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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작가 - 테리 보더] 백인 작가의 백(白)달걀이 '유색달걀만 입장가'에 차별 당하다니

현실 비꼬는 유쾌한 블랙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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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60호 김금영⁄ 2017.11.03 09:28:38

▲테리 보더, ‘왕따 계란(Eggregation)’.(사진=사비나미술관)

(CNB저널 = 김금영 기자) 계란이 손에 하트 모양이 적힌 편지를 들었다. 사랑하는 엄마에게 드릴 편지다. 룰루랄라 들뜬 마음으로 신나게 달려갔는데, 자신 앞에 펼쳐진 광경에 우뚝 멈춰서고 만다. 충격에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는 것 같은 뒷모습이 애달프다. 앞에는 잘 익은 통닭구이가 접시 위에 담겼다. 고것 참 먹음직스러운데, 계란은 절망한다. 이 사진의 제목은 ‘너무 늦은 만남’이다.


이 사진은 SNS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었다. 구구절절 설명을 하자면, 계란 속 병아리가 커서 닭이 되므로 계란의 엄마는 닭이다. 그리고 계란은 너무 늦게 찾아 와 불효를 하게 된 셈. 사람들은 “이거 정말 웃기다” 하면서도 “진짜 웃긴데 내 모습이 오버랩 돼 슬프기도 하다”고 말했다.


▲테리 보더, ‘너무 늦은 만남(Belated)’.(사진=사비나미술관)

테리 보더의 작품이 그렇다. 마냥 웃긴 것 같으면서도 가슴 한켠이 시리기도 하다. 반대로 가슴 한 구석이 아리면서도 마냥 무겁지도 않다. “맞아, 맞아” 공감대의 물개 박수로 마무리하게 되는 작품. 테리 보더는 유쾌하고 익살스러운 방식으로 인간사회를 제대로 꼬집는 블랙유머의 강자다.


말이 필요 없다. 그의 매력은 작품을 보는 순간 드러난다. 또 유명한 작품이 ‘왕따 계란’이다. 심상치 않은 작품명을 지닌 이 작품 속 주인공도 계란이다. 손과 발이 달린 하얀 계란이 뭔가 심기가 불편한 듯 양 팔을 구부리고 있다. 그리고 앞에는 바구니가 있는데, 여기에 계란 친구들이 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흰 계란을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나 보다. 바구니에 떡하니 ‘컬러드 온리(Colored only)’를 문패처럼 달아 놨다.


▲테리 보더, ‘뇌를 먹는 땅콩 좀비(Zombies Are Nuts about Brains)’.(사진=사비나미술관)

부활절 계란 바구니 앞에서 흰 계란이 슬퍼하는 장면을 담은 이 작품은 현 시대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풍자한 작품이다. 과거 미국 인종차별의 상징인 ‘백인 전용(White Only)’, ‘유색인 전용(Colored Only)’ 등 민감한 표지판을 화면 위에 거침없이 드러냈다.


민감한 이야기를 다룸에도 웃음이 터질 수 있는 건 주변의 사물을 제대로 활용하는 테리 보더의 방식 덕분이다. 그의 화면 속 이야기를 풀어가는 존재들은 매우 평범하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계란, 땅콩, 비스킷, 식빵, 파프리카, 립밤, 시리얼 등 친숙한 사물들이 구부린 철사로 만들어진 손과 발을 얻고 의인화됐다. 특히 이 손과 발은 어릴 적 우리가 그림을 그릴 때 흔히 선으로 그린 사람의 단순한 형태를 떠올리게도 해 눈길을 끈다. 위풍당당 화면의 주인공을 꿰찬 그 모습이 매우 귀엽다.


▲테리 보더, ‘나는 언제나 카메라 뒤에 숨는다(I Always Hide Behind the Camera)’.(사진=사비나미술관)

“작업할 때 일상 사물을 주로 사용해요. 가격도 저렴하고, 작업이 끝나면 이 재료들을 먹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죠(웃음). 그래서 부인은 걱정을 하기도 해요. 부엌의 재료를 보고 ‘이걸 남편이 작업에 사용하진 않을까’ 하며 요리를 하기 전에 고민하는 거죠(웃음).”


가장 똑똑한 척 하지만, 이상한 짓도 많이 하는 인간?


▲테리 보더, ‘해변에서의 하루를 위한 준비(Mr.Kiwi’s Getting Ready for a Day at the Beach)’.(사진=사비나미술관)

주변 사물을 이용해 친근감을 쌓는 것 외에도 테리 보더의 작품이 지니는 특징이 있다. 그의 화면을 보면 마치 만화의 한 장면을 캡처한 듯 스토리라인을 상상하게 된다. 이는 표정을 알 수 없는 사물들에서 비롯된다. 앞서 언급한 ‘너무 늦은 만남’과 ‘왕따 계란’에서도 계란의 표정은 읽을 수 없다. 그런데 화면에 제시된 상황과 계란의 포즈 등을 통해 앞뒤에 무슨 상황이 있었겠거니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된다. 이건 테리 보더가 의도한 바.


