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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전시] 베트남인이 일본어로 낭독한 ‘2·8 독립선언문’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관 ‘모두를 위한 세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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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김금영⁄ 2019.03.13 17:09:54

아흐멧 우트는 전시장 도입부에 경사진 공간을 설치했다. 벽면엔 스케치들이 걸렸는데, 작가가 만든 가상의 국가 이야기를 담았다.(사진=김금영 기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자리가 전시, 공연, 행사 등 다양한 형태로 문화계에서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이 ‘2019년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마련한 ‘모두를 위한 세계’전 또한 여기에 포함된다. 그런데 전시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이항대립 관계 아래 이야기를 풀지 않는다. 국가, 민족에 구애받지 않고 국제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는 코스모폴리타니즘적 측면에서 3·1운동에 접근한다.

서울시립미술관 이지민 학예연구사는 “3·1운동은 만주 지린, 일본 도쿄, 프랑스 파리, 중국 상하이 등에 흩어져 있던 유학생들의 총체적 움직임으로 열린 한민족 독립 운동의 서막”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3·1운동이 지닌 세계사적 의의는 중국의 5·4운동뿐 아니라 인도, 필리핀, 동남아시아, 아랍 지역의 민족 운동과의 연관성으로 연구된 바 있다”며 “이에 결부해 전시는 3·1운동을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범세계적 움직임의 일부이자 세계사와 함께 흘러온 ‘인권신장 운동’의 일환으로 해석한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아흐멧 우트는 트램플린에 1995년 7월 같은 시기 전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일들을 담은 이미지를 설치했다.(사진=김금영 기자)

전시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터키, 일본, 대만, 베트남, 덴마크 국적의 작가들이 참여한다. 이들 모두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키는 미시적 이야기들에 집중하며, 다양한 국가 통치 아래에서 드러나는 각자의 정체성을 발현한다.

터키 출생의 아흐멧 우트는 전시장 도입부에 경사진 공간을 설치했다. 마치 등산을 하듯 가파른 경사가 진 이 공간에서는 중력이 무력화 되는 느낌이다. 전시장 2층에 설치된 트램플린 또한 마찬가지. 본래 트램플린은 하늘 높이 뛰어오를 수 있도록 하는 도구이지만, 성인의 가슴팍 높이로 매우 높게 설치된 트램플린은 본래 주어진 기능을 이행하지 않는다. 즉 작가는 비뚤어진 경사, 변형된 트램플린을 통해 만유인력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통치와 억압의 요소를 무력화 시키고,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가며 희망적 진보를 이야기하는 시도를 한다.

 

제인 진 카이젠은 제주 4·3사건의 파편적 기억과 억압된 역사를 조망하는 영상 작업을 전시한다.(사진=김금영 기자)

먼저 경사진 공간의 벽면엔 스케치들이 걸렸는데, 작가가 만든 가상의 국가 이야기를 담았다. 국민국가(민족국가, nation-state)의 개념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된 스케치는 가짜 여권과 대사관 그리고 인공 대지에 대한 이야기를 묘사한다. 이를 통해 국가가 얼마나 허구적인지 유머러스하게 비꼬며 동시에 서구 문명을 인류 보편으로 간주하는 서구중심주의를 비난한다. 트램플린에는 1995년 7월 같은 시기 전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일들을 담은 이미지를 설치했다. 작가는 “다시 한 번 들여다봐야 하는 사건들을 위주로 이미지를 선정했다. 한국에서는 이 시기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며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 각 이미지들은 반복되는 역사를 느끼게도 한다”고 말했다.

제인 진 카이젠은 한국 제주도에서 태어난 뒤 덴마크에 입양됐으며, 현재 베를린에 거주하며 활동하는 독특한 삶의 이력을 지녔다. 여러 나라에서 역사를 경험한 그는 ‘거듭되는 항거’에서 1948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발생한 제주 4·3사건의 파편적 기억과 억압된 역사를 조망한다. 인명 피해 규모가 2만 5000~3만 명으로 추정되는 이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 전쟁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된 불행한 사건이다. 작가는 수많은 민간인에 대한 대량 학살이 일어났음에도 50년 동안 외부로 드러나지 않은 채 여전히 논쟁으로 남아 있는 사건의 진실과 숨겨진 정치적 동기를 드러내고자 한다.

