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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 나홀로 여행 (187) 인도-방글라데시] 안 변하는 콜카타와 가슴아픈 다카…그래도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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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19호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8.12.24 09:54:20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1일차. (델리 → 콜카타)

반갑다 콜카타

느지막이 숙소를 체크아웃 했지만 아직 시간이 아주 많이 남는다. 공연히 버스를 타고 델리 시내 나들이도 한번 다녀오니 그럭저럭 저녁 7시 40분 콜카타 행 에어아시아 항공기 출발 시각이 다가온다. 그러나 덜컥 겁이 난다. 이번에는 항공기가 제 시간에 떠나 줄까? 어제 당한 곤혹스러운 상황이 트라우마로 남은 것이다. 인도 셀프 여행은 이토록 고되고 험하다.

콜카타 행 항공기는 만석이지만 제 시간에 출발한다. 2시간 남짓 걸려 콜카타에 도착하니 완전히 어두운 밤이다. 콜카타도 정신없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여행이 며칠 남지 않았고, 또 그만큼 집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작은 안도감이 인다.

게다가 콜카타는 이런 저런 연유로 세 번째 방문하는 곳이다. 10년 전 세계 여행을 시작했을 때 첫 목적지, 그러니까 인도 첫 발을 여기서 디뎠고, 두 번째로 몇해 전 인도 동북부 아삼(Assam) 지역과 네팔 여행 때도 콜카타를 중심으로 드나들었다. 이렇게 엉뚱하게도 콜카타 땅을 세 번 씩이나 밟게 될 줄은 몰랐다.

어둡고 질퍽거리는 밤길을 조심스레 걸어서 공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숙소를 찾아 들어간다. 초현대식 국제공항에서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거리에는 지난 수 백, 아니 수 천 년 이런 모습이었을 음험한 곳이 즐비하다. 10년 전 콜카타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비교해서 변한 것은 근사하고 거대하게 새로 들어선 공항 터미널 정도가 전부인 것 같다.

노스탤직 콜카타

당시 항공기 옆 좌석에 앉았던 이 지역 출신 해외 거주자 중년 신사가 고향 콜카타는 수십 년 전 자기가 고국을 떠날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모습이라고 푸념하며 나에게 건넨 말이 생각난다. 인도가 처음이라고 하니까 “너무 놀라지 마라. 음식 조심하라”면서 해주었던 솔직한 충고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내일 이른 아침 출발을 위하여 잠을 재촉한다. 방글라데시에서 나오는 길에 귀국 길 국제선 환승을 위하여 잠시 다시 들르기는 하겠지만 정식으로는 오늘이 인도 여행, 인도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지쳐서 떠나지만 분명 다시 그리워질 것이 분명하다. 이유는 인도에서도 가장 오래도록 인도의 모습을 간직한 도시, 바꾸어 말하면 가장 더디게 변하는 콜카타가 풍기는 예스러운 노스탤직(nostalgic)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여길 왜 왔나?” 싶을 정도로 비참한 풍경을 연거푸 만나게 되는 방글라데시지만, 이곳 사람들은 또 이렇게 웃으니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사진 = 김현주 교수

22일차. (콜카타 → 방글라데시 다카)

마침내 방글라데시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방글라데시(Bangladesh)에 도착했다. 콜카타에서 방글라데시 다카(Dhaka)는 항공기로 채 한 시간이 안 걸렸다. 면적 14만 4000㎢, 남한의 1.5배 면적에 1억 7000만 명, 세계 8위의 어마어마한 인구가 살고 있다. 도시 국가를 제외하면 인구 밀도는 단연 세계 1위(1278 명/㎢)이다. 세계적 인구 밀집국인 타이완(639명)의 두 배, 우리나라(487명)의 2.6배인 정말 빽빽한 나라다.

