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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세계에 무너진 소녀의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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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9호 ⁄ 2007.07.03 09:11:50

인간의 일생에서 결혼처럼 큰일도 없지만, 알고 보면 결혼같이 무서운 일도 없는 것 같다. 결혼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당연히 사랑이지만, 사랑만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결혼은 기본적으로 정치이며, 외교다. 서로 모르던 두 집안이 ‘가족’으로 결합한다는 의미에서도 ‘정치’지만, 지체가 높다거나 돈이 많은 집안의 결혼은 집안의 결합을 통해 서로의 이득을 챙기거나 시너지 효과를 누리려는 측면에서 ‘정치’인 것이다. 재벌과 정치인이 왜 ‘사돈’ 관계로 자주 묶이는 것이며, 재벌 간의 결혼 교류가 왜 많은 것인지 생각해보자. 소피아 코폴라 감독 연출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제정 프랑스 역사상 가장 많이 알려진 황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그녀는 상류사회의 기본적인 정치적이고도 외교적인 수단, ‘정략 결혼’으로 프랑스에 입성했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이 ‘정략 결혼’이라는 틈을 파고들어 새삼스럽게 그녀를 스크린으로 불러낸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사극의 소재를 꼽자면, 연산군과 장희빈 그리고 사도세자일 것이다. 그리고 이 스토리들에는 흥미롭게도 궁중 여인네들의 음모와 암투가 숨어있다. ■ 마리 앙투아네트와 ‘왕후’의 고민, 소녀들의 고통 아버지 후궁들의 음모로 어머니를 잃고 이성을 잃은 연산군, 후궁의 신분으로서 아들을 낳아 자식이 없던 인현왕후를 몰아내려 했던 장희빈, 후궁의 아들로서 세자에 책봉돼 아버지가 자신보다 어린 중전을 들임으로써 정치적 위기에 몰리는 사도세자. 왕가의 여인들은 그렇듯 왕의 후사를 낳아야 하는 의무가 있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본인의 신분상승을 노리고 친정이나 해당 당파의 정치적 이득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프랑스 왕가로 시집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도 아이를 낳아야 하는 의무는 역시나 가장 중요한 의무로 취급됐다. 부르봉 왕조로서는 그녀가 아이를 낳길 바라는 일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그녀의 친정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로서도 그녀가 아이를 낳아 입지를 튼튼히 함으로써 프랑스에서의 정치적 이득을 챙기려 했던 것이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전작인 <처녀 자살 소동>이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등에서 다루었던 주제들을 <마리 앙투아네트>를 통해서 다시 드러내려 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질투, 뒷담화에 둘러싸인 그녀가 겪는 고독. 그 고독은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마음 편한 막내딸로 살다가 삭막한 궁중정치의 세계에 갑자기 내몰리므로써 겪어야만 했던 ‘소녀’의 비애인 것이다. 아이를 낳아야 하기에 남편을 유혹하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남편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던 공주님답게 그 공허함을 사치와 도박, 영계(?) 페르젠 남작과의 사랑으로 채우려 하는 것이다. 그녀의 악명은 그렇듯 공허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영화에서 비춰지는 그녀의 삶을 보면, 사극을 보면서 친숙해진 조선왕조의 왕후들의 삶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느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살벌하기 그지 없는 궁중정치의 세계로 편입되면서 겪는 그녀들만의 고통.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남편(왕)으로 인해 겪어야만 하는 고통. 우리 역사 속에서는 조선의 5대 임금 문종이 세자 시절, 두 번째 정실 아내가 폐출됐던 사건이 주목할 만한데, 그녀는 병약한 문종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지 못하자, 궁녀들과의 동성애를 탐닉하다가 쫓겨난 것이다. 반면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레즈비언이 아니었기에 영계(?)를 선택했던 것 같다.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같다. 사랑을 얻으려다 실패하면, 좀 더 큰 자극을 원하기 마련이다. 단지 사랑받고 싶었을 뿐인, 하지만 화려함만은 유감없이 즐기고 싶었던 소녀들의 선택이었다. ■“빵이 없다구요? 그럼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요”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지루하다. 화려한 궁정, 제 아무리 아름다워도 2시간 가까이 눈 돌릴 틈 없이 보면 지루해진다. 이 궁정을 지루하지 않게 볼 관객층은 ‘소녀들’ 밖에 없을 것이다. 순정만화 속의 너울주름 드레스에 심취했고, 머리를 롤 모양으로 말아넘긴 왕자님을 기다렸을 그 소녀적 감수성만이 이 풍경을 2시간이 아닌 이틀 내내 보여줘도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흥미로운 것이 있다면, 폭정에 시달린 시민들이 그녀를 구체적인 분노의 대상으로 설정해 혁명의 바람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 영화에는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오스칼’이 등장하진 않지만, 어쨌든 프랑스 대혁명의 바람이 결말의 여운을 장식한다. 분노의 에너지를 조직적인 혁명의 에너지로 전환시키려면 구체적인 ‘악(惡)’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그녀가 직접 말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요?” 같은 이야기가 나와 시민들의 원성을 샀을 것이다. 혁명이나 쿠데타가 일어날 때는, 어쨌든 그 ‘자극적인 소문’이라는 것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영화 속에서 그녀의 입을 빌어, 그녀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상처받은 소녀’로 그려나갔다는 것이 간접적인 증거가 될 듯하다. 소녀의 세계는 고통과 고민이 없는 환상의 나래가 펼쳐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제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한 세계라 해도 그 세계 역시 욕심에 사로잡힌 인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 여전히 환상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소녀는 한 마디로 ‘바다 위를 날고 있는 나비’인 것이다. 어른들의 정치적 욕심과 탐욕은 소녀들의 갸날픈 날개를 꺾는 비극을 연출한다. 소피아 코폴라는,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정치의 세계에 휘둘려 날개가 꺾인 비운의 꽃나비였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박형준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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