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법인일송학원이 1971년부터 시작한 사회공헌활동을 총망라하는 ‘학교법인일송학원 사회공헌사 ‘보이지 않는 따뜻한 울림’’(이하 ‘울림’)을 출간했다.
‘울림’은 학교법인일송학원(이하 일송학원) 산하 한림대 의료원, 한림대,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한림성심대학교, 복지관 및 복지센터 6곳 등 의료기관-대학-복지관이 삼위일체가 되어 1971년부터 2018년까지 시행한 사회공헌 활동의 방대한 역사을 기록했다.
사회공헌 역사만을 정리해 발간한 것은 국내 사사(社史) 분야에서 최초 사례다. 일송학원 윤대원 이사장은 “기업이 공익과 사회적 가치의 창출을 형식적이거나 부속된 사업으로만 여기지 않았는지, 반성해 보는 계기로 삼자는 생각"에서 ‘울림’ 발간을 추진했다고 밝혔다.
의사가 필요한 곳에 찾아가다
‘울림’에 기록된 일송학원 사회공헌 사업의 역사는 방대하다. 그리고 그 방대한 역사의 전반부는 일송학원과 한림대학교를 설립한 명예이사장이며 대한민국 1세대 의사였던 고 일송(一松) 윤덕선 박사(1921~1996)의 인생사와 궤를 함께한다.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할 뿐, 의료, 복지, 사회안전망 등등은 남의 이야기로 여겨지던 시절이다.
윤 박사는 세상과 삶의 튼튼한 주춧돌이 되겠다는 어린 시절부터의 좌우명에 따라 일생을 보건 복지와 교육 발전에 힘썼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일송학원을 자라게 했고, 40년 이상 사회공헌 사업을 이어가게 했으며, 나아가 우리나라 보건 복지 정책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윤 박사는 가톨릭 신앙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식민지 치하 경성의학전문대학을 나와 백인제 외과병원(현 백병원)에서 수련의 생활을 시작했다. 1945년 고향인 평안도 용강에 ‘성심의원’을 개원해 운영하다가 1948년 월남하여 충남 홍성에 새롭게 ‘성심의원’을 개원했다.
한국전쟁 발발로 피난 생활을 하다가 서울 수복 후 미군 야전병원에서 근무했고, 휴전 이후 한미재단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3년간 미국에서 수련했다. 1956년 귀국한 그는 성신대학 의학부(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의 유일한 전임교수로 재직하면서 성모병원 외과의사로 근무했다.
지방 의원 의사일 때부터 시골 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윤 박사는 의대 교수이자 성모병원 의무원장으로 근무하는 동안에도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꾸준히 돌봤다. 틈나는 대로 수녀원이 경영하는 시골 병원 무료 진료를 다녔고, 자기 아래의 교수진과 전공의를 백령도, 연평도 등의 오지에 파견했으며, 나병 환자 요양원도 자주 찾았다.
1966년 윤 박사는 명동성모병원장 직과 가톨릭중앙의료원 의무원장 직을 모두 내려놓고, 의학 연구와 교육, 진료를 통한 사회봉사라는 자신의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1968년 사단법인 한국의과학연구소를 창립했다. 그리고 개인이 세운 국내 최초의 민간 종합병원인 필동성심병원(현 중앙대학교병원)을 개원했다.
한국의과학연구소는 정부가 주도하지 못한 우리나라 영양실태조사를 실시했고, 의학 종합지 ‘한국의과학’을 발간해 무료 배포하는 등 병원 경영 외에도 국내 보건의료 발전을 위한 활동을 진행했다.
외상으로 병원 짓고 의료봉사 광폭 행보
그리고 1971년 12월, 서울 영등포에 종합병원인 한강성심병원(현 한림대학교 한강성심병원)을 개원했다. 이는 한강 이남에 세워진 최초의 민간 종합병원이었다.
당시 영등포구는 지금의 서초·동작·관악·영등포·구로·금천·양천·강서구를 포함한 거대한 지역으로, 서울 인구의 4분의 1이 모여 살았지만, 의료 혜택은 턱없이 부족했다. 한국의과학연구소 이사진은 필동성심병원의 부채가 많이 남았다며 이곳에 병원을 또 짓는 것을 반대했고, 이에 윤 박사는 독자적으로 계획을 추진했다.