서쪽에 인도, 동쪽엔 미얀마, 북쪽에는 네팔과 부탄을 접하고 있는 이 나라 인구는 98% 벵갈인(Bengalese). 그래서 벵갈의 나라, 방글라데시이다.

좁은 국토, 거대한 인구

국토는 대부분 벵갈 델타(Bengal Delta), 즉 지구상에서 가장 넓다는 갠지스 삼각주 저지대에 놓여 있다. 미얀마 쪽 약간의 산지를 제외하면 국토 대부분이 해발 12m 아래에 놓여있는 만큼 비옥한 평야를 가지고 있어서 좁은 땅이지만 거대한 인구를 가까스로 먹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걸핏 하면 인도양 사이클론(cyclone)이 찾아들고 홍수와 해일 등 온갖 자연재해에 취약하다. 1991년 사이클론으로 14만 명이 사망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혹자는 2050년쯤 되어 해수면이 90cm 상승하면 이 나라 국토의 20%가 물에 잠기고 30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할 것으로 예측하기도 할 만큼 이 나라의 삶의 조건은 취약하다.

남인도와 동남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전략적 지정학 조건으로 인하여 그리스 로마 기록에도 등장하고 알렉산더 원정군까지 들어왔을 만큼 예로부터 바깥세상에도 이름을 알린 곳이다. 또한 티베트·버마족부터 드라비다족, 인도아리안족까지 2만년 이상 인류가 거주해 온 땅이다.

중국 당나라 초기 현장법사가 다녀갔을 정도로 한때는 불교가 융성했고, 이후 힌두교가 지배해 오다가 10세기 무렵 무슬림들이 도착하여 1204년부터는 무슬림 통치가 지속된 곳이다. 17세기까지 무굴 제국이 통치하며 다카(Dhaka)를 요새화하고 수도로 정했다.

참혹했던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1757년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 이후에는 영국 동인도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의 수중에 들어갔다. 1947년 영국령 인도의 분할로 벵갈이 둘로 나뉘어 East Bengal은 파키스탄과 합체하여 연방을 구성했다. East Bengal은 1954년 동파키스탄(East Pakistan)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71년 12월 독립을 이룬다. 동파키스탄 시절이던 1971년 3월 이곳 사람들의 독립 요구에 파키스탄은 군대 개입으로 응수했고, 30만~300만 명 인명 학살로 추산되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서야 독립을 이룬 이른바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Bangladesh Liberation War)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서방을 중심으로 세계는 방글라데시 독립을 지지했고 인도까지 가세하면서 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에서 손을 떼고 9개월간의 잔인했던 전쟁도 끝났다.

다카 공항 입국장의 난센스

도착 비자 미화 51달러를 지불하자 금세 입국 일보 직전이다. 거기까지는 문제없었다. 그런데 입국 심사 줄이 매우 길다. 한 중년 남성이 다가와 줄서지 않고 입국장을 빠져 나가게 해주겠단다. 난센스다. 어떻게 절차도 밟지 않고 남의 나라에 입국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이민 제한 구역에 버젓이 명찰을 단 채 마음대로 드나드는 저 남성은 누구란 말인가? 금세 알게 되었지만 당초 나는 도착 비자를 받는 순간 이미 입국 수속이 완료되었으니 긴 줄을 설 필요 자체가 없었다.

공항 입국장은 해외 노동을 마치고(또는 휴가로) 고국을 찾은 근로자들로 가득하다. 그 중에는 분명 한국에서 돌아오는 사람들도 제법 있으리라. 파견지에서 사가지고 온 각종 가전, 생활용품 수하물이 산을 이룬다. 돌아오는 이들을 맞으러 모든 식구가 총출동 했으니 복잡한 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우리도 과거 자주 보았던 한국의 1970년대 모습 그대로이다.
 

