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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35) 김윤철 개인전 ‘글레어’] “내 작업은 모르는 물성 경험시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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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58호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2019.11.25 09:10:29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진행된 김윤철의 개인전 ‘글레어(Glare)’에는 관객을 압도하는 예술적 오브제들이 전시되었다.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에 존재하는 것 같은 작품을 앞에 놓고 그것의 정체를 온전히 파악하거나 그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리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저 오라(aura)를 발산하는 물질로 이루어진 작품들을 시각(몸의 감각)을 이용해 경험하는 데에 집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모든 것이 동등하게 공존하는 수평적인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과 징후들을 경험하면 된다고 말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작가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더 갤러리’ 이번 호에는 물질적 상상력을 실현시키는 작가 김윤철과의 대화를 충실히 옮겨본다.

Q. 전자음악을 전공했다. 작업을 위해 과학적인 과정을 선택한 것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을 것 같다.


A. 그런 것 같다. 작곡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했을 당시에는 전자음악을 잘 몰랐다. 클래식 음악 작곡가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현대음악을 듣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음악과는 매우 달랐다. 사실적인 정물화를 그리러 간 사람에게 뒤샹(Marcel Duchamp)을 보여주는 격이었다. 당시 그 정도로 충격을 받았었다. 도와 레 사이에 몇 십 개의 음을 만들어 곡을 쓰는 것을 보며 12음계를 벗어나는 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존 케이지(John Cage)에 따르면 소음도 음악이다. 음악사와 미술사가 엮이는 지점도 있었다. 또한 학생 시절 수학을 굉장히 좋아했다. 그런데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음악을 들으면 전개되는 방식이나 형식이 수학적이다. 내가 바흐를 좋아하다 보니 그의 음악을 분석하게 되었는데 숫자적이었다. 그냥 감성으로 쓸 수 있는 곡들이 아니었다. 바흐가 꾸준히 곡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추상적인 수학 작업을 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음악이 숫자로 표현 가능하고, 수로 인해 형식이나 음악의 색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전자음악을 선택하게 되었다.

내 작업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크로마(Chroma)’(2019)는 엄청난 수학적 결과물이다. 그러고 보니 전자음악은 지금 내가 하는 작업과 닮았다. 클래식 음악을 작곡할 때에는 기존의 악기들을 이용한다. 작곡가가 새로운 악기를 만들 필요가 없다. 미술도 마찬가지이다. 비디오 아트를 위해 작가가 카메라를 만들 필요는 없다. 그냥 매체와 재료를 구하면 된다. 그러나 전자음악은 곡을 쓰기 전에 소리를 만드는 과정이 있다. 소리를 만들어 그것으로 곡을 쓰니 하나의 과정이 더 있는 거다. 현재 나의 작업에도 물질(재료)을 만드는 과정이 있다.
 

김윤철 개인전 ‘글레어(Glare)’ 전시 전경. 사진 제공 = 바라캇 컨템포러리
김윤철 개인전 ‘글레어’ 전시 전경. 사진 제공 = 바라캇 컨템포러리

Q. 과학과 맞닿아 있는 작품임에도 연금술이나 마법의 영역이 떠오른다. 전시를 소개하는 글이나 이전에 진행된 작가의 인터뷰들을 읽기 전부터 그와 같은 인상을 받았다. 과거에는 연금술이 과학처럼 여겨졌겠으나 오늘날은 비합리적인 마법과 같은 것으로 인지되기에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예술적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가능한 일 같다. 과학적 과정을 거치지만 명확한 정답이 아닌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혹은 감정적인 울림을 주는 작업을 선보인다.

A. 나의 작업에 대해 어떤 해석이 나와도 괜찮다. 예술은 다양한 의견을 생성하는 것이다. 실제로 내 작업에는 과학적이고 신화적인 상상들이 혼재한다. 근원적인 것들을 들여다보는 작업이니 종교적인 느낌을 받는 관객도 있다. 예술은 전적으로 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직관적인 세계다. 과학적인 흔적이 보이지만 감각으로 드러나는 예술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전시된 작품들에서 연금술적이란 인상을 받는 것 같다. 생경한 물질을 경험시키는 것 역시 영향을 주었을 거다.

내가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상을 받고 프로젝트를 진행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김윤철이란 작가가 예술과 과학의 만남을 이뤄내고 과학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질료와 물질에 관한 작업을 하다 보니 정량화하고 과학적인 실험 장치를 사용해야 할 때가 있다. 자연히 과학적인 방법론이나 세계관의 영향도 담긴다. 그러나 과학적 과정이 포함되었다고 해서 나의 작업이 과학적인 이론을 시각화하는 것은 아니다. 수량화되는 실험이 반복되는 세계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나의 작업은 과학을 위한 예술도, 예술을 위한 과학도 아니다. 나는 내 작업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과정과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김윤철, ‘크로마(Chroma)’, 200 x 150 x 150cm, 아크릴, 알루미늄, 고분자, 2019, 사진 제공 = 바라캇 컨템포러리

