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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전시] 익숙함과 낯섦 사이의 ‘인연’ 그리는 민정기 작가

국제갤러리서 구작-신작 아우르는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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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26호 김금영⁄ 2019.01.29 17:27:37

민정기 작가.(사진=김금영 기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익숙한 것 같은데 낯설다. 민정기 작가의 그림을 본 느낌이다. 도심과 자연이 어우러진 풍경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세계 같지만, 또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묘한 기시감을 준다.

국제갤러리가 민정기 작가의 개인전을 3월 3일까지 연다. 이번 전시는 회화의 영역에서 풍경을 소재로 다양한 관점들을 다뤄 온 작가의 예술 여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구작 21점과 신작 14점을 소개한다.

 

민정기 작가의 작품이 설치된 전시장.(사진=김금영 기자)

작가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을 현실적이면서도 인문적인 성찰의 결과로 재해석하는 데 관심을 가져 왔다. 특히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자연의 풍경이다. 산세, 물세 같은 지형적 요소와 그 안에 어우러진 인간의 흔적을 주로 다뤘다. 반면 이번 전시는 자연에서 도심으로 시선을 옮겼다. 조선시대 이후 수도였던 서울 시내에 산재한 건축물이나 터를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재구성했다. 종로구에 위치한 청계천, 사직단, 세검정, 백사실계곡 등이 신작에 담겼다.

이처럼 도시 풍경으로 시선을 옮겼을 지라도 여전히 그의 화면엔 이와 함께 어우러지는 자연이 눈에 띈다. 사직단을 그린 풍경에서도 전면에 사직단이 배치됐지만 그 뒤를 광활한 인왕산이 품고 있는 모양새다. 작가는 “경복궁에서 사직단으로 향하는 길에 지금은 도로가 깔렸지만 옛날에 개울 등 자연이 있었다. 사람들은 건물만 보고 이 길을 올라가는 게 아니라 인왕산의 자연 풍경을 보며 올라갔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회화의 영역에서 풍경을 소재로 다양한 관점들을 다뤄 온 작가의 예술 여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구작 21점과 신작 14점을 소개한다.(사진=김금영 기자)

또 다른 그림에서는 건물이 부서지고 새로 세워지는 가운데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인왕산의 거대한 존재가 돋보인다. “어떤 터든, 길이든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작가는 자연 또는 인간의 흔적 중 한쪽에 편향돼 다른 요소를 배제하지 않고 변화의 역사를 오롯이 읽어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작가의 설명을 들으면서 묘한 기시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현실을 기반으로 하되 작가적 상상력을 더한 풍경들이 전시장을 채웠다. 신작 ‘청풍계 1~2’(2019)의 경우 대한제국의 관료였던 윤덕영이라는 인물이 일제강점기에 인왕산 자락에 지은 600평 규모의 프랑스식 건물을 예전의 지형을 바꾸고 가파르게 들어선 다세대 주택들과 병치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민정기, ‘묵안리 장수대’. 캔버스에 오일, 211.5 x 245cm. 2007.(사진=김영일, 이미지 제공=국제갤러리)

작가는 “윤덕영은 그 집에 입주도 못한 채 운명했으며 그 후 건물은 여러 쓰임새로 사용되다가 화재로 소실돼 1970년대에 철거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화면엔 이 건물이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한 가운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작가는 “관련 사료 연구와 답사, 그리고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해 과거의 시간을 현재에 복구해 보여주는 화면들로 재구성했다”고 말했다.

없어진 건물이 그림에 다시 등장한 이유

 

민정기, ‘청풍계 1’. 캔버스에 오일, 130 x 162cm. 2019.(사진=안천호, 이미지 제공=국제갤러리)

파괴된 경희궁을 복원해 놓은 그림과 과거 경희궁의 자리를 채웠던 서울고등학교를 함께 배치한 화면도 눈길을 끈다. 작가는 “일제강점기에 경희궁이 파괴되고 그 자리에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섰었다. 지금은 사라진 서울고등학교를 그려 넣었다”고 말했다. 없어진 건물을 굳이 화면 위에 되살린 연유에 대해서는 “역사를 반성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작가가 그린 화면들에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가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경희궁 터는 뼈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지난해 남북 정상 간 판문점 선언의 서명식이 이뤄진 판문점 평화의집에 걸린 작가의 2007년 작 ‘북한산’은 평화의 의미를 전했고, 이번 전시에서도 경희궁을 비롯해 사직단, 청풍계 등이 등장했다.

 

민정기, ‘백세청풍 2’. 캔버스에 오일, 197 x 142cm. 2019.(사진=안천호, 이미지 제공=국제갤러리)

‘박태원의 천변풍경 1~3’(2019)에서는 청계천의 변모 과정이 눈길을 끈다.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을 바탕으로 그린 이 그림은 세 화면으로 구성됐는데 이발소 뒤에 비치는 배경으로 군사정권 당시 청계천을 덮는 공사 장면, 덮었던 청계천을 다시 걷어내고 물길을 만드는 장면, 아주 오랜 과거 사람들이 빨래를 하던 청계천의 장면이 담겼다.