사다르가트 강의 보트들이 펼치는 장관. 그러나 너무 무덥고 습해 손이 쩍쩍 달라붙고, 소음과 썩는 냄새는 견딜 수 없을 정도다. 사진 = 김현주 교수

환전 노하우 팁

숙소가 있는 시내까지는 거리가 멀다. 택시 이외에는 마땅히 교통수단은 없고 비는 거세게 오는 최악의 상황이다. 잠시 비를 피하며 기다린다. 큰길로 나가 이리저리 탐색하던 중 운 좋게도 숙소 가까이 가는 버스를 만났다. 버스 차장의 배려로 편하게 자리도 잡았다. 숙소 체크인 하기 전에 숙박비 결제를 현금으로 할까 신용카드로 할까 궁리를 했는데 공연한 짓이었다. 당연히 현금이다. 제3세계에서는 특급 호텔이나 최고급 식당이 아닌 한 언제나 현금이다. 적절한 양의 현금을 늘 지참하고 다녀야 하는 이유이다.

나는 쓰다 남은 약간의 인도 루피화(INR)를 공항에서 방글라데시 타카(BDT)로 환전하고 ATM에서 앞으로 사흘간 쓸 만큼의 현지 돈을 인출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해외 여행에선 ATM이 최고다. 은행 ATM 체크카드는 여행자의 필수품이다. 전 세계 어느 도시든, 크든 작든, ATM이 통하지 않은 곳은 없었다.

열악한 인프라

버스에서 내려 숙소까지 가는 길. 멀지 않은 거리이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이 나라 서민들의 삶을 처절하게 목격한다. 철도 위 보행교는 양 옆에 허름한 노점상, 행상, 걸인들로 가득하니 가뜩이나 좁은 보행로가 제 구실을 못한다. 독립한 지 50년이 되었지만 아직 먹고 살기에도 급급한 이 나라는 해놓은 것이 거의 없어 보인다.

이 나라 양대 도시 다카와 치타공(Chittagong)을 연결하는 철도는 영국 시절 남겨진 궤도 폭 1m짜리 협궤로 운영되고 있을 정도이다. 마침 지나는 교외 통근 열차는 객실만으로는 부족해 수많은 사람들이 기관차, 객차 지붕 위에, 그것도 선 채로 간다. 시원하기는 하겠지만 보기에 아슬아슬하다. 거리는 모두 언제나 꽉 막혀 있다.

사이클 릭샤(운전자가 페달을 밟아서 움직이는 인력거)는 이 도시의 보편적 교통수단이다. 이 도시에만 사이클 릭샤가 40만 대 있다고 한다. 택시도 구경하기 힘든 이 도시에서 유일한 단거리 교통수단이다. 마침 지금 7월은 몬순 시즌, 거의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퍼붓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니 도시는 모든 곳이 진흙탕이다. 그러나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른다. 겨울철 건기에는 이 모든 것이 먼지 구덩이로 변할 테니까 말이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행복 지수

숙소 체크인 후 한숨 돌리고 도시 탐방에 나선다. 문제는 도시를 탐방하는 방법, 즉 교통수단이다. 버스들은 자주 있지도 않거니와 행선지 표기가 벵갈어(벵갈 문자)로만 되어 있다. 일일이 물어 보고 타는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버스는 언제나 사람이 많아서 탈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어컨은 당연히 없다. 저런 상태의 버스가 어떻게 제대로 가고 서고 할 수 있을지 염려되지만 노련한 운전기사들의 솜씨는 수십 년 되었을 낡은 버스의 상태를 개의치 않는다.

