐도 원하는 걸 안다. 이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전시에는 김영나 디자이너가 참여 작가 수준으로 전시에 일조했다. 매 시안을 받으면서 감동받았다. 김기조, 햇빛스튜디오, 권영찬, 김성구 등 젊은 디자이너와 함께한 작업도 인상 깊었다. 나뿐만 아니라 젊은 큐레이터들이 유입되면서 이제는 큐레이터가 그래픽디자이너와 함께 재밌는 작업을 선보이는 일들이 당연한 것처럼 됐다.

 

미술관의 일원으로서 가장 자랑스러운 일 중 하나는, 젊은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시립미술관에서 제작한 출력물과 도록에 관심을 갖고, 함께 일해보고 싶다는 인상을 줄 때다. 김형재, 홍은주가 만든 도록은 늘 절판되기도 한다. 그래픽 디자인 뿐 아니라 공간디자이너, 테크니션, 인쇄소 선정까지 전시를 위해 팀을 꾸려서 작가들과 전시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여러 멤버들을 구성하는 것도 큐레이터로서 변주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너지가 굉장히 재미있다.“

 

- 아무래도 전시 기획과 예산 운용의 규모가 다른 듯하다. 기관 소속 큐레이터로서 느끼는 남다른 소회가 있다면?

 

나보다 연배가 어린 기획자 지망생들에게 한 번쯤 기관에서 일하는 것을 권장하는 편이다. 전시기획 수립과 예산 운용, 미술관 홍보, 수집연구 등 다양한 방면에서 경험을 쌓을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누군가 기관을 향해 무조건 고리타분하고 구태의연하다고 정의하는 는 논조의 글을 읽었다. 나는 그런 무미건조한 비판이 누구나 할 수 있는 너무 쉬운 말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기관에서 일하지만 한 발자국 나가면 우리도 독립 큐레이터다. 기관에 속한 큐레이터들도 다들 각자의 한계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노력하고 있다. 깊이 있는 비판은 겸허히 듣지만, 단순히 제도권과 기관은 너무 고지식하다는 식의 소모적이고 쉬운 비난은 사양한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그 물꼬를 텄으면 좋겠다.”


- 올해의 계획은?

 

"지난 5년간 15개의 크고 작은 전시를 진행하며 정신없이 일했다. 2016년에만 규모가 꽤 큰 전시 3개를 진행했다. 재충전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지만, 반대로 경험치가 늘었다. 누구나 그런 때가 있지 않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기에 그렇게 해왔을 뿐이다. 기본적으로 후회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올해에는 다시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서 굉장히 즐거운 전시를 준비 중이다. 7월에 있을 아시아 디바12월의 서울 포커스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2016년에 잠시 쉬었던 공연기획도 함께 준비 중이다.”


▲'김구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전시. (사진=서울시립미술관)

    


- 요즘의 관심사는?

 

큐레이터의 길은 언제나 불안정하다. 모든 큐레이터들은 스스로 개척해나가면서 일하고 있다. 특히 요즘에는 나를 제외한 다른 큐레이터들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구축하며 사는지 관심 갖게 됐다. 또 한편으론 아주 개인적인 욕망으로 영화 경주의 감독님 PD로 일해보고 싶기도 하다(웃음). 전시를 꾸리는 건 큐레이터가 주축이 되어 많은 것을 결정해야 하지만, 영화의 프로덕션 PD는 내가 온전히 감독의 세계에 녹아서 하는 일이지 않나. 다른 일에 대한 선망은 없지만, 큐레이션을 변주하며 활용할 수 있는 완전히 다른 장르의 세계가 궁금하다."

 

- 신은진에게 큐레이터란?

 

큐레이터는 하나의 매체라고 생각한다. 때론 작품이나 작가, 씬에 주목하기도 하고, 현상이나 비판해야 하는 대상 또는 제도에 집중하기도 한다. 그래서 유연함이 필요하지만 그 전에 본인의 스탠스가 확고해야 한다. 본인의 장단점과 캐릭터를 파악하고 어떤 용도로 활용할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가수 듀스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당시 듀스가 한 말 중 멋진 말이 떠오른다. 그들에게 왜 가수를 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그냥 20대에 이걸 하면 재밌을 것 같았어요. 30대에는 안 할지도 몰라요.' 아직은 어떤 사명감을 갖고 무얼 하는 건 무겁게 느껴진다. 재밌는 것만 좇을 수는 없겠지만 큐레이터로서 앞으로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

 

- 큐레이터 지망생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기획자란 허울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길 바란다. 이전보다 과대 포장된 측면이 있다. 본인의 장기와 지구력이 필요하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큐레이터 역시 본인이 열중해서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리는 한정됐지만 하고자 하는 사람은 정말 많다. 통통 튀는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만드는 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 오히려 자기 색깔을 지닌 채 묵묵히 본인의 길을 걷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 역시 부족함을 느끼는 부분이기도 한데, 그래서인지 요즘은 오랜 기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연륜 있는 학예사분들의 행보에 관심을 갖게 됐다. 오랫동안 무던하게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신은진 큐레이터는...

2012년부터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일하며 '김구림 회고전: 잘 알지도 못하면서'(2013) '은밀하게 위대하게'(2014) '아프리카 나우'(2014) '피스마이너스원'(2015) '서울 바벨' (2016) '행복의 나라'(2016)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2016) 전을 기획했다.


▲'서브컬처: 성난젊음 라운드 테이블' 포스터. (사진=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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