작가에게는 이 장소들이 단순히 재현 대상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잇는 도구와도 같다. 사라진 역사의 흔적을 현재 존재하는 풍경에 섞어놓으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과거를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게 하는 것.

 

파괴된 경희궁을 복원해 놓은 그림(왼쪽)과 과거 경희궁의 자리를 채웠던 서울고등학교를 함께 배치해 놓았다.(사진=김금영 기자)

해당 장소의 지형적, 지리적, 인문학적 지식이나 역사성에 주목해 그 장소만의 독자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작가는 그림의 대상을 정하면 그곳에 수차례 답사를 가고 관련 자료를 조사한다고 한다. 1987년 서울에서 경기도 양평으로 스튜디오로 이전한 이후 작가는 산과 그 안에 터를 내린 사람의 흔적을 더욱 집중적으로 다뤘다. 지명이나 고유명사로 이뤄진 작품 제목들을 통해 그가 관심을 가진 장소들을 읽을 수 있다. 최근엔 산세뿐 아니라 강물, 도로, 나아가 도심의 공간까지 관심 범위가 더욱 확장되고 있다. 실제로 작가는 해당 작품을 소개할 때마다 마치 역사책을 읽어내듯 장소에 대한 지식을 쏟아냈다.

국제갤러리 측은 “작가는 예전 것들을 통해 오늘날의 모습을 그린다. 그의 그림이 익숙하고도 낯선 이유는 그의 그림이 과거와 현재, 현실과 가상을 모두 다루면서 우리의 역사를 읽기 때문”이라며 “이는 예전 것들을 통해 오늘날의 모습을 그린다는 의도를 반영하며, 따라서 과거를 향한 회고나 노스탤지어와는 거리가 멀다”고 밝혔다.

 

그림에는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본 풍경이 한 화면에 동시에 구성돼 눈길을 끈다.(사진=김금영 기자)

이번 전시에서는 마치 스토리텔링처럼 이어지는 그림 구성도 눈길을 끈다. 신관 K2 전시장 2층에서 만난 이포나루터는 K3 전시장에도 등장한다. 같은 장소이지만 다른 시점에서 바라본 구도와 작가의 각색으로 또 다른 이포나루터를 만나는 듯 색다른 느낌을 준다. 청풍계를 그린 그림 또한 K2 1층과 2층 전시장에 각각 전시됐다. 2층에 설치된 그림에서는 현재 있는 인력개발원 건물을 빼고 예스러운 느낌의 건물들을 그림에 집어넣는 각색을 했다. 그래서 전시장을 이동할 때마다 책을 읽듯 그림에서 스토리텔링이 느껴진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뿐 아니라 기법적인 측면에서도 서양과 동양을 넘나드는 작가의 시도도 인상적이다. 작가는 유화 물감과 서양의 조형어법을 통해 고지도나 산수화, 병풍 등의 방식을 차용해 재해석한다. 과거의 방식들이 그림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나 주제에 적합하고 유용하다고 판단한 결과다.

 

‘박태원의 천변풍경 1~3’(2019)은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을 바탕으로 그려진 그림이다.(사진=김금영 기자)

예를 들어 ‘유 몽유도원’(2016)은 조선 초기 안견의 몽유도원도 이미지 위에 현재의 부암동 풍경을 병치시킴으로써 부암동의 태곳적 지세와 변모된 현실 풍경을 극명하게 대비해 보여준다. ‘수입리(양평)’(2016)은 동양화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전통적인 부감법과 투시도법을 재해석하며 산과 강의 현재적 상황을 민화적으로 풀어냈다. 각각 3매와 6매로 구성된 연작 ‘사직단이 보이는 풍경’(2019)이나 ‘인왕산’(2019)은 큰 화면을 그릴 때 감수해야 하는 불편함을 극복하고자 익숙한 병풍의 형식에 착안, 여러 개로 나눠진 화폭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지역의 지형적 정보, 역사적 지식, 서사성 등이 모두 한 화폭에 어루러진다.

작가에게 작업은 스스로 ‘인연’이라 칭하는 작품과 본인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필연성을 확인하는 과정이라 한다. 몸소 다녀봐서 기억하고 있는 길들을 작가적 상상력과 결합시켜 새로운 인연의 길을 화면 위에 펼쳐간다. 미술이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힘든 심미적 대상이기보다 일상의 언어처럼 대중이 공감하는 정서나 진실을 소통하기 위한 도구 역할을 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이처럼 인연을 쌓으면서 이어져간다.

 

민정기, ‘여주 이포나루’. 캔버스에 오일, 158 x 363cm. 2011.(사진=김영일, 이미지 제공=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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