그래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밝은 얼굴이다. 세계에서 행복 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 아닌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을까? 우리는 우수한 생활 환경에서도 웃지 않고 사는데 말이다. 바로 이 근본적인 의문을 계속 떠올리며 지낸 방글라데시에서의 사흘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덥고 끈쩍거리고 진흙탕 투성이인 올드 다카의 시내 풍경. 엄청난 인구밀도에 먹고살 것은 부족하니 인간의 존엄성을 찾기 힘들다. 사진 = 김현주 교수

올드 다카 풍경

올드 다카(Pulan Dhaka) 한복판 중앙시장에는 없는 게 없다. 조악하지만 티셔츠는 100타카(한화 1200원)일 정도이다. 사다르가트(Sadarghat) 리버 프론트 페리 선착장을 찾아간다. 부리강가(Buriganga) 강 건너편, 그보다 더 멀리 강 따라 이어지는 수많은 도시들을 오가는 페리 수십 척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강을 건너는 작은 보트 수십, 수백 척이 강을 가득 메우다시피 한 장관이 펼쳐진다. 난생 처음 보는 독특한 이 풍경을 어떻게 글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날이 너무 무덥고 습해서 손이 쩍쩍 달라붙는다. 소음도 소음이지만 푹푹 찌는 날씨에 부둣가에서는 모든 것이 함께 썩어가니 그 냄새는 더욱 견딜 수 없다.

사진을 찍다 보니 현지인 여럿이 내 주위에 몰려들어 자기 모습도 담아 달라고 한다. 외국인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모습이 신기한가 보다.

 

아산 만질 궁전은 인도 사라센 양식으로 지어진 멋진 건축물이다. 사진 = 김현주 교수

가트에서 멀지 않은 아산 만질 박물관(Ahsan Manzil Museum)에 들른다. 인도 사라센 양식의 멋진 건축물은 과거 왕궁으로 쓰였으나 왕조의 몰락 이후 폐허가 되다시피 방치되었던 것을 정부가 복원하여 박물관으로 재탄생시켰다. 주변 토지까지 사들여 완벽하게 복원한 덕에 여기가 방글라데시라는 것을 잠시 잊게 만드는 주변 환경이 일품이다.

금요일 저녁을 맞았지만 갈 곳이 없는 이 도시 청춘 남녀들이 모두 모여 데이트를 즐긴다. 근처에 아르메니아 교회가 있을 것 같아 릭샤 기사에게 물으니 모른단다. 먹고 살기에도 바쁜데 몇 백 년 전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 따위를 알 턱이 없다.

다카의 택시, 사이클 릭샤

숙소로 돌아갈 때는 피곤하고 길도 몰라서 릭샤를 탔다. 릭샤는 잔인한 교통수단이다. 높다란 안장에 올라앉은 승객 바로 아래에서 메마른 청년이 혼신의 힘으로 페달을 밟아댄다. 즐기기에 앞서서 미안하고 죄스럽기까지 하다. 온통 패인 웅덩이 투성이인 불량한 노면을 릭샤를 끌고 간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닌 듯하다.

릭샤 기사는 목에 감고 있는 수건을 짜가며 연신 땀을 닦아낸다. 2km쯤 이동한 후 기사에게 100타카(1300원)을 주니 고마워한다. 이 정도 거리라면 현지인들은 60타카(800원)를 준다고 한다. 그렇게 하루 종일 벌면 얼마를 벌까? 1만 원? 운이 억세게 좋아서 손님이 끊어지지 않는 날은 1만 5천 원쯤? 몸이 부서질 때까지 일한 것치고는 처량하게 적은 돈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매일 이렇게 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연민이 치밀어 온다.

오후 나절 길지 않은 도시 탐방이었지만 몸은 지쳐서 녹초가 되었다. 숙소 근처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한다. 이 지역 기준으로는 괜찮은 식당이지만 한 끼 식사에 100타카(1300원) 남짓. 물론 식사 내용은 변변치 않다. 한창 공부할 나이의 어린 아이들이 가져온 음식을 먹으려니 또 한 번 가슴에 못이 박힌다. 방글라데시에 오지 말았어야 했나?


악몽을 꾸는 듯 전혀 다른 세상을 겪고 있다. 수도 다카만 해도 인구가 1800만 명. 먹을 것 없는 좁은 땅에 1억 7000만 명이 살고 있으니 당초 인간의 존엄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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