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록달록 여러 색상의 빛을 밝히는 구슬들의 모습이 신비롭다. 천장에서 빛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듯한 구슬들도 눈길을 끈다. 반대로 다른 한켠에선 반대로 바닥에서부터 천장을 뚫을 듯 솟아오른 묵직한 기둥의 존재감이 상당하다. 모두 박은선 작가의 손에서 탄생한 조각 작품들의 모습이다.
대표작 ‘무한 기둥’ 비롯해 진화한 작업들
가나아트가 조각가 박은선의 개인전 ‘치유의 공간’을 마련했다. 이번 전시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작가가 3년 만에 갖는 국내 개인전이기도 하다. 작가는 “2~3년 전쯤에 가나아트 이호재 회장에게 전시 제안을 받았다. 한국 전시는 오랜만이라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다”며 “클래식하고 오래된 재료를 갖고 하는, 어찌 보면 미련할 수도 있는 작업이지만, 여기에 현대적인 감성까지 담으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작가의 작업 세계를 조망하는 본 전시에선 그의 대표작인 ‘무한 기둥(Colonna Infinita)’을 볼 수 있다. 무한 기둥은 대리석과 화강암을 기반으로 한 수직적 조형물로, 단순히 하나의 돌기둥이 아니라 두 가지 돌이 반복적으로 중첩되며 생성된 결과물이다. 무한 기둥은 한국과 이탈리아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열린 ‘2024-2025 한·이 상호문화교류의 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로마 곳곳에 전시되며, 국가 간 문화 교류의 상징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 조명을 사용해 조각의 영역을 확장한 최근작 ‘무한 기둥-확산(Colonna Infinita-Diffusione)’, 먹을 사용한 회화 신작까지 조각 작품 22점과 회화 작업 19점, 총 41점의 작품을 전시하며 더 범위를 넓혀가고 있는 그의 작업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먼저 전시장 입구를 지키는 3m 30m의 대형 조각 ‘생성-진화(Generation-Evoluzione)’는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롭게 제작한 작품이다. ‘생성’과 ‘진화’를 주제로 한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관객과 만난다. 언뜻 보면 쓰러질 듯 위태해보이지만, 오히려 굳건하게 우뚝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작가는 망치나 끌을 사용해 하나의 덩어리를 깎아내며 형상을 만들어내는 전통적인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작업 방식을 고안해냈다. 대리석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라라 지역에서 생산되는 두 가지 색의 대리석을 주로 사용하며, 때로는 화강암도 병용한다. 이 재료들을 수평으로 잘라 켜켜이 쌓은 다음, 깨뜨리고 벌려가며 의도적으로 틈을 만들어 낸다. 하나의 돌을 깨고, 다른 색깔의 돌을 깨서 에폭시로 판을 붙여 나가는 과정을 반복한 뒤 마지막에 형태를 다듬는다.
번갈아 쌓아 올린 서로 다른 색의 석판이 만들어 낸 줄무늬가 리듬감을 만들고 일부러 만든 틈은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데, 이때 서로 다른 색의 결합은 외국에 거주하는 작가 자신의 이중성을 상징한다.
작가는 “이탈리아에서는 대부분이 조각을 할 때 대리석으로 작업한다. 대리석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특징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화강암의 거칠고 강렬한 느낌을 좋아한다”며 “거친 화강암의 특성상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제작해야 하지만, 마감을 잘 해 놓으면 100~200년은 상태가 그대로 보존될 정도로 훌륭한 건축적 재료다. 또한 화강암이 지닌 고유의 색도 매우 아름답다. 대리석과 화강암 모두 각각의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무한 기둥을 평면화한 신작 회화 ‘무제(Untitled)’도 이 공간에서 함께 볼 수 있다. 수직으로 상승하는 기둥의 형태를 수평으로 전환하고, 먹의 농담을 통해 그 형태가 스며들고 배어 나오는 과정을 반복한 작품이다.
