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에는 권력의 부침(浮沈)과 국가의 흥망성쇠가 아침 이슬과도 같았다. 힘으로 정복하고 빼앗으며 무력으로 다스리는 패도정치(覇道政治)의 대결 판국이었다. 많은 책사(策士)와 논객들이 등장하여 승전(勝戰)의 방도(方途)와 치국(治國)의 도(道)를 앙고(仰告)하고 권모술수의 책략을 논했다. 그들의 주장에는 난세에 대처하는 현명한 지혜와 현실에 밀착된 사상이 있었다. 전한(前漢)말 유향(劉向)이 그것을 정리하고 편찬한 유명한 「전국 책」(戰國策)에는 『나라가 망하는 것은 현인(賢人)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쓸 줄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글이 실려 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한 나라가 망하는 것은 그 패망을 막을 인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인물을 기용하여 옳게 쓰지 않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다. 충신현인(忠臣賢人)들이 간신들의 횡포에 몰려 처형을 당하거나 정배(定配)살이를 하게 되니 그들의 지재(智才)와 덕성(德誠)은 나라를 위하여 쓸 기회와 무대를 잃게 된다. 이럴 때에 득세하는 것은 간신악인의 무리들인 것이다. 악인이 선인을 구축하는 사회적 그레샴의 법칙이 난세에는 통한다. 한말에 인재가 없어 나라가 망했는가. 인재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 인재들이 인재로서 등용되지 못한 인재불상응(人才不相應)이 그 원인인 것이다. 사람을 바로 쓰면 회사건 국가건 반드시 번영하고 부강해 지지만 잘못 쓰는 날에는 회사건 국가건 반드시 기울어지고 쇠망한다. 흥국의 길, 망국의 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인재 등용이 일을 좌우한다. 중국 촉한(蜀漢)의 왕이 된 유비(劉備) 현덕(玄德)이 남양(南陽) 융중(隆中)에 사는 제갈 공명(諸葛孔明)을 세 번이나 찾아가 그를 군사(軍師)로 모신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고사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지만, 은(殷)의 폭군 주(紂)왕을 토벌하고 태평성대를 이룩한 주(周) 무왕(武王)은 위수(渭水)에서 미늘 없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어부 태공망(太公望) 여상을 삼방배례(三訪拜禮) 끝에 군사로 모셔 건국 대업을 완수했던 것이다. 이처럼 옛날에도 인재를 구하기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였던 것이다. 초패왕(楚覇王) 항우에게 쫓겨 파촉(巴蜀)만리 오지(奧地)에 다다른 유방(劉邦)은 맨 먼저 인재등용의 문을 열어 13가지 조항으로 되어 있는 방문(榜文)을 내 붙였다. 1-병법과 도략(韜略)에 능통한 자는 대장(大將)으로 채용, 2-용맹 위압할 능력이 있는 자는 선봉장으로. 3-무예와 군대를 구사할 능력자는 산기장(散騎將)으로. 4-천문풍우를 점칠 줄 아는 자는 찬획자(贊劃者)로. 5-지리와 지세에 밝은 자는 향도자(嚮導者)로, 6-마음이 정직한 자는 기록자로, 7-임기응변의 재주가 있는 자는 의군정자(議軍情者)로, 8-변론과 설득이 강한 자는 유세객(遊說客)으로, 9-산법(算法)에 능한 자는 서기(書記)로, 10-시서다독자(詩書多讀者)는 박사로,11- 의능자(醫能者)는 국수(國手)로, 12-행동이 기민하여 남의 기밀을 잘 탐지하는 자는 세작(細作 : 간첩)으로, 13-전곡(餞穀)과 출납에 능한 자는 군수자(軍需者)로 채용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가난뱅이 한신(韓信)의 마음이 이끌려 지장(智將)으로 등장하여 유방이 천하를 통일케 한 것이다. 지금 항간의 사석에서는 차기 대선을 앞두고 『찍어줄 인물이 없다』『감이 될 사람이 누구인가』등 인물난 푸념이 들리는데, 막상 후보에 오른 자, 후보경선에 나선 사람들은 『내가 아니면 상대를 제압할 인물이 없다』고 큰소리들을 치고 있다. 쉽게 말해 정적 제압능력만을 과시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기존정권에 대한 염증만으로 정권교체가 되는 게 아니다. 새로운 비전과 정책만으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유방의 13개 조 구인방문은 바로 한나라의 치국 근간(根幹)이 된 것이다. 정책과 비전이 제시되어야 동조세력이 구름같이 일어나 그를 받들어 국가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박충식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