윤 박사는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모래밭을 수월하게 구입했다. 그러나 건립 비용이 없어 한일개발(현 한진중공업)에 대금을 외상으로 하는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한일개발은 당시 막 사업을 일으켰고, 정부 사업을 따내기 위한 실적이 필요하던 터라 윤 박사의 소문을 듣고 ‘선(先) 설립·후(後) 보상’이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먼저 한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은 1~2년 만에 안정권에 들어섰다. 그렇지만 초창기에는 이익이 나도 건설비를 갚는 데 상당액을 써야 했기에 운영비도 빠듯한 여건이었다. 그런데 한강성심병원은 반년도 되지 않아 본격적인 의료복지 사업을 펼쳐 나갔다,
1972년 4월 사당동을 시작으로 월 2회씩 의료 사각지대를 직접 찾아가는 순회 무료 진료를 진행했고 8월부터는 자선 진료권을 배부하기 시작했다. 1973년 1월부터는 해마다 무의촌 무료 진료 활동을 진행했다. 당시 장마철이면 수해를 입는 지역이 많았는데, 한강성심병원은 1974년 9월 전남 영암을 시작으로 수해가 발생하는 지역으로 의료진을 파견했다.
아낌없이 배부한 자선 진료권을 들고 찾아오는 무료 환자가 점점 늘어났다. 자선 환자만을 위한 별도의 치료기관의 필요성이 커졌다. 윤 박사는 1974년 4월 ‘성심중앙유지재단’을 설립하고 이듬해 1월 영세민을 위한 무료 병원인 ‘성심자선병원’을 개원했다.
최초의 민간 주도 무료 병원 운영
휴전 이후 대한민국은 국가재건 사업과 근대화 사업 등을 펼치면서 국공립병원이나 시립병원에서 무료 병동을 일부 운영했지만 수요에 비해 제공되는 무료 진료 혜택은 턱없이 부족했다. 민간 무료진료기관은 대부분 선교사나 교회 등 종교 단체가 주도해서 운용했다. 전쟁 중 피난처였던 부산에 1950년 세워진 메리놀수녀병원, 1951년 영도구 영선동 산 중턱에서 천막 진료를 시작한 복음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서울에서는 1972년에 원조기관인 한미재단과 USOM의 후원으로 세워진 한미병원이 무료자선병원이었다. 순수 민간 의료법인이 세우고, 민간 종합병원이 운영한 무료자선병원은 윤 박사가 세운 성심자선병원이 국내 최초였다.
성심자선병원은 1975년에만 1866명의 환자를 외래진료했고, 484명이 입원 치료를 받았으며, 수술 환자는 308명이었다. 이듬해에는 외래 2580명, 입원 586명, 수술 352명이었다. 이후 건강보험이 확대되면서 운영 명분이 약해져 1982년 문을 닫을 때까지 7년 반 동안 성심자선병원은 모두 9만 9744명의 환자를 무료로 진료했으며, 그 비용은 약 17억 5천만 원 정도로 추정된다. 이를 통계청 발표 연도별 소비자물가지수를 반영하여 2018년도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116억 원에 달한다.
또 한강성심병원은 1972년 4월부터 2018년까지 총 13만 5668명의 무료 환자를 진료했고(순회 및 원내 포함), 1995년부터 지원한 진료비는 총 1086억 원에 달했다. 연례 무의촌 활동은 1973년부터 2002년까지 총 578명의 의료진을 파견해 3만 5482명을 진료했으며 24번 수해 지역을 찾으면서 총 462명을 파견하여 1만 1629명을 진료했다.
의료복지 넘어 종합사회복지 실천
윤 박사는 그동안 명동성모병원, 필동성심병원, 한강성심병원 등을 모두 성공적으로 운영한 수완을 높이 평가받았다. 성심중앙유지재단은 이를 바탕으로 재정위기에 놓인 서울동산병원(훗날 동산성심병원으로 개칭)을 인수하고, 강남성심병원(현 한림대학교 강남성심병원)도 추가로 개원했다. 또한 천주교의 요청으로 미국령 괌에 이 섬의 유일한 종합병원인 마리아나메디컬센터를 개원하면서 해외에 진출한 최초의 국내 민간 의료기관이라는 타이틀도 갖게 됐다.
