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면 문화 편집위원⁄ 2020.08.19 14:11:35
현재 서울 세검정의 웅갤러리와 본갤러리-아트아리에서는 7월 29일 시작한 근대 화가 배운성(裵雲成 1900~78)의 30년대 작품 48점을 보여주는 전시가 ‘근대를 열다’라는 제목 아래 오는 부터 8월 29일까지 열리고 있다. 한 건물 내의 세 갤러리들이 연합하여 개최하는 이번 전시는, 한국인 최초로 유럽에서 미술 유학을 했던 화가이자 6.25동란 때 북으로 간 화가로서 격동의 20세기 동안 동양과 서양, 남과 북에 걸쳐 폭넓게 흔적을 남기며 활동했던 배운성의 전반기 작품 세계를 총체적으로 살펴볼 기회를 제공한다.
식민지 조선의 초창기 유럽행 미술 유학생
배운성의 인생행로는 한국의 20세기 전반 역사처럼 굴곡이 많다.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부친을 잃고 낙원동의 갑부 백인기의 집에 서생(書生)으로 들어가 중동학교를 마치고, 둘째 아들 명곤의 말동무 역할을 하며 1920년 같이 일본 도쿄로 가서 중앙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다가, 1922년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갔다. 마르세이유 도착 후 운성과 명곤은 독일 베를린으로 갔지만, 3년 후 명곤이 병이 나서 귀국할 때, 운성은 여비가 부족해 홀로 남아 1925~30년 베를린 국립미술대학을 다니며 미술 수업을 받았다. 씁쓸한 이별이었지만, 이때부터 운성 파이(Unsong Pai, 배운성의 독일식 이름)의 독자적인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미술대학 재학 중에 파리의 미술대회(살롱 도톤느)에서 목판화 ‘자화상’으로 입선을 한 배운성은 졸업 후 1933년 바르샤바 국제 미전에서 1등 상을 수상하고, 베를린, 함부르크, 프라하 등에서 목판화, 유화, 수채화, 수묵화로 전시를 하며 인정을 받았다. 1937년에는 파리로 가서 작업하며, 1938년 그랑 팔레 살롱전에서 여러 작품들이 입선을 했고, 유명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며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그는 1941년 귀국하여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홍익대 초대 미술학부장을 역임하고, 국전 추천 작가와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50년 전쟁 발발 후 월북했다. 그 후 그는 북한에서 50~60년대에 평양미술대학 교수와 조선미술가동맹위원회 화가로서 목판화 등 작품 활동을 펼쳤고, 70년대에 신의주에서 살다가 생을 마쳤다.
나머지 작품들은 어디에 있을까?
격변의 시대에 화가가 두 대륙과 분단된 한국의 양쪽에서 살다보니, 대략 300점 가량 된다는 배운성의 작품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게 되었다. 먼저 베를린-파리 시절에 그린 160여 점 작품들은 독일인 아내와 함께 파리로 갈 때(1937) 가져갔을 것이지만, 1940년 나치가 파리를 침공하자 서둘러 귀국했던 그는 작품들을 제대로 가져오지 못했다. 그래서 파리 어디엔가 남겨져 있던 작품들은 50여 년이 지난 90년대 후반(1998~99), 불문학을 전공하는 유학생 전창곤 씨가 48점을 발견하고 입수하여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극적으로 귀환한 48점은 2001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전시됐고, 이후 19년만에 이번 전시에 다시 등장한다. 현재 대전에서 프랑스문화원장을 맡고 있는 전창곤 씨의 노력으로 돌아온 이 작품들은 세 갤러리의 건물 4개층에 분산 전시되고 있다. 이 그림들은 화가의 베를린-파리 시절(1925-40년) 중 미대 졸업 후 그려진 작품들이므로, 제작년도는 대부분 30년대이다.
관람은 매표소(입장권 3000원)가 있는 2층부터 시작한다. 2-3층에 걸쳐 있는 웅갤러리 전시장에는 대부분 한국인들의 초상화들이 모아져 있다.
이들은 화가의 어머니와 화가 자신,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들로 보인다. 정면 벽에는 가장 널리 알려진 ‘가족도’(백인기 가족도)가 걸려있다. 전시된 작품들 가운데에는 가장 큰 작품(140 x 200cm)으로, 배운성이 어릴 때 의탁했던 백인기 씨 가족을 그린 것이다. 가장 왼쪽에 어색하게 서 있는 사람이 화가 자신이고, 둘째 아들 명곤은 가운데 안쪽에 조끼를 입고 있다. 대가족이 모여 사는 집안 식구들을 모두 정면 시각으로 그렸고, 앞쪽의 두 아이들만 다른 쪽을 보고 개는 반대쪽을 보고 있다.
