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쇄
  • 전송
  • 보관
  • 기사목록

[이문정의 요즘 미술 읽기 - 타자(나와 다른 존재)] ‘미스터 마우스’도 미술도 같은 세상 꿈꾼다

  •  

cnbnews 제528호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2017.03.27 09:31:28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필자가 사람들에게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직업을 가져 부럽다는 것이다. 문화생활을 하면서 돈도 버니 일석이조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아무리 미술을 사랑한다고 해도 직업이 되면 여가를 위해 전시장을 찾는 사람들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만은 없다. 때로는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이런 나를 위해 - 편안하게 문화예술을 즐기겠다는 마음으로 - 가끔씩 공연장을 찾게 되었다. 2017년 들어 두 번째로 선택했던 공연은 어렵게 티케팅에 성공한 ‘미스터 마우스(MR. MOUSE)’였다. 대니얼 키스(Daniel Keyes)의 소설 ‘앨저넌에게 꽃을(Flowers for Algernon)’(1959, 1966)을 원작으로 하는 이 뮤지컬은 지적 장애가 있는 주인공 인후가 뇌 활동을 증진시키는 임상 실험의 대상자로 IQ 180의 천재가 되면서 겪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뮤지컬 배우 홍광호의 훌륭한 노래와 연기였다. 그리고 공연을 보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생각이 있었으니 ‘인간은 참 오만하다’는 것이었다. 극 중 과학자는 임상 실험이 인류 발전을 위한 일이라 주장하고, 자신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던 주인공 인후를 구원한 것이라 믿는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수술 전 인후와 음식점 종업원에게 폭력적 언행을 일삼는다. 그러나 천재가 된 인후 역시 평범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 또한 사회의 지배층은 천재가 된 인후가 자신들의 틀린 점을 지적하자 불쾌해하며 그를 비난한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모든 장면들을 불편하게 느낄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 모든 불편한 장면들은 실제의 삶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나만이 중심-정의-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인간은 스스로를 합리적 이성을 가진 존엄한 존재이자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해왔다. 이성에 바탕을 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발전과 진보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의미 있는 발견과 발명도 많았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 혜택은 그 덕분이다. 그러나 그로 인한 비극도 있었다. 발전을 위해 불가피했다는 자기합리화로는 설명할 수 없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환경 파괴가 대표적이다.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이나 정답에 맞지 않거나 주류와 다르다고 여겨지는 누군가를 비정상이라 부르며 배척해온 것 역시 같은 선상에 있으며 홀로코스트(Holocaust)는 가장 끔찍한 결과이다. 현실 속 사람들은 오늘도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공격한다. 

▲뮤지컬 ‘미스터 마우스’의 포스터. 사진제공 = 쇼노트

한 번 생각해보자. 정상과 비정상의 구별은 무엇에 근거한 것이며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타인의 위에 서려고 하는 것일까? 지난 2011년 화제가 되었던 베네통(Benetton)의 광고 ‘언헤이트(UNHATE)’ - 특히 영상 광고 - 가 떠오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정체성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인가 보다. 물론 우리와 다른 누군가가 모두 천사이거나 피해자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나쁘고 이상한 것도 아니다. 모든 존재의 의미와 가치는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 없다. 관점에 따라 우리 자신도 언제든 타자가 될 수 있다. 

바로 직전의 칼럼에서 말했듯 오늘날의 미술가들은 작업을 통해 적극적으로 현실을 반영하고 문제제기를 한다. 구체적인 해결책을 고민하고 제안하며 현실 속으로 직접 뛰어들기도 한다.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를 지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관이 미술에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었을 때 장 미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데이비드 해먼즈(David Hammons) 같은 작가들이 인종의 다름이 차별로 이어지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그려낸 것이나, 요셉 보이스(Joseph Beuys)가 인간중심적인 자연관을 비판하며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가는 사회를 지향하는 퍼포먼스들을 지속적으로 진행했던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키키 스미스(Kiki Smith)는 여성에게 부과되었던 스테레오타입(stereotype)과 억압받았던 여성의 역사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비정상의 상징과도 같았던 괴물의 의미 전환을 시도했다. 그 동안 기준에 맞지 않아 주변으로 밀려났던 무수한 타자들이 주인공이 되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성 정체성, 인종, 계층 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이러한 주제를 공유한다.  

김도희 작 <부활-나무>의 거꾸로 세워 보기 

이즈음에서 ‘미스터 마우스’로 돌아가 보자. 인후는 자신이 실험용 쥐가 아니라 외친다. 자신도 평범하고 소중한 인간이라 말한다. 관객들은 인후의 눈물에 함께 슬퍼한다. 그렇다면 과연 생쥐는 실험 대상이 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생쥐는 자신이 실험용 대상이 되는 것에 동의할까? 당신은 동물권(animal rights)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인간 문명의 발전을 위해 동물 실험을 하고 생태계를 변형시키는 것은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을까?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말처럼 동물도 고통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며 보호받을 권리를 갖는다. 타자에 대한 폭력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인간은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엄격히 분리시킨 뒤 인간에게 절대적 지위와 권력을 부여했고, 자연을 마음대로 사용했다. 인간이 과연 자연을 파괴하기도, 보호하기도 할 수 있는 대단한 존재일까? 얼마 전 칼럼에서 언급했던 작가 김도희는 <부활-나무>(2016)에서 인간은 주체, 자연은 타자라는 이분법에 담긴 권력관계를 해체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단풍나무는 인간을 위해 누군가의 마당에 심어졌다. 아름드리나무는 인간에게 아름다운 풍경과 그늘을 선사했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가차 없이 버려졌다. 그 현장을 목격한 작가는 죽은 나무를 거꾸로 세워 되살려냈다. 위와 아래의 바뀜은 자연의 동의 없이 인간이 자연과 맺었던 주종 관계와 위계질서를 바꾸는 것이다. 또한 나무를 뒤집는 행위는 인간이 정해놓은 획일화된 규칙, 여전히 당연시되는 정답과 기준을 지워낸 새로운 눈으로 이 세상을 보기 위한 통과의례와 같다. 

▲김도희, ‘부활 나무’, 단풍나무, 짚단, 260×190cm, 2016. 사진제공 = 김도희 작가

뮤지컬의 마지막, 생쥐 인우를 향한 인후의 독백 장면에서 패트리샤 피치니니(Patricia Piccinini)의 작품 ‘오랫동안 기다려온(The Long Awaited)’(2008)이 떠올랐다. 인간의 시선에서 괴물이라 불릴만한 알 수 없는 존재를 꼭 안은 채 자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이번에는 공연을 편안하게 즐기지만은 못한 것 같다. 그러면 어떤가. 그것이 미술이든 공연이든 예술은 이렇게 우리의 세상을 꼼꼼히 살펴보고 고민하게 한다. 그래서 의미 있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정리 = 최영태 기자)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배너

CNB 저널 FACEBOOK

CNB 저널 TWITTER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