 

응우옌 트린 티는 베트남의 공식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숨겨진 종족인 참파 왕조에 대해 다룬 영상 작업 ‘판두랑가에서 온 편지’를 보여준다.(사진=김금영 기자)

작품은 여러 개의 영상이 둥그런 원의 형태로 둘러앉은 것처럼 구성됐다. 각 영상은 4·3사건과 관련된 인터뷰, 뉴스, 생존자들과 친척들의 기억,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매개하는 무당의 제의 등 다양한 서사를 지녔다. 각 서사는 4·3사건이라는 하나의 공통점을 지녔지만, 이로 인한 트라우마는 조화를 완벽하게 이루지 못하는 모양새다. 그럼에도 한자리에 모인 영상은 서로 공명하는 시도를 한다.

한국-일본 이항대립 관계서 더 나아가
국제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는 3·1운동

 

윌리엄 켄트리지가 2차 세계대전 무렵의 인구 이동에서 받은 영감을 투영한 7채널 영상 설치 작품 ‘더욱 달콤하게 춤을’.(사진=김금영 기자)

베트남에서 태어난 응우옌 트린 티는 독립 영화 제작자이자 영상/무빙 이미지 예술가로 활동해 왔다. 그는 숨겨지거나 오독된 역사를 폭로하는 기억의 역할과 베트남 사회 내 예술가의 위치를 탐구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베트남의 공식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숨겨진 종족인 참파 왕조에 대해 다룬 영상 작업 ‘판두랑가에서 온 편지’를 보여준다. 참파는 2세기 말엽부터 17세기 말 베트남 중부부터 남부에 걸쳐 인도네시아계인 참족이 세운 나라로, 현재는 베트남의 침공으로 없어졌다. 그 중에서도 베트남의 최남단에 위치해 참파의 마지막 생존 영토였던 닌투언에 살았던 참족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영상에는 푸른 대지와 바다 등 아름다운 풍경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이 가운데 정체불명의 주체가 서로 주고받는 음성 편지가 흘러나오는데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과 베트남 전쟁 동안 만연했던 미국의 파괴적인 폭격 등의 내용을 담았다. 영상이 보여주는 풍경이 아름다울수록 이 음성 평지는 역사 속 식민주의의 잔혹함을 더욱 드러낸다.

 

야오 루이중의 영상에서는 “만세”라는 소리가 반복해서 들린다. 처음엔 영상에 보이는 장소에서 들리는 소리인 줄 알았지만 영상이 전개될수록 영상에 차마 잡히지 않은, 건너편으로부터 “만세” 소리가 들려 왔음을 깨닫게 된다.(사진=김금영 기자)

윌리엄 켄트리지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에 강력히 반대했던 변호사 부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 펠리셔 게펜은 흑인들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법률 센터를 설립했고, 아버지 시드니 켄트리지는 넬슨 만델라를 비롯한 인종 차별 반대 운동가들과 인종 차별 피해자들을 변호했다. 마임과 연극을 전공하고 동시에 정치학과 아프리카학을 공부한 켄트리지의 작품 속에 사회적 억압과 불평등에 관한 문제의식이 스며든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자신은 백인이지만 백인으로서 느끼는 인종차별 이야기를 작품에 가감 없이 드러낸다.