배운성은 자화상을 몇 작품 그렸는데, 여기에 두 작품이 있다.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모자를 쓴 자화상’이다. 이 그림은 참 묘한 느낌을 준다. 그림 속 화가는 한복을 입고 무당 모자(갓)를 쓰고 슬쩍 미소를 띠고 있다. 왼손 검지는 입술에 대고, 그 앞에 우윳빛 액체를 담은 길쭉한 컵을 오른손으로 들고 있다. 배경은 어떤 무도회장인 듯, 작은 모습으로 보이는 여러 서양인들이 테이블 주변에서 서로 휘감고 춤을 추고 있다. 1930년대 초반 베를린의 몽환적인 연회를 배경으로 전면에 자신을 젊은 무속인처럼 그린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 작품 옆에는 또 흥미로운 작품이 있다. 그것은 당시 독일 뮌헨에 거주하며 독일어로 단편을 발표하던 재독 작가 이미륵(1899~1950)의 집을 방문하고 나서 그렸다는 ‘현대적 거리’이다. 이미륵은 배운성보다 조금 일찍 1921년 독일로 건너가서 생물학을 공부한 후 유년시절 이야기를 독일어로 발표한 작가인데(대표작 ‘압록강은 흐른다’가 독일에서 1949년 출간됨), 이들이 각기 베를린과 뮌헨으로 멀리 떨어져 살았어도 만났다는 것 자체가 놀랍기도 하다.
그런데, 배운성의 다른 그림들과 매우 다르다. 이미륵이 거주하던 집이 아니라, 집 주변 거리의 밤 풍경을 그린 이 그림에서 이른 저녁의 거리는 주로 검정과 검푸른 색에다가 한쪽 벽은 주황색이고, 어둡지 않은 하늘에서 달빛은 은근하다. 화가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투박함 속에 강렬함도 있으며 무거운 느낌을 주는 이 그림은 약간 표현주의 풍을 띠고 있다. 30년대 그의 작품들에서 보이듯이, 배운성은 20년대 독일, 특히 베를린에서 풍미하던 표현주의를 따라 하지 않았는데, 여기서 이런 요소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것도 이국 땅에 와서 살며 서로 만나기 어려운 동족 작가를 만난 다음에 그린 작품에서….
3층으로 올라가 보면, 또 다른 작품들을 보게 된다. 소품으로 제작된 어머니 초상화 두 점을 지나가면 동양적 화재(畵材)를 연상시키는 그림들이 있다. 눈이 쌓인 겨울 들판에 말 탄 선비를 그린 ‘귀가’, 개울가 옆 큰 나무 밑의 초당을 그린 ‘풍경’은 전통적인 동양화의 소재를 서양적 방식(유화)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옆에 서양의 기사(騎士)를 그린 ‘산속의 기사’와 ‘산속을 걷는 수도승’, ‘산속의 수도승’ 같은 작품들에서는 자연 속에서 홀로 길을 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주제화하고 있다. 물론, 이런 소재는 서양화에서도 있었는데, 17세기 네덜란드 자연풍경화와 19세기 전반 독일 낭만주의 회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화법에서는 동서양의 혼합적인 측면이 돋보인다. 특히 인물의 윤곽선들을 동양화의 가는 모필 붓으로 유연한 선으로 그려 넣기도 하며, 서양의 색과 동양의 선을 조화시키려고 한 노력이 보인다. 여기서 화가의 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배운성은 “서양인이 그리는 서양화(유화)와 동양인이 그리는 서양화(유화) 사이에 간극을 없애고 융화시키려 한다”고 했다. 기법적으로는 이해할 만하지만, 그럼에도 3층 작품들은 화가에게 다소 의외의 그림들이며 수도승과 기사(騎士)는 무슨 의미이고, 당시에 왜 그렸는지 제작 의도가 궁금해진다.
1층 본갤러리에는 한국 풍속화들
1층에 내려오면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의 그림들이 모여 있다. 전통 민속놀이들인 제기차기, 그네타기, 줄다리기와 빨래터의 여인들, 무당 등을 그린 것으로 한국의 민속과 풍속 그림들이다.
1920~30년대 유럽인들에게 이국적으로 보였을 이 작품들은 서양인들의 이국 취향(exoticism)에 기여하는 것들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화가는 멀고 낯선 유럽에서 고향과 가족, 우리 문화를 그리워하며 기억과 회상 속에서 그려야 했을텐데, 또한 그곳에서 생존해야 했던 고충도 있었을 것 같다.