“저는 카투니스트로 작업을 시작했어요. 그래서 화면을 구성할 때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죠. 특히 사람들에게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걸 좋아해요. 예컨대 제가 계란에 화가 나거나 웃는 표정을 그려 넣으면 사람들은 ‘아, 계란이 화가 났구나’ 하고 그대로 화면을 지나칠 거예요. 그런데 표정이 없으면 계란이 어떤 상황인지 살핀 뒤 ‘얘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상상하게 되겠죠. 시간을 들여 작품을 보면서요.”


▲테리 보더, ‘매끄러운 피부 관리(Smooth as Glass)’.(사진=사비나미술관)

희로애락의 표정을 지닌 사람이 아닌, 도저히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사물들이 화면에 등장한 이유가 납득된다.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한국의 사물도 사용했다. 전시 준비 과정에서 곶감과 대추를 받았는데 다 모두 처음 봤단다. 대추는 ‘매끄러운 피부 관리’를 통해 피부 관리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곶감은 서로의 몸을 맞댄 새를 연상케 하는 ‘사랑의 노래’로 재탄생했다.


“곶감을 처음 보고 이상하게 생겼다고 생각했어요(웃음). 인터넷에서 찾아봤을 땐 둥그런 주황색 곶감을 봤었는데 제가 마주한 건 반건조 된 곶감이라 모양도 쭈굴쭈굴하고 하얀색이었어요. 고기인 줄 알았죠. 어떤 이야기를 풀까 고민했어요. 세상을 비꼬는 것도 재미있지만 잘 모르는 나라의 문화에 대해서 함부로 다루면 위험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고, 한국에서의 첫 전시라 관람객에게 친근하게 ‘안녕’ 인사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각 사물을 한 쌍으로 맞춰 다정한 장면을 연출했죠.”


▲테리 보더, ‘마릴린 컵케이크(Marilyn)’.(사진=사비나미술관)

전시는 크게 네 섹션으로 나눠진다. 섹션 1은 ‘사랑의 다양한 감정’으로, 작품 ‘사랑의 노래’를 여기서 볼 수 있다. 만국공통으로 지니는 공감의 감정인 사랑의 이야기가 사물들의 모습을 빌어 펼쳐진다. 섹션 2 ‘예술적 영감의 원천’은 한바탕 웃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유명 화가 또는 영화의 장면을 패러디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세기의 여배우 마릴린 먼로의 드레스가 휘날리는 유명 장면은 컵케이크와 포장지로, 그림을 그리는 고흐는 해바라기로 화면 위에 재탄생했다.


섹션 3 ‘일상적 사물들의 숨겨진 이야기’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이다. 키위가 면도를 하거나, 대추가 피부 관리를 하고, 헬멧을 착용한 립밤의 모습을 통해 "도대체 이 친구들에게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라고 상상하며 스토리텔링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화면을 보고, 상상을 하고, 작품 제목을 보는 순간 머리를 탁 치는 탄성이 이어진다. 한 예로 털복숭이 키위가 거울을 보고 면도하는 장면이 있다. ‘키위가 털이 많은 게 콤플렉스인가 보다’라는 상상이 이어지고 작품의 제목이 ‘해변에서의 하루를 위한 준비’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은 제모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는 현대인의 모습을 다뤘다.


▲한국의 말린 곶감을 활용한 작품 ‘사랑의 노래’ 옆에 선 테리 보더.(사진=김금영 기자)

섹션 4는 작가의 매력이 한껏 드러나는 ‘블랙유머, 유쾌하고 익살스럽게 인간사회 꼬집기’다. 작가가 가장 주력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작품들을 보면 웃기면서도 날카로운 이야기가 담긴 게 꼭 만화 ‘심슨’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작가는 “정말 좋아하는 만화”라고 말했다.


“심슨을 비롯해서 많은 콘텐츠를 보며 자랐어요. 어렸을 때 TV를 많이 봤고 지금도 많이 봐요. 특히 사회, 정치 뉴스를 보면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인간이 가장 똑똑한 척 하지만, 이상한 짓도 많이 한다고요. 거기서 풍자에 대한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죠. 그런데 저는 작품을 통해 ‘이것은 옳지 않다’고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교훈을 줄 생각은 없어요. 그저 사회를 바라보는 제 코멘트를 화면으로 보여줄 뿐이죠. 그저 즐기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저는 작업할 때 정말 즐겁게 하거든요. 작품을 머리 써서 힘들게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즐기고 바라보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작가의 성향과 꼭 닮은 전시 ‘먹고, 즐기고, 사랑하라’는 사비나미술관에서 12월 30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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