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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5) 정재연] 진짜같은 내 얘기는 당신에게 진실 또는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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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85-586호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2018.04.30 09:54:03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장소는 자기만의 역사를 갖는다. 하나의 장소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사적이고 공적인- 의미를 부여받고 끝없이 변조된다. 의미가 소멸되거나 새롭게 창조되는 일도 빈번하다. 이런 이유로 정재연은 공적 장소에 사적 이야기와 기억을 풀어낸다. 


정재연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작품인 ‘하이드파크의 연애편지(Love Letters in Hyde Park)’(2009)는 한 여성이 자신의 남자친구와 주고받은 편지(e-mail)를 확대하여 PVC에 프린트한 뒤 사람들에게 공개한 것이다. 이 작업은 화제가 되었고 그녀의 남자친구는 자신이 보낸 편지를 더 이상 공개하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여성은 편지를 계속 공개했다. 이후 그녀의 남자친구는 매우 강한 어조로 그녀를 비판하는 편지를 보냈고, 그것 역시 공개되었다. 편지의 내용은 사적이고 내밀한 관계를 이용하면서까지 스타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심오한 철학과 미학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이디어가 고갈되어버린 동시대 미술에 대한 신랄한 비판 등이었다. 


‘하이드파크의 연애편지’를 마주한 관객들 중 일부는 그것을 예술 작품으로서 받아들였고, 일부는 공원과 같은 공공의 장소에서 누군가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일부의 사람들은 사랑까지도 성공을 위해 이용하는 여성에게 분노했다. 

 

정재연, ‘Stained glass’, 커튼, 아크릴 거울, 고보 빔, 가변 크기, 전시 Lost Corner 설치 전경, 2018. 도판 제공 = 정재연 작가

사실 편지에 적힌 내용의 일부는 허구였고, 그 내용은 철저히 작가에 의해 각색된 것이었다. 허구와 실재를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인 연애편지라는 형식 자체에 집중했던 이 작업은 ‘인간이 가장 진실하다고 여기는 사랑이 과연 진실한 것인가? 우리가 만들어낸 허구인가?’와 같은 물음에 도달한다. 동시에 –작가가 판단하기에- 개념과 철학에 함몰된 오늘날의 미술에 대한 자기반성을 드러낸다. 

 

부자의 공간 따로 있다는 부자연


‘세인트 세이비어스 개인 전용 긴급대피소(St. Saviour’s Emergency Private Shelter)’(2012)에서도 사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작업 방식은 이어진다. 정재연은 과거 공적 장소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아 작가 레지던스(residence) 공간으로 운영되는 오래된 교회 건물에 소수의 부유층을 위한 긴급대피소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홍보 동영상까지 만들었다. 소수의 부유층만 올 수 있다는 설정은 교회가 위치한 고급 빌라 단지(에 사는 사람들)의 폐쇄성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담긴 것이다. 또한 시대가 흘러 역할이 전환된 장소의 의미에 대한 숙고도 함께 한다. 

 

정재연, ‘Dialogue’, 책상, 스탠드, 조광기, 스위치, 100 x 160 x 90cm, 2014. 도판 제공 = 정재연 작가

공간의 분리는 삶과 의미의 분리를 가져온다. 이런 이유로 정재연은 미술인들만의 공간, 부유층만을 위한 공간처럼 특정한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공간을 뛰어넘어 모두가 편안하게 즐기고 참여하며 의미를 끝없이 생성시키는 공간을 만들려 노력한다. 이런 이유로 정재연의 작품들은 공공 도서관 내에 위치한 전시 공간에 도서관에 실제로 놓여있는 것과 동일한 의자와 책상을 제작해 놓았던 ‘대화(Dialogue)’(2014), 필라델피아 아트 호텔의 창문에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국기를 이틀 간격으로 바꿔달아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졌던 ‘깃발(Flags)’(2010)처럼 그것이 예술인지 아닌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예술로 인지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편견 없이 경험하는 순간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웠던 총독부 공간을 미워해야 한다니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한 정재연의 작업은 인간의 삶을 둘러싼 사실과 진실, 역사와 기억의 본질에 대한 숙고를 이끌어내기에 적절하다. 과연 우리는 우리가 마주하는 역사적 기록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당신이 사실이라 믿는 모든 것이 사실이라 확신하는가? 그것은 누군가의 기억일 뿐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이 진실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타인에게도 그 진실을 믿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나의 기억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정재연, ‘North’, ‘South’, 에칭, 40 x 60cm(each), 2018. 도판 제공 = 정재연 작가

아트스페이스 그로브(Art Space Grove)에서 진행되었던 개인전 ‘로스트 코너(Lost Corner)’(2018.4.5.-4.26)에서 정재연은 보다 적극적으로 장소와 결부된 기억에 집중했고, 자신이 어린 시절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장소 -국립중앙박물관이었던 조선총독부 건물- 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그 장소가 어떤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했던 어린아이는 그저 아름다운 곳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어른이 된 작가에게 지금은 사라진 그 건물은 아련한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 흐릿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에 작가는 자신의 기억을 역사 속에서 어떻게 위치시켜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개인의 추억의 장소는 우리와 관련된 사회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장소였기 때문이다. 정재연은 조선총독부 건물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건물의 도면도와 인터넷에서 얻은 허물어지기 전 건물의 내부 이미지를 에칭(etching)으로 새겼다. 사진이 대중화되기 이전 시대에 기록의 역할을 담당했던 판화를 통해 기억을 기록하는 작업을 한 것이다. 판화가 쌓일수록 -작가 스스로 공적 담론을 이야기하길 원했던 것이 아니었음에도- 개인의 기억을 추억하는 작업은 자연스럽게 공적 의미를 갖는 기록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고, 끝없는 생각의 실타래가 생성되었다.    

