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영⁄ 2019.07.30 14:59:40
(CNB저널 = 김금영 기자) 마치 선사시대 동굴 벽화 같은 우둘투둘한 한지의 질감 위 그려진 단조로운 선들. 가나아트가 단순한 선과 원초적인 색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노은님 작가의 개인전을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8월 18일, 가나아트 한남에서 8월 4일까지 연다.
한국 여성작가로서는 최초로 국립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의 정교수로 임용돼 20여 년 동안 독일 미술 교육에 기여하고, 바우하우스, 베를린 세계 문화의 집, 베를린 도큐멘타, 국제 평화 비엔날레, 제5회 국제 종이 비엔날레 등에 초대된 바 있는 작가는 ‘파독 간호사 출신의 화가’로도 불린다. 작가 또한 이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역마살이 잔뜩 끼어서 돌아다니는 게 내 일이었는데 1970년 간호보조원으로 독일에 갔다. 간호보조원 일이 끝나고 시간이 남을 때 혼자서 그림을 그렸는데 내 그림을 본 동료들의 도움으로 미술대학에 진학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파독 간호사 출신의 화가’라는 꼬리표에 동의하지는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한국에서는 아직 나를 파독 간호사라 부르지만, 독일에서는 이 용어를 쓰지 않는다. 나는 그냥 화가 노은님이다. 독일도 내가 원해서 갔던 것”이라며 “영화 ‘국제시장’에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엄청 힘들었던 것처럼 그렸는데 나는 당시 상황이 꽤 괜찮았다.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독일 병원이었다”고 말했다.
작가가 관심을 갖고 그린 건 생명의 힘을 내뿜는 모든 존재들이었다. 그는 간호사 경력과 그의 작품 세계가 큰 연관이 없다 했지만, 생명의 소중함을 항상 마음에 품고 임하는 삶이었기에 자연스러운 접점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작가는 “풀 밑에 사는 존재들에 항상 관심이 갔다”고 말했다. 하늘을 나는 새, 물을 헤엄치는 물고기, 나무에 매달려 푸름을 더하는 나뭇잎 등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생명의 기운을 내뿜었다.
특히 작가는 이 생명의 기운을 원시적인 시간들에서 느꼈다 한다. 그는 “특별한 계획 없이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지구 한 바퀴 정도의 거리를 돌며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살폈다”며 “이 여행의 도중 우리 인간은 지구에 잠깐 살다 가지만, 지구 자체는 수천억 세월을 변화 없이 그 자리에 존재하고 살아왔다는 걸 느꼈다. 이 점을 느끼게 해준 곳이 민속박물관”이라고 짚었다.
작가는 “민속박물관에 전시된 동굴벽화 등을 보면 아주 먼 과거의 사람들은 서로 문화 교류가 전혀 없을 때에도 비슷한 생활 습성을 갖고 살았다는 것이 발견된다. 살아가기 위한 본능에 의해 시작됐지만, 지금 돌아보면 이 본능이 예술의 기초를 닦았고 현재에 이르렀다고 느꼈다”며 “이런 예술과 생명의 힘은 동양, 서양 크게 차이가 없다. 세계가 한 마을로 사는 느낌이었다. 이 느낌에 내 상상을 더해 그림을 그렸다. 그릴수록 생명의 힘이 신비스럽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우주의 시작은 어땠을까?”
작가의 상상에서 비롯된 ‘생명의 시초’
이 점이 잘 느껴지는 작업이 전시장 초입에 걸린 ‘생명의 시초’(1984)다. 우주의 시작, 즉 태초란 이랬을 것이라는 작가의 상상력이 담긴 작품으로, 200호의 대형 화면을 가득 채운 화살표들은 각각의 방향으로 흐르는 힘의 양상을 상징한다. 여러 갈래로 제각기 흩어진 힘의 흐름이 서로 부딪히고 교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뛰는 동물’(1984)과 ‘나무가 된 사슴’(2019)은 밑그림 없이 단 한 벗의 붓질로 완성된 작품들이다. 일필휘지의 붓놀림이 만들어 낸 원초적인 생명력이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어둠 속 동물들의 연회를 그린 듯한 ‘밤중에’(1990) 또한 강한 생명력을 내뿜는다. 작가는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다. 힘이 모여 땅이 갈라지고, 그 사이 물이 흐르고, 생명이 꽃핀다”며 “나는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아직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내가 그리겠다고 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궁금한 대로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작가의 작업은 유화, 한지에 그린 흑백의 아크릴화, 설치미술, 퍼포먼스, 테라코타 조각,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에 이르기까지 매체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는 함부르크 국립 미술대학에서 수학하던 시절 교수로 재임 중이던 백남준, 요셉 보이스 등에게 영향을 받아 1970~80년대 퍼포먼스 작업도 다수 행했다. 그 생생한 기록이 이번 전시장에서 상영되는 바바라쿠젠베르그의 다큐멘터리 영화 ‘내 짐은 내 날개다’(1989)에 펼쳐진다.
이 영상에서 작가는 함부르크의 한 공원에서 나뭇가지와 종이로 만든 나뭇잎을 실제의 나무에 매단다든가, 합판으로 만든 강아지를 끌고 산책을 가는 등의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이는 인간이 만들어낸 예술과 자연이 교차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작가가 퍼포머들에게 비늘, 나뭇잎, 날개 등을 붙여 물고기-인간, 나무-인간, 새-인간으로 변모시켜 인간과 자연의 결합을 실험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작가의 작업의 근간이 자연, 즉 생명에 있음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작가는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많은 걸 느꼈다. 크게 생각하고 바라보면 무서운 세상 같다. 하지만 많은 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수많은 생명의 힘들의 흐름이 경이롭고 신비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16살 사춘기 때부터 “너는 왜 그리 생각을 많이 하니?”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고민과 생각이 많았다는 작가는 이제 생각을 하기보다, 자연스럽게 생각이 나는 곳으로 붓질을 행한다. 작가는 “세상에 벽을 쌓고 살다가 이젠 세상에 편안하게 놓인 기분”이라며 앞으로도 자유롭게 붓질을 이어갈 의지를 밝혔다.
한편 이번 전시는 올해 11월 현재 작가의 작업실이 위치한 미헬슈타트의 시립미술관에 그의 작품을 전시하는 영구 전시관 개관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됐다. 자연과 생명을 주제로 한 작가의 1980~90년대 대형 회화, 그의 예술관을 다룬 바바라 쿠젠베르그의 다큐멘터리 영화, 테라코타 조각, 신작 회화까지 작가의 작업을 방대하게 아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