재단은 병원 사업과 무료 진료 봉사 외에도 시각장애인 점자도서관 운영, 양성 나환자촌을 지원하는 천주교 구라회 인수 등의 사회공헌사업을 펼쳤다. 또한, 의과학연구소, 인간과학연구소, 북한의학연구소 등을 설립해 한국 의학의 발전 및 국민 건강 증진에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윤 박사는 1980년 학계, 정계, 의료계의 명망 있는 인사들에게 제안해 ‘국민을 위한 의료’라는 기치를 내걸고 서울보건연구회를 창설했다. 서울보건연구회는 우리나라의 보건정책 및 의료제도 전반에 걸친 문제점, 2000년대 국민보건 제도 등에 관해 분석, 논의하는 세미나를 수차례 열었고, 38명이 교수가 참여해 이러한 논의와 연구를 집대성한 ‘보건백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1981년 12월, 서울 남부의 대표적인 빈민 집단 거주지역이던 난곡(신림7동)에 ‘성심중앙유지재단 부설 신림종합사회복지관(이하 신림종합복지관)'을 설립했다. 신림종합복지관은 순수 민간 의료법인이 자체 재정으로 도시 영세민을 위한 보건의료와 복지사업을 통합하는 국내 유일, 국내 최초의 시도였다.
도시 영세민 문제에 대한 정부의 체계적 접근이 부족하던 시절에 신림종합복지관은 성심중앙유지재단의 사회복지 인력과 재정을 투입해 영세민을 위한 가정간호 사업, 저소득층 청소년 장학 사업, 취업 알선 및 생계 지원, 저소득층 여성과 노인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계속 개발해 나갔다. 재단 산하의 병원을 통한 보건의료와 복지관을 통한 체계적인 종합복지가 서로 시너지를 발휘해 나간 사례로 향후 정부 및 국제적 사업의 방향을 제시하고 종합복지 정책의 모델을 개발한 사업으로 평가받는다.
의료, 복지에 이어 교육으로
한국의과학연구소에서부터 맺은 중앙대학교의 협약 관계가 1977년 중단됐다. 윤 박사는 의료 사업 외에 교육과 연구의 기능까지 수행할 수 있는 대학병원의 필요성을 언제나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히 미국령 괌에서 마리아나메디컬센터를 개원, 운영한 경험은 국제적인 의과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선진국의 교수진을 과감하게 초빙하고,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개발도상국의 학생들을 유치해 저소득 국가의 의료 수준을 끌어올려 더 많은 환자를 치료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윤 박사는 인천에 이어 충주에서 의과대학을 설립하고자 추진했지만 번번히 무산됐다. 우여곡절 끝에 성심여자대학으로부터 춘천 캠퍼스 인수를 제안받은 것을 계기로 의대 설립 계획은 다시 본궤도에 올랐다.
1981년 2월 성심중앙유지재단 이사회는 학교법인 설립과 대학 설립 추진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이듬해 1월 윤 박사의 아호를 딴 학교법인일송학원과 한림대학(현 한림대학교)을 각각 설립하고 3월 제1회 입학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춘천간호전문대(현 한림성심대)도 인수했다.
윤 박사는 대학의 사명을 ‘연구, 교육, 사회봉사’라 정의하고 “대학은 돈을 버는 곳이 아니다. 끝없는 투자만이 있을 뿐”이라는 지론 아래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다. 한림대학은 개교 15년 만에 전국 대학 10위권으로 평가받는 지방 명문 사학의 지위를 누리게 됐다.
윤 박사의 장남인 윤대원 일송학원 이사장은 부친의 뒤를 밟아 외과 의사로 살아왔고 ‘주춧돌’의 뜻도 이어받아 사회공헌 사업을 꾸준히 확대해 왔다. 윤 이사장은 부친이 걸어온 길에 대해 “물질적 이상의 가치관과 이타적 삶을, 다시 말해 거인의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회고하고는 이 책을 통해 “일송의 삶을 되짚어보며, 또 한 번 인류 역사의 시간 속에, 격변기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으로 주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