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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1) 하태범 ] 참상 뉴스를 보면서 우리는 괴로운가? 아니면 단지 구경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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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65호 박현준⁄ 2017.12.11 09:59:47

미술평론가가 직접 전시현장을 찾아가 큐레이터를 만나고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새 시리즈 ‘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를 이번 호부터 시작합니다. <편집자 주>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하태범은 사건사고의 현장을 하얀색의 미니어처로 제작한 뒤 사진을 찍어 보여주는 ‘화이트(White)’(2008~) 시리즈로 유명하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사실 그는 독일에 유학가기 전까지 사회정치적 이슈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고 미술이 그러한 주제를 다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대학 입학 전에는 로댕(Auguste Rodin)을 좋아했고 조각을 생각할 땐 고전적인 작품만 떠올렸다. 대학 시절에는 재료의 물성을 이용하거나 특정한 조건의 환경에 반응하는 과학적이고 물리학적인 작업에 집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와 존재의 원리를 탐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독일이라는 낯선 타지에서 이방인이 되자 한국에서와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재활용 휴지로 인간상을 만들어 일상의 틈새 공간에 올려놓거나, 평상시 주목받지 못했던 사물이나 장소들을 미니어처로 제작해 존재감을 환기시키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미니어처 작업을 지속할수록 하태범은 회화적 공간에 눈을 돌리게 되었는데, 비록 회화가 사각의 틀(frame)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는 무한한 상상력의 확장을 가져온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완성된 미니어처들은 사진으로 전시되기 시작했다. 하태범을 대표하는 표현의 양식 -미니어처, 프레임, 실재와 가상- 이 만들어진 것이다. 

참상 현장을 흰색으로 덮은 이유는?

그렇다면 ‘화이트’ 시리즈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독일에 머물던 시절 작가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한국에 대한 뉴스를 자주 찾아 읽게 되었다. 그러던 중 똑같은 사건도 언론사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으로 전달될 수 있으며, 뉴스를 읽거나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뉴스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객관적이며 공정하고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사건사고, 단어, 인물 등 모든 것이 맥락에 따라 매번 다른 의미로 읽힐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지 오래다. 하태범은 또한 뉴스가 잔혹하고 끔찍한 사건이나 재난 이미지를 끝없이 생산하며, 대중은 마치 자극적인 스펙터클(spectacle)처럼 사건사고를 소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고화질의 사진과 생생한 영상을 얻는 것이 한결 쉬워지면서 이러한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뉴스를 비롯한 대중매체 속의 재난 이미지에는 현장에서 참사를 직접 겪은 이들의 처절한 공포와 절망, 슬픔이 지워져 있다. 대중들은 뉴스를 보고 놀라고 슬퍼하며 분노하지만 곧 일상으로 돌아간다. 충격, 동요, 공감, 감정 표현, 망각이 반복된다. 강한 충격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대중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지게 되고 더 강한 이미지의 제공이 반복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기력한, 동시에 누구보다 폭력적일 수 있는 무관심한 방관자가 만들어진다. 

▲‘Ambivalence’, 200 x 400 x 250cm, mixed media, 2017. 도판 = 하태범 작가 제공

‘Headline’ 시리즈에 나타나듯 뉴스는 관심을 끌만한 자극적인 제목으로 대중을 유혹한다. 때로는 애도할 여유도 없이 누군가의 죽음과 희생이 수치화되기도 한다. 사건의 처참함은 숫자로 결정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종이로 만들어진 도시를 향해 슈팅 게임(shooting game)처럼 장난감 총을 쏘는 장면을 촬영해 보여준 ‘White - Playing war games’ 시리즈가 암시하듯, 영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엔터테인먼트는 더 잔인한 테러와 전쟁의 순간을 상품으로 판매한다. 전쟁과 테러, 심지어 자연재해까지도 재난이 아닌 모험이 된다. 현실의 폭력을 대할 때에도 가상의 폭력을 대하는 것과 같은 무감각한 상황은 예견된 것이었다. 