‘더욱 달콤하게 춤을’은 그가 르완다 피난민, 발칸반도 탈출 행렬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무렵의 인구 이동에서 받은 영감을 투영한 7채널 영상 설치 작품이다. 특히 춤과 노래를 이어가며 무언가를 애도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림자로 묘사된 점이 눈길을 끈다. 인종으로 인류를 구분 짓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기본 단위로 실체를 규정하며 동등하게 표현하려 한 작가의 의도다. 끌려가는 시신들은 아프리카에 창궐했던 에볼라나 페스트의 희생자, 수세기에 걸친 중세 억압의 희생자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 작품의 모든 요소는 지배와 폭력을 이겨내는 일련의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야오 루이중은 유럽, 미주, 캐나다,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등을 여행하며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차이나타운을 방문하며 느낀 고립감과 정체성의 형성 과정을 파고든다.(사진=김금영 기자)

대만 출생의 야오 루이중은 사진, 설치, 회화를 통해 인간 조건의 부조리함을 탐구한다. 이번 전시 제목이기도 한 작업 ‘모두를 위한 세계’는 영상, 사진 작업으로 구성된다. 영상에서는 “만세”라는 외침이 반복된다. 처음엔 영상에 보이는 장소에서 들리는 소리인 줄 알았지만 영상이 전개될수록 영상에 차마 잡히지 않은, 건너편으로부터 “만세” 소리가 들려 왔음을 깨닫게 된다. 즉 “만세”라는 의지의 외침이 어느 특정 한곳에서가 아니라 전 세계적 외침이었음을 피력한다.

사진 작업에서는 차이나타운이 눈길을 끈다. 작가는 유럽, 미주, 캐나다,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등을 여행하며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차이나타운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작가는 자국민들의 경계심과 오해로 인해 고립되기도 하는 차이나타운의 현실을 마주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차이나타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독립된 공동체로 살아가고도 있었다. 즉 작가에게 차이나타운은 스스로를 타자화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굳건히 고수한 상징으로서 기능했다.

 

일본 작가 히카루 후지이는 베트남인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2·8 독립선언서’를 선보인다.(사진=김금영 기자)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건 일본 작가 히카루 후지이의 작업이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당신은 몰랐던 이야기’전에서도 작가는 워크숍 참가자들에게 제국주의 시기 일본인을 연기하도록 하는 ‘일본인 연기하기’ 작업을 선보이며 일본의 제국주의 역사 문제를 끌어온 바 있다. 이번엔 일본에 거주하는 베트남인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2·8 독립선언서’를 선보인다. 어떤 학생은 유창하게, 또 다른 학생은 매우 띄엄띄엄 독립선언서를 읽어간다. 이번 전시를 위해 작가는 도쿄의 2·8 독립선언 기념자료실을 수차례 방문하며 연구했다 한다.

그는 “전시 의뢰를 받고 참여 결정이 쉽진 않았다. 하지만 사회와 역사가 맺는 밀접한 관계의 산물이 예술이고, 나는 예술가로서 다양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이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여전히 일본 내에 산재돼 있는 일본 제국주의 역사의 문제를 꼬집었다면 이번엔 아시아 지역으로 더 시선을 확장했다”고 말했다. 영상의 주인공들이 베트남인인 이유다.

 

히카루 후지이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일본 사회에 만연한 불의와 불평등을 ‘이민’이라는 제 3의 축을 도입해 풀어낸다.(사진=김금영 기자)

작가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일본 사회에 만연한 불의와 불평등을 ‘이민’이라는 제 3의 축을 도입해 풀어낸다. 작가는 “일본에 이민 온 베트남인이 열악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일하는 등 오늘날 일본엔 또 다른 모습의 불평등 구조가 드러난다. 이들의 목소리로 1919년 300명이 넘는 한국인이 모여 선언했던 2·8 독립선언을 새롭게 인식시킨다”고 설명했다. 불합리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던 2·8 독립선언은 작가의 작업으로 인해 다시 읽히며 식민지배의 주체가 됐던 제국주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유도한다.

이지민 학예연구사는 “이번 전시는 피지배계급의 삶에 근거를 두는 문화론적 연구에 주목하며 전개된다. 계급이나 불평등을 거부하고 무시받은 집단의 문화를 회복하는 노력의 문화론적 연구는 3·1운동의 정신 또한 고스란히 대변한다”며 “이번 전시가 역사의 재해석을 도모하는 계기를 제공함과 동시에 3·1운동을 전 인류적 움직임에 위치시키는 연구의 단서가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전시는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5월 2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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