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영⁄ 2025.05.27 13:35:07
“혹시 사진 한 장만 찍어줄 수 있어요? 이 사진 보니 옛날 생각이 나서 너무 반가워서요.”
전시장에서 한 방문객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한 할머니가 전시장에 걸린 사진 한 장 한 장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다가 말을 건넨 것. 사진을 찍어주자 해맑게 미소를 짓다가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지…. 시간 흐르는 게 정말 빠르네요. 덕분에 추억 여행하는 기분이에요”라며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또 다른 한켠에서는 20대 방문객들이 인증샷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들은 “예전 건물이랑 패션도 세련됐는데?”, “신기하다”며 서로의 감상도 나눴다. 이처럼 전시장을 찾은 방문객 세대엔 많은 차이가 있지만, 이들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현장을 즐기고 있었다.
더 헤리티지의 시작을 함께하는 ‘헤리티지 뮤지엄’
신세계백화점 본점 헤리티지 뮤지엄 개관전 ‘명동 살롱: 더 헤리티지’ 현장을 찾았다. 신세계백화점은 옛 제일은행 본점을 재단장해 최고급 부티크 ‘더 헤리티지’를 4월 9일 오픈했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대전신세계 아트앤사이언스(Art&Science) 등이 세련된 디자인과 미래 지향적인 점을 내세웠다면, 더 헤리티지는 과거의 시간을 간직하면서도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 특징이다. 더 헤리티지라는 이름부터 ‘유산’이라는 뜻으로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건물 자체가 품은 역사에서 비롯된다. 더 헤리티지 건물은 옛 SC제일은행(조선저축은행)으로 1935년 준공됐고, 1989년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 유형문화재 71호로 지정됐다. 정유경 신세계 회장이 2015년 해당 건물을 매입, 전통과 현대의 감성이 결합된 공간으로 리뉴얼해 강북 지역 랜드마크로 육성하는 방안을 추진해왔다. 10년 동안 진행된 리뉴얼은 건물이 지닌 역사를 최대한 지키고 복원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예컨대 건물 내에 중앙 에스컬레이터는 첨단으로 교체했지만, 동남쪽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는 건립 초기 규모와 디자인을 유지했다. 또한 1930년대 근대 건축 양식을 최대한 지키기 위해 천장, 장식 등 당시 자료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복원했다. 한 예로 천장엔 조선저축은행 설립 당시 만들어진 장미 모양의 장식 문양인 로제트 석고부조를 드러냈다. 신세계 측은 “건물을 1935년 준공 당시와 90%가량 동일한 수준까지 복원했다”고 설명했다.
이 건물 4층에 헤리티지 뮤지엄이 자리 잡았다. 개관전은 ‘명동 살롱: 더 헤리티지’로, 신세계 본점 갤러리팀이 기획했다.
신세계갤러리 이한얼 큐레이터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옛 SC제일은행 건물은 서울 명동의 과거를 기억, 간직하고 있던 특별한 곳이다.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상업지역으로 은행, 백화점, 극장, 호텔 등이 밀집한 명동은 최신 유행을 알려주는 가장 트렌디한 곳이기도 했다”며 “전시가 열리는 장소의 특성과 역사적 현장감을 고려하고, 더 헤리티지로서의 특별한 출발 또한 알리고자 ‘명동 살롱’전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성두경·임응식·한영수가 소환한 시간들
전시는 1세대 사진가 성두경(1915~1986), 임응식(1912~2001), 한영수(1915~1986)의 작품을 통해 1950~60년대 명동을 2025년 현재로 소환했다. 이한얼 큐레이터는 “명동을 조망해보자는 전시의 취지를 잘 보여주는 세 작가의 작품을 모았다”며 “방대한 작품 속 명동의 역사를 현장감 있게 보여주는 작품들을 위주로 선별했다”고 설명했다.
전시의 시작엔 한영수의 작품이 자리했다. 1933년 개성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한영수는 한국전 참전 이후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는 리얼리즘 사진 연구단체 ‘신선회’에서 사진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 한국 경제의 급격한 성장과 함께 그는 한국의 광고 및 패션 사진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한영수사진연구소를 1966년 설립했으며, 수많은 사진 단체와 문화 기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99년 작고 후에도 2014년 아를포토 페스티벌 참가, 2017년 뉴욕국제사진센터 개인전, 2022년 로스엔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근현대미술사 특별전 ‘사이의 공간: 한국미술의 근대’ 등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한영수의 작업 세계에 꾸준한 관심을 보여 왔다.
그가 포착한 1950~60년대 명동 풍경엔 세련된 패션들이 눈길을 끌었다. 긴 원피스를 입고 명동 거리를 누비는 인물, 정장을 입고 비 오는 명동을 우산을 쓰고 다니는 인물들의 모습이 한적하면서도 평화로웠다. 여기에 명동 길거리에서 구두닦이를 하던 풍경 등 현재는 보기 힘든 모습들도 화면 속에 간직됐다. 이한얼 큐레이터는 “패션, 광고 사진을 비롯해 라이프지 중심의 리얼리즘 사진을 활발하게 찍은 한영수의 작품에서는 현대적인 구도와 감각을 바탕으로 촬영한 명동의 풍경이 눈에 띈다”고 말했다.