참상마저 비디오게임처럼 만드는 매스미디어

이 냉랭한 현실을 고민하면서 작가는 -재난의 피해자와 무기력한 방관자의 감정을 포함한- 모든 감정이 사라진 백색의 현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애초에 작업의 바탕은 실제 현장이 아니라 현장을 찍은 사진이었다. 감정이 사라진 세상에 사람이 설 자리는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모습도 지워졌다. 무감각한 방관자적 태도를 최대한 담아내기 위해 작가는 미니어처로 제작할 사건의 선정과 자료 수집, 제작과 촬영의 전 과정에서 최대한 건조함을 유지하려 한다. 감정 이입이 일어나 방관자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건은 다루지 않는다. 

▲‘Tragedy in Yong San - 1’, 112 x 150cm, pigment print & facemount, 2010. 도판 = 하태범 작가 제공

현재까지 발표된 ‘화이트’ 시리즈는 위협적이거나 폭력적인 사건의 순간을 상상해서 가상의 현장을 창조한 작업과 지진, 쓰나미(tsunami), 대형 화재, 각종 테러, 침공, 폭격 등을 다룬 뉴스의 보도사진을 재현한 작업, 둘 다를 포함한다. 전자는 작가를 비롯한 대중들이 갖고 있는 폭력적인 사건의 스테레오 타입을 확인시키고, 후자는 대중매체에 의해 생산되고 소비되는 끔찍한 이미지들을 떠오르게 한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오늘날 스테레오타입을 구축하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대중매체이기에 두 방식으로 분류된 작업의 끝은 서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 둘을 확실히 엮어주는 것은 ‘흰색’이다. 

▲‘People 1’, 19 x 27.6cm, acrylic on photo, 2017. 도판 = 하태범 작가 제공

하태범은 “감정이 배제된 방관적 시각을 상징하기 위해서 흰색(탈색)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완성된 백색의 이미지들은 보도사진과는 무관한 정적인 고요함을 담아낸다. 진공 상태나 무균실이 떠오른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을 마주한 뒤 머릿속이 하얘지거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상황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잔인하고 끔찍한 이미지라 해도 결국은 하얗게 지워진다.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다. 역으로 생각하면 ‘인간이 모든 것을 기억해야만 하는가?’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만약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어떻게 될까? 트라우마(trauma)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하얗게 변한 세상은 셀 수 없이 많은 진짜 혹은 가상의 폭력에 노출된 작가 자신을 포함한 우리들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처럼 보인다. 더 나아가 흰색은 뉴스를 생산하는 특정 언론사나 언론인의 시선, 자극적인 이미지를 쫓아다니는 대중매체의 속성을 배제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국제적 갈등이나 전쟁의 보도에는 특정 언론사나 국가(집단)의 이익이 영향을 끼친다.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양상을 띠기도 한다. 과연 뉴스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으로서의 역할을 잘하고 있는가?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뉴스는 어느 정도의 균형감각을 지키는가? 우리의 시선이 이미 프레임에 갇힌 것은 아닌가? 나는 어떤 관점으로 뉴스를 읽고 있는가?

화이트 세상은 아름답다? 눈 녹으면 더러워지는데… 

달리 보면 하태범의 새하얀 세상은 눈이 내린 후의 풍경 같기도 하다. 어쩌면 이런 해석 역시 대중문화가 만들어낸 ‘전쟁 속에서 피어난 희망’이라는 낭만적 미화에 영향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이 세상을 하얗게 덮어준다 하여 해피엔딩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눈은 곧 녹을 것이고 다시 힘겨운 세상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모두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눈이 내리고, 쌓이고, 녹기를 반복하다보면 봄이 올 것이다. 이 세상은 양가적이고 모순적이다.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Pieta’, 110 x 110 x 160, mixed media, 2014. 도판 = 하태범 작가 제공

