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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의 요즘 미술 읽기 (42) 함께 만드는 결말] 결과만 보여주는 작가에서, 함께 만드는 작가의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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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62호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2017.11.20 10:28:05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 보면 마지막에 명확한 결말을 내려주지 않고 끝나는 경우가 있다. 한껏 몰입해 있다가 모호한 결말을 마주하게 되면 허무하기도 하고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게 뭐야?’라는 생각과 함께 짜증이 나기도 한다. 그런데 열린 결말로 끝날 경우,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이야기들을 상상하면서 긴 여운을 즐기게 될 때가 있다. 결말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 경우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들이 수집한 증거와 논리들을 들어가며 줄거리를 해석하고 자신이 생각한 결말이 더 타당하다 주장하는데, 영화 자체보다 관객들의 해석이 더 흥미진진할 때도 있다. 때로는 연출자가 관객 혹은 시청자에게 적극적으로 생각하길 유도할 때도 있다. 이는 내러티브가 있는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이런 상황은 포스트모더니즘적 변화에 근거한 것이다. 신과 같은 위치에서 이야기의 전개에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작가라는, 지극히 당연히 여겨지던 태도를 벗어난 것이다. 사실 작가가 비극으로 끝을 맺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슬프다 느끼는 결말도 사람에 따라 해피엔딩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우리가 꽃, 새, 산, 바다와 같은 단어 하나를 놓고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결말의 의미를 만드는 것은 작품을 마주하고 감상하는 사람의 몫이다. 

희극인지 비극인지는 작가 아닌 관객의 마음

현장성이 두드러지는 공연의 경우 관객이 보다 적극적으로 이야기의 마지막에 관여하게 된다. 대표적 예로 연극 ‘쉬어 매드니스(Shear Madness)’를 들 수 있다. 미용실에서 일어난 살인의 범인을 찾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이 연극은 관객과 함께 진행하는 토론(심문) 후 관객의 선택에 의해 범인이 결정된다. ―범인으로 자주 지목되는 등장인물이 있을 수 있고, 제작진이 어느 정도 결과를 유도해낼 수 있다 하더라도― 매 회마다 다른 등장인물이 범인이 될 수 있다. 당연히 연극의 전개도 매 회마다 달라진다. 

▲‘2017 아르코미술관 대표작가전 강익중, 내가 아는 것’, 제 1전시장 ‘내가 아는 것’ 설치 장면, 도판 제공 = 아르코미술관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마침표가 찍힌 결말이나 메시지를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 작품은 미술에서도 자주 찾아진다. 1960년대 이후부터 특히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전시되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결말이 바뀌거나 네버 엔딩 스토리가 되는 경우도 많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역사를 몸으로 쓰다’(2017. 9. 22 ~ 2018. 1. 21)에서도 만날 수 있는 오노 요코(Ono Yoko)의 ‘컷 피스(Cut Piece)’(1964)는 “자르라(cut)”는 지시를 따라 관객이 한 명 씩 무대 위로 올라가 가위로 작가의 옷을 자르는 행위 모두가 작품이었다. 물론 퍼포먼스는 매 번 전혀 다른 전개와 결말을 보여주었다. 이불의 퍼포먼스 ‘낙태’(1989)는 관객들이 거꾸로 매달린 작가를 끌어내리면서 끝났다. 미디어 아트도 예외는 아니다. 제프리 쇼(Jeffrey Shaw)의 ‘웹 오브 라이프(Web of Life)’(2002)는 관객의 손금을 스캔해 작품 속 영상 이미지에 더해간다. 작품에 참여하는 관객에 따라 매번 작품이 변화하고 그 내용이 추가되는 것이다. 

▲‘2017 아르코미술관 대표작가전 강익중, 내가 아는 것’, 제 2전시장 ‘배움의 무대’, 도판 제공 = 아르코미술관

사실 오늘날 관객이 작품의 일부로서 작품의 결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작품은 셀 수 없이 많다. 스펙터클한 설치를 보여주는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대표작인 ‘무지개 집합(Rainbow Assembly)’(2016)은 물안개에 다가가는 관객의 거리와 시선의 각도에 따라 다른 형태와 색의 무지개를 만날 수 있으며, 무지개를 보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관객 그 자체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 ‘날씨 프로젝트(The Weather Project)’(2003-2004)에서는 인공 태양 아래에서 마치 백사장에서 일광욕을 즐기듯 누워 있거나 휴식을 취하는 관객들이 작품을 완성시켰다. 얼마 전 칼럼에서 이야기했던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 역시 작품을 열린 결말인 채로 선보이며, 음식을 함께 먹는 관객들이 자유롭게 의미를 만들어나간다. 물론 이런 작업들 역시 어느 정도는 작가가 정해놓은 범위 안에서 다양한 결말을 만들어내겠지만, 엄밀히 말해 작품이 100% 작가의 예상대로, 작가가 원하는 대로 진행된다는 보장이 없다. 또한 작가가 아무리 탁월한 결과물을 내놓는다고 해도 관객이 참여하지 않으면 무의미해진다.   

예전엔 제막식, 지금은 “막 안으로 들어와”

관객이 보다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경우도 있다. 아르코미술관에서 지난주까지 열렸던 ‘2017 아르코미술관 대표 작가전 - 강익중, 내가 아는 것’(2017. 9. 22~11. 19)에서 선보였던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삶 속의 예술, 대중 교육기관으로서의 미술관이라는 키워드에 주목했던 이 전시에는 초등학생들이 참여해 전시를 꾸몄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물건들과 그것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은 글을 전시장으로 들고 와 설치했다. 전시가 끝나면 그 물건은 모두 주인에게 되돌아 갈 것이다. 그리고 그 물건들은 아이들에게 더 소중한 물건이 될 것이다. 이 전시에서 가장 주목을 끌었던, 3인치의 작은 캔버스 위에 참여자들이 자신의 삶과 생각을 담아낸 문장들로 이루어졌던 설치 작업은 관객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전달한다. “미술관에서 정해진 동선을 따라 움직이며 작업 앞 펜스를 절대 넘지 말아야 했던 익명의 대중들”이 함께 만들어낸 전시는 더 깊은 울림을 전달한다. 

한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진행 중인 ‘MMCA 현대차 시리즈 2017: 임흥순 -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은 11월 30일 정식 개막에 앞서, 11월 1일 프리 오픈(pre-open)이라는 전례 없는 독특한 시도를 했다. 네 명의 할머니들의 삶을 기록하고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한국 근현대기의 격변의 순간들을 재창조하는 프로젝트와 같은 이번 전시에서 작품이 완성되기 이전에 전시장의 일부를 공개하고 관객들이 준비 과정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오픈된 전시장에는 영화를 촬영하기 위한 세트장이 세워졌고 영화 촬영도 진행되었다. 필자가 미술관을 찾았던 11월 16일에는 할머니들의 삶의 족적과 한국을 둘러싼 주요한 역사적 순간들을 기록한 연대표를 벽에 붙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러한 파격적인 시도를 통해 임흥순은 미술관과 전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다고 한다. 모든 것이 완결된 상태로, 정리된 모습만을 보여주는, 당연시되는 전례를 벗어난 것이다. 현재진행형의 전시장의 모습이 계속 변화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역사-도 계속 진행 중임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아마 필자를 포함한 많은 관객들은 그 진행 과정의 변화가 궁금해 여러 차례 미술관을 들르게 될 것이다. 작품의 제작 과정에 참여한다는 것, 그 과정의 목격자가 된다는 것은 참 매력적인 경험임에 틀림없다. 

(정리 = 최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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