지하 1층 아트아리에는 유럽인 초상화들
마지막으로 지하 1층에 내려오니, 유럽인들을 그린 초상화가 있다. 여기에 필자가 보고 싶은 그림들이 있었다. 이 그림들이야말로 화가가 당시에 현지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린 점에서 생생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입구로 들어와 바로 왼쪽에는 잘 알려진 목판화 ‘미쓰이(三井) 남작’(1935)이 있다. 당시 바르샤바 국제 미전에서 수상한 작품으로 일본의 기업인을 그렸으며 배경에 여러 대도시의 이미지가 들어있다.
다른 작품들은 유화로 당대 독일인들을 그린 초상화들이다. 그들 중에는 배운성의 독일인 아내 초상화 ‘화가의 아내’(1938)도 있다. 그는 베를린에서 미대 졸업 후 독일 여자와 결혼했다는데, 사진이 전하지 않아 그 모습은 알 수 없고, 이 작품 속의 인물이 그의 독일인 아내로 추측된다. 소파에서 편안하게 약간 왼쪽으로 기울여 앉은 모습으로 얼굴의 세부들, 눈썹과 눈, 코, 입술, 머리카락을 세밀하고 부드럽게 그린 것이 특징적이다.
다른 독일 여인들을 그린 ‘젊은 처녀’, ‘아네스’, ‘책 읽는 금발 여인’, ‘검은 옷을 입은 소녀’는 세부보다는 온화한 분위기를 강조한 듯한 느낌을 준다.
이와는 달리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인’과 아마 독일인 교수로 보이는 ‘루빈슈타인 초상’은 강렬한 인상과 자태가 표현된 초상화들이다. 같은 시대(30년대)에 그려진 초상화들이지만 서로 상이한 화풍과 기법을 보인다.
평가의 문제
4개층에 전시된 배운성의 작품 48점을 돌아보니, 대부분 유화이고, 화가가 주력했던 목판화는 1점밖에 없는 점이 매우 안타깝다. 사실 그의 판화 작품들은 유럽에서 수상을 많이 했고, 화가의 장점이 돋보였던 점에서 그의 주종목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런 판화들을 더 볼 수 없으니, 평가에도 어려움이 있다.
더구나 1941년, 무려 21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후 40년대 후반 서울에서 개최한 최초의 유럽 미술 유학생 배운성의 전시에 대한 당시 평가는 인색했다고 한다. “몇 작품을 제하고는 수작이 없다”는 등의 평을 들어야 했다. 왜 그랬을까, 당시 진정으로 좋은 작품이 없었을까? 혹은 그가 해방 이전 40년대 전반에 친일적인 그림들을 제작했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비난성 평가였을까?
배운성은 1920년대 베를린에서 풍미하던 표현주의를 따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1933년 나치 집권 이후 요구된 ‘독일 민족주의 예술’에 따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인상주의나 야수파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그의 유화 작품들에서는 전반적으로 온화한 화풍이 지배적이고, 20세기 초반 신낭만주의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1937년 파리로 이주하고 1940년까지 3년간 파리에서 국제 미전 출품과 유명 화랑에서의 전시 등으로 짧지만 매우 분주하고 화려한 작가 생활을 보내는 동안 그는 판화와 유화, 수채화, 수묵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유화를 하되 서양인의 유화와 차별되게 동양화 붓으로 유연하고 섬세한 필치를 가미하기도 했다.
배운성은 당시 유럽에서 지배적인 화풍이나 양식을 빨리 수용하고 체득하는 것보다는, 동양인의 서양화(유화, 목판화) 수용 문제를 더 고민했던 것 같다. 즉, 동양인이 하는 유화/판화는 서양인의 유화/판화와는 어떻게 달라야 할 것인가? 즉, 서양식 유화를 받아들이되 색과 선, 명암, 구도 등의 표현을 어떻게 달리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서양인의 유화’와는 다른 ‘동양인의 유화’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고 숙고였다. 결국 이는 ‘동양 미학이 내포된 유화’에 대한 고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배운성은 ‘근대를 열며’ 근대 화가로서 진지한 문제 제기는 한 셈이다.
전시 막바지가 되는 8월 19일(수)과 22일(토) 오후 3시에는 작품 소장가 전창곤 씨가 대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참여 희망자는 웅갤러리에 사전 신청 요망). 또 이번 전시를 계기로 도록이 곧 발간된다고 한다. 북한 시절 작품들을 제외하고라도 서울 체재 시기의 작품들이 새로 발견된다면 합쳐져 배운성에 대한 재논의와 재평가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