건조하고 냉소적이며 방관자적인,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이야기하던 작가는 점점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인간 존재’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결과물은 -‘올해의 작가상 2015’전에도 소개되었던- 구호단체 광고에 실린 사람들(주로 아이들)의 이미지를 부조와 입체로 제작한 ‘Line of Sight’ 시리즈(2015), ‘Face Series 50’(2015), ‘Pieta’(2014), ‘Girl’(2014), ‘Boy’(2014) 등이다. 이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하태범은 질문을 던진다. “선의에 의한 것이라 해도 광고 속 인물들이 자신의 이미지가 저렇게 소비되는 것에 얼마나 동조했을까? 선택의 여지는 있었을까? 만약 이 아이들이 커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너무 안일하게 스테레오타입을 만들고 소비하는 것은 아닌가?” 평범해보였을지도 모를 소년, 소녀가 광고 문구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사람이 되었다. 큰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아이들, 앙상한 아이를 안고 슬퍼하는 어머니는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가장 이상적인 희생자의 스테레오타입을 재생산한다. 오늘날 많은 구호단체들은 기업화 되었고, 서로 경쟁하고 있으며 그만큼 광고 의존도가 높아졌다. 작가는 말한다. “광고 속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후원을 한다. 진정으로 그들을 도와주려는 순수한 마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후원을 했던 사람 중에 광고 속 아이가 살아남았는지,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관심 갖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어쩌면 우리는 자기만족과 자기위안을 위해 일정한 돈을 지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참상의 현장에도 사람은 살고 있다

불쌍한 사람들의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문제 제기는 아트스페이스 와트(ART SPACE WATT)에서의 개인전 ‘Ambivalence 앰비벌런스 ― 대립의 공존’(2017.10.20.~2017.12.9)에서 발표된 ‘People’ 시리즈(2017)를 통해 더 명확히 드러난다. 뉴스와 다큐멘터리를 비롯해 언론이 제공하는 영상 자료, 유튜브(Youtube)에 올라온 현지인들의 촬영 영상 등에서 사람만을 남기고 배경을 하얗게 지워버리자 평온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만 남았다. 그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보인다. 아이들은 언제나 해맑다. 늘 괴롭고 절망적인 난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도 우리처럼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한편 ‘Scene’ 시리즈(2017)에서는 사진으로만 존재하던 재난의 이미지가 실제 공간에 놓이는, 그러나 여전히 사각의 틀 안에 머무르는 미니어처로 제작되었다. 컴퓨터 혹은 텔레비전의 모니터를 연상시키는 프레임 안의 세계는 마치 연극 무대 같다. 그것은 보다 흥미를 끌기 위해, 주목을 받기 위해, 그리고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획되고 편집된다. 연극에 초대된 대중은 무대 앞에만 집중한다. 무대 뒤 ―뉴스의 이면― 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관객이 무대 위에 올라가지 못하고 눈으로만 감상하듯 우리의 시선은 이미지의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고 부유하며 계속 미끄러질 뿐이다.  

▲‘Syria - 3’, 200 x 143cm, pigment print & facemount, 2016. 도판 = 하태범 작가 제공

이번 전시에는 미니어처뿐 아니라 비디오 영상과 설치 작업도 포함되었다. 싱글 채널 영상인 ‘하루’(2016)는 인터넷에서 ‘전쟁, 난민, 서울, 군중’과 같은 단어들을 검색하여 찾아낸 영상을 편집한 것이다. 여기에는 구호 단체의 광고와 뉴스, 다큐멘터리 영상도 포함되었다. 세로로 잘려 서로 교차되는 영상 이미지는 대립의 공존, 다양한 삶의 공존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 영상 속 이미지가 입체 작품으로 재현된 것이 ‘Ambivalence’(2017)이다. 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이토록 다른 삶이 함께 한다. 그리고 그 다양한 삶의 모습들은 미디어를 통해 끝없이 파편화되고, 소비되고, 사라진다. 

하태범이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문제 제기만 하고 해결책은 생각 안 하는가? 당신이 생각하는 해결책은 무엇인가?’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흑백논리식으로 명확한 정답 한두 개를 찾아낼 수는 없다”고 답한다. 또한 자신의 지향점이 옳고 그름, 선과 악을 평가하고 판단하거나 문제의 해결책을 우리 손에 쥐어주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현재까지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역할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까지이다. 아직 우리는 문제를 충분히 직시하지 못했기에 관객들이 조금이라도 문제의식을 갖거나 자각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유의미한 작업이 될 것이다.” 

(정리 = 최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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