 

정재연, ‘Love Letters in Hyde Park’, PVC 디지털 프린트, 154 x 180cm, 2009, 도판 제공 = 정재연 작가

오래전 내게 소중한 기억을 남겼던 장소들이 지금도 남아 있을까? 만약 사라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곳을 한 번에 찾아갈 수 있을까? 그곳에서의 기억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을까? 기억은 그런 것이다. 기억은 내(우리)가 나(우리)일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은 -마치 지하 전시장에 설치된 커튼 위의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 이미지가 그렇듯- 부유하며 일렁인다. 흐릿해지고 종국에는 잊혀진다. 그러나 잊혀지기에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라는 역설이 가능한 것, 그것이 기억이다. 

 


“작품 놓인 곳은 전시공간인가 아닌가”
작가와의 대화


- 정재연의 작업 대부분은 미술을 위해 특화된 장소가 아닌 일상 삶의 공간에서 전시된다. 작가는 그 이유를 삶과 괴리된 채 개념과 담론으로만 설명되는 미술을 벗어나 사람들이 자신의 작업을 직관적으로 느끼길 원했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왕래하는 공공의 시공간에 일시적으로 개입하여 소통과 생각의 확장을 유도하는 작업들이 많다. 정재연이 생각하는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예술만을 위한 장소가 아닌 일상의 장소에서 작업을 진행(발표)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나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직접적이고 솔직한 반응을 보고 싶어서이다. 미술계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순수하게 여과 없이 드러나는 반응에 조금 더 흥미를 갖고 있다. 100%는 아니지만, 나 자신도 작가가 아닌 관객의 입장을 견지하려 노력한다. 미술대학을 다닐 때부터 소수의 전공자만 이해할 수 있는 어휘를 사용하는 것을 피해왔다. 나는 나의 작품이 예술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자연스럽게 마주하고 반응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나의 작업에 대중적 개입이 일어나는 것은 맞지만 사회정치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공공성을 실현하려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현재까지의 나는 공공성이라는 단어를 명확히 정의내리지 않고 있다. 정의내리지 않는다는 것이 고민하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것 자체가 공공적이라 생각한다.” 

 

- 정재연의 작품들은 매우 사적인 경험에 근거한 이야기들을 전달한다. 오늘날 많은 작가들이 작은 이야기에서 큰 이야기를 이끌어내려 한다. 모든 개인의 이야기(삶)에는 공적 의미가 담겨 있다. 집단(공동체)은 개인이 모여 형성되며 큰 이야기도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만들어진다. 정재연의 작업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까?  


“나는 가장 개인적인 것 안에 담긴 공적인 것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작고 사소해 보이는 사건 안에 존재하는 큰 문제를 인지하고 그것을 공론화하는 것이 공공성을 추구하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작은 이야기에도 귀 기울이게 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  

 

- 일부 작품에서 사실과 허구가 결합된 이야기를 진짜처럼 제시한다. 어떻게 보면 적극적으로 교묘하게 거짓말을 하는 작업이다. 검증되었다고 믿어지는 사실도 관점에 따라 그 의미가 바뀔 수 있다. 우리는 뉴스도, 역사도 완벽히 객관적이고 중립적일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충분히 공감 가능한 작업이다. 또한 숨겨진 사실(진실)을 발견하는 과정 속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적극적으로 생각을 확장시킬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는 작가의 상상이 덧붙여진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믿고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예상치 못한, 우리가 부정적이라 말하는 상황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는가?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은 늘 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작품을 경험한 모두를 따라다니며 사실을 알려주거나 해명한다면 그것은 작가의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계몽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 사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나의 작업에 존재하는 허구적 요소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고, 반전 영화가 주는 것과 유사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이 내 작업이라 이해해주면 좋겠다. 내가 작업을 위해 수집한 자료들은 매우 주관적이다. 주관적이라 함은 나의 관점에서 수집되고, 정리되고, 해석된 자료란 의미다. 엄밀히 말해 내가 수집하는 자료들은 나를 만나기 이전부터 주관적이었다. 자료를 기록하고 정리한 누군가의 영향 하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과연 완벽한 진실이란 게 가능할까? 작가의 관심이 지속되고, 그것을 마주한 관객의 관심이 지속되면 허구에 불과했던 상상의 영역에서도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현실과 허구 사이를 넘나드는 작업 방식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거부감 없이 전달하기 위한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 작가 본인은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이론과 무관한, 전문적인 담론으로부터 자유로운 작업을 통해 관객들과 관계 맺길 원했고, 그래서 공공장소로 나갔다고 했다. 또한 자신의 작업들이 작품으로 인식되지 못해도 괜찮다고도 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특징 때문에 ‘이게 정말 미술인가?’라고 당황하며 어렵고 멀게 느끼는 관객이 생길 수 있다. 또한 본인의 작업이야말로 물질성을 벗어나 개념으로 존재한다. 모순적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가? 


“일정 부분에서 모순적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나 역시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았으며 전문적으로 미술을 다루는 사람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진정한 나 자신과 집단(사회)이 인식하는 나 자신 사이의 괴리에 대한 고민이 있기에 나를 둘러싼 일상의 공동체와의 관계를 다루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 고민의 일환으로 이번 개인전에서는 철저하게 전시장이라는 공간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선보였다. 이번 전시만 본다면 내가 일상의 공간에 작품을 설치하여 공공성을 탐구하는 작가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긴 호흡으로 내 작업의 진행 과정을 봐줬으면 좋겠다. 작가가 일관되게 고민을 하고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시도하면, 그런 시도들이 자연스럽게 쌓여 조금씩 변화가 만들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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