이어 임응식의 공간이 펼쳐졌다. 1926년 와세다중학교 입학선물로 카메라를 받고 사진에 관심을 가진 그는 일제강점기엔 신흥사진을 실험하면서 서정적이고 향토적인 소재를 담은 살롱 사진과 회화주의 사진을 주로 찍었다. 1934년 일본 ‘사진 살롱’지에 ‘초자의 정물’로 등단했고, 1946년부터는 부산에서 ‘부산예술사진연구소’를 결성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중 인천상륙작전 당시 종군사진기자로 참전한 뒤 1950년대부터 생활주의 리얼리즘에 몰두해 예술적 살롱사진을 배격하고, 현실의 모습을 직면해 담아내는 리얼리즘을 추구했다. 대표작 ‘구직’을 통해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당시 명동의 생활상을 살필 수 있는 작품들을 여럿 선보였다. 화면 속 인물들은 한복과 양복이 혼재된 풍경 속 어디론가 바쁘게 향하는 모습들이 눈길을 끌었다.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뒤엔 작은 돌담부터 높아지는 건물들까지 명동의 현장감을 보여줬다.
마지막으로 성두경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1915년 파주에서 태어난 성두경은 1935년 선린상업학교 전수과 졸업 후 죠지야백화점의 서적 카메라부에 입사하면서 사진과 만났고, 해방 이후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으로 옮겨 사진재료부를 직영했다.
1944년 전조선사진연맹 주최 사진 공모전에 입선했고, 1948년 서울시 공보실 촉탁사진가로 근무하며 시정 및 공보 사진을 담당했으며, 1951년 국군 헌병사령부 기관지 ‘사정보’ 사진기자로 종군해 재탈환된 서울의 폐허를 필름에 담았다. 1955년 반도호텔 안에 사진스튜디오인 반도사진문화사를 개업해 반도호텔이 폐업하는 1974년까지 운영하며 전업사진가로 활동했다.
성두경의 작품에서는 특히 명동의 당대 아름다운 건축 풍경들이 눈에 띄었다.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반도호텔을 배경으로 하얗게 쏟아진 눈, 1960년대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과 제일은행의 모습, 한국전쟁 때 파괴된 광화문 앞을 지나고 있는 시민의 모습까지, 현재와는 다른 그 시대의 풍경을 기억하는 이들은 회상하고, 처음 접하는 이들은 상상해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다.
“다양한 예술 스펙트럼 선보이는 전시 이어간다”
또 이번 전시가 특별한 점은 작가들의 작품을 영상으로도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AI(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작가들이 포착한 화면이 살아 움직이듯 생동감을 부여했다. 이에 따라 전시된 작품 속 우산을 쓰고 있는 인물이 걸어가는 모습도, 클로즈업된 인물의 깊은 눈빛도 볼 수 있었다.
신세계 한국상업사 박물관의 소장품 일부도 함께 전시하며 전시에 보다 생동감도 불어넣었다. 주판, 장난감, 통조림 통, 재봉틀 등 1950~60년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소품들을 전시장에 함께 배치한 것. 전시장에 깔린 음악 또한 1950~60년대 유행했던 가요와 팝송들로 선별했다. 전시 중간 중간엔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체험 요소도 마련했다.
뮤지엄 옆엔 역사관도 설치했다. 한국 유통 상업자를 조명하는 상설 전시로, 신세계 백화점 본점과 조선저축은행 일대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을 살필 수 있게 구성했다. 여기에 신세계가 과거 출시했던 PB(자체 브랜드) 제품들도 볼 수 있었다.
개관전 특징에 맞춘 전시 공간 큐레이팅도 인상적이었다. 4층 복도엔 건물 리뉴얼 과정에서 나온 일부 건축물 자재 등과 건물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사진들을 전시해 놓았다. 해당 공간은 복원한 천장, 기둥, 목재 징두리벽으로 인해 1930년대로 시간 이동한 듯한 현장감을 부여했다.
신세계 측은 “SC제일은행이 건물을 사용할 당시엔 기존에 있던 천장 장식을 가리기 위해 일반 석고보드로 마감했었다. 복원 공사를 진행하면서 석고보드 아래 1930년대 천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걸 발견하고, 이를 바깥으로 드러냈다”고 부연했다.
이 밖에 건물 5층엔 ‘한국의 미’를 알리는 ‘하우스 오브 신세계 헤리티지’ 전시 공간도 마련했다. 6월 15일까지는 우리 문화 속 보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살피는 ‘담아이르다’전을 연다.
신세계백화점은 각 지점에 갤러리를 운영하거나, 매장과 매장 사이에 작품을 설치하는 등 단순 쇼핑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공간을 찾은 고객과 소통하고, 특별한 문화 경험을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왔다. 헤리티지 뮤지엄 또한 이 행보에 함께 한다. 헤리티지 뮤지엄은 올해 라인업을 비롯해 내년 전시를 위해서 이미 여러 작가와 접촉 중이다.
이한얼 큐레이터는 “개관전이 건물의 역사를 보여주며 인사를 하는 자리였다면, 앞으로는 다양한 예술 스펙트럼을 보여줄 수 있는 전시를 이어갈 예정이다. 다음 전시는 첨단 기술을 활용한 미디어 아트 전시로 개관전과는 반전미를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장르뿐 아니라 작가 또한 한계를 짓지 않고 국내외 작가들의 작업세계를 다양하게 다뤄보고 싶다”고 말했다. 전시는 헤리티지 뮤지엄에서 5월 30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