Q. 작업 과정 혹은 결과물에서 실제로 과학적으로 효용성이 있는 무언가가 생산된 적이 있는가?

A. 내 작업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그쪽으로는 처음부터 뜻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적으로 기여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재료공학적인 측면에서 과학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실제로 연구를 함께 진행하자는 연락도 꽤 많이 받았다. 내 작업이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는 과학적 결과물은 아니지만 작업 과정에서 나오는 물질의 변화 등은 분명 과학의 언어로 이야기될 수 있는 것들이다. 직접적이진 않지만 간접적으로 과학과 관련된 행위를 촉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인류 문명이 시작될 때에는 예술과 과학이 분리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사회가 전문화되면서 분야가 세분화되었고 서로 만나고 소통하기 어려워졌다. 초학제는 이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내 작업이 초학제에 기여하는 점이 있다면 다양한 학자들이 만나서 이 시대와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지점이 생겼다는 정도일 것이다.

Q. 작업을 위해 과학적인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 과정에서 검증된 과학의 방식이나 과정을 무시하고 본인의 마음대로 실험이나 연구를 시도했던 적이 있는가? 과학이 아니니 과학자라면 생각할 수 없는 다소 얼토당토않아 보이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규칙을 벗어나는 과정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다.

A. 많다. 실제로 재료공학자들이 매우 황당해 하는 물질을 만들어낸 적도 있다. 예술은 특별한 용도를 갖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다. 나는 내가 상상하는 물질에 도달하기 위해 과학적인 과정을 거칠 뿐이다. 예술은 참과 거짓도 아니고 세상에 쓰일 수 있는 물질도 아니다. 애초에 과학자들이 상상하지 않는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 예술이다.
 

김윤철, ‘아르고스(Argos)’, 48 x 40cm, 가이거 뮐러 튜브, 유리, 알루미늄, 마이크로 컨트롤러, 2018. 사진 제공 = 바라캇 컨템포러리

Q. 작업 과정이 위험했던 적은 없었는가?

A. 현재는 위험 물질을 다루지 않는다. 위험한 물질을 다룰 때에는 해당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 허가된 실험실에서 진행해야 한다. 개인 스튜디오에서는 불가능하다. 또한 조금이라도 위험한 부분이 있으면 대중에게 공개하는 작품으로 이어질 수 없다. 재료를 충분히 알아야 하기 때문에 과거 빈(Vienna)의 실험실에서 다양한 물질을 연구하고 관찰했다. 실제로 전시장에서 공개하기 위해 약 3년이 걸린 작품도 있다.

Q. ‘작가는 다양한 물질을 연구해오면서 인간의 경험 영역을 넘어서는 또 다른 실재에 대한 상상과 창조의 가능성을 보여줘 왔다’는 전시 소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한다.

A. 쉽게 설명하면, 과거 아프리카처럼 더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얼음을 상상할 수 없었다. 얼음은 그들의 감각과 경험의 세계 너머에 있는 것이었기에 그들이 얼음을 처음 봤을 때 물이 아닌 완전히 다른 물질이라 생각했을 거다. 우리는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 안에 갇혀 있다. 비슷한 예로 같은 별을 보고도 지역에 따라 다른 별로 인식하고 각기 다른 이름을 붙였던 경우도 있었다. 나의 작업 대부분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혹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물성을 경험시키는 것이다.
 

김윤철 작가. 사진 제공 = 바라캇 컨템포러리

Q. 물질을 다루는 작업을 하고 있는 만큼 생성과 소멸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할 확률이 높을 것 같다. 작가가 생각하는 소멸(죽음)이란 무엇인가?

A. 나는 죽음을 자주 생각하고 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사춘기 시절 갑자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했었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유일한 돌파구는 음악을 듣는 것이었다. 이후 죽음이 나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던 사건이 있다. 바흐의 곡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Komm, süßer Tod)를 검색하던 중 독일어로 죽음을 의미하는 ‘토트(tod)’를 한글 자판으로 치면 ‘생’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죽음이 왜 고통이 아니라 달콤하다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었다. 토트가 생으로 전환된 것을 보고 나의 과거를 되돌아보았다. 아름다운 것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은 아름다움의 원인이다. 한때는 한 음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도를 치고 그 음이 사라지면 하나의 생이 시작해 끝나는 것 같았다. 관련해 펠트만(Morton Feldman)의 음악을 좋아했는데 한 음이 엄청 길고 음을 여러 개 쓰지도 않아서였다.

작가이기 때문에 내가 만들어낸 작품의 운명을 생각할 때가 있다. 물질과 시간성을 다루는 작업이기에 작업 속에서 죽음을 만나는 순간들이 있다. 찰나적으로 사라지는 작품도 있을 것이고 몇 십 년 이상 보존 가능한 작품도 있을 것이다. 물질의 생성과 소멸 모두 시간의 통제 하에 있는 거다. 아직 죽음이 달콤하진 않지만 이제 쓰지는 않다. 내가 그 길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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