‘조각가’로 알려진 작가의 회화 작업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하지만 작가는 이 또한 조각의 연장선상이라고 짚었다. 그는 “입체적으로 표현 가능한 4면의 매력에 빠져 조각 작업을 이어왔지만, 대학 시절 땐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30년이 지났는데 어느 순간 벽에 여백이 보이더라. 여기를 그림으로 채워보고 싶었다”며 “그런데 내가 그리는 그림은 조각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그림을 그린다’고 하지 않고 ‘조각적 행위를 그림에 담는다’고 말한다. 조각을 벽에 옮겨가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작업했다”고 말했다.
빛을 품은 조각…희망을 전하다
전시장 2층에서도 새 시도를 이어간 작가의 작업들을 볼 수 있다. 눈에 띄는 건 매끈한 표면의 대리석 구가 알알이 매달려 기둥을 이룬 ‘무한 기둥-확산’이다. 조각가에게 가장 큰 약점은 ‘색’이라 할 수 있다. 자연 그대로의 자료를 활용하기 때문. 하지만 작가는 대리석 구 내부를 파내 8mm 두께로 만든 다음 LED 등을 담아 이 한계를 깼다. 이 작품은 코로나19 사태 당시 나온 작업이다.
작가는 “당시 이탈리아에 있었는데 상황이 심각했다. 3개월 동안 대문 밖으로 한 번도 나가지 못할 정도였다. 그 기간 동안 많은 생각을 할 기회가 있었다. 너무 당연하게만 여겼던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걸 보고, ‘내가 감사함을 잊고 살았구나’ 반성하게 됐다”며 “또한 절망적인 사회 분위기에 희망을 줄 수 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고, 대리석에 빛을 넣는 시도를 했다”고 말했다.
‘쿠보(Cubo)’는 일반적으로 바닥에 설치된 조각과 달리 천장에 매달린 조각이다. 또한 이 조각을 밀면 구슬들이 서로 부딪히며 소리가 난다. 앞선 작업이 시각적으로 새 시도를 했다면, 이는 청각까지 끌어들인 작업이다. 시각장애인인 안드레아 보첼 리가 작가의 조각 틈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듣거나 손으로 형태를 더듬으며, 오감으로 작품을 경험했다는 일화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한 작품이다. 작가는 “단순 눈으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만지면서 느끼고, 귀로 듣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특히 작가는 이 구슬들이 흔들리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쌀 한 톨 사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작업장에 한 분이 와서 작품 한 점을 샀고, 그러니 석 달의 여유가 생겼다. 석 달 뒤 또 벼랑 끝에 섰지만, 이번엔 또 다른 분이 작품 두 점을 샀고, 6개월의 여유가 생겼다”며 “그렇게 끝날 것 같다가도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와 계단을 하나하나씩 올라갈 수 있었다. 또 그렇게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좋아하는 걸 하기 때문이었다. 힘들었지만 불안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이렇듯 꾸준히 작업을 이어온 작가는 이젠 이를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5월 피에트라산타 중심부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미술관 ‘아틀리에 뮤지엄 박은선’을 개관했다. 미술관은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했으며, 이곳에 한국 작가의 이름이 걸린 공간이 세워진 건 처음이다. 또한 전라남도 신안군 자은도에 마리오 보타가 설계하고, 박은선의 작업 세계를 상징하는 무한 기둥을 주제로 한 ‘인피니또 미술관’이 내년 10월 말 개관할 예정이다.
작가는 “인피니또 미술관은 바닷가 바로 옆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올해 외관 작업이 끝나면 내년 구체적인 인테리어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며 “내 조각 작품을 비롯해 신안군의 소장품 등을 선보이게 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앞으로도 도전은 끝나지 않는다. 작가는 “30년 넘게 조각을 해오다 보니 ‘새로운 걸 해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그런데 깨고, 쌓는 것만으로도 할 것이 무궁무진하다. 또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고, 할 수 있는 게 조각”이라며 “욕심 부리지 않고 꾸준하게 지금처럼 작업을 이어가고 싶다. 앞으로도 ‘지켜봐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며 웃어보였다. 전시는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내년 1월 25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