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 당연지정제는 모든 병원과 의원을 포함한 의료기관에서 임의대로 건강보험에 가입된 환자를 거절하지 못하게 한 제도로, 우리나라의 의료복지 선진화와 의료 양극화 해소에 많은 기여를 해온 제도이다. 우리나라 건강순위가 OECD 가입국 중에서 5위권 안에 드는 성과를 이룩한 배경에 건강보험 당연지정제가 일정 부분 기여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 건강보험 당연지정제가 폐지 또는 완화될 위기에 놓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공약에서도 밝혔듯이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를 폐지하고 ‘건강보험 민영화’를 찬성할 것이라는 분석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 복안을 완성하기 위해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인사를 주무장관 자리에 앉혔다. 김성이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이 그이다. 김성이 장관은 우리나라의 의료 관련 정책을 관장하고 만인을 위한 복지를 실현해야 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자격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국회의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당연지정제 완화는 장점도 있다”며 “공론화를 통해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하겠다”고 밝혀 당연지정제 완화 추진 의지를 내비쳤다. 김성이 장관이 정말 당연지정제의 완화에 긍정적이라 그런지, 아니면 질의자의 질문에 당황해서 나온 말인지는 모르나, 그는 이민 간 딸의 건강보험료를 수급하고도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할 정도로 건강보험에 대한 의식이 부족한 면모를 보였다. 이명박 정부는 민간 보험사의 법정 본인부담금 보장 제한을 철회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참여정부의 기존 민영 의료보험 규제 정책을 바꾸기로 결정하고, 현재 20%인 본인부담금을 더욱 늘릴 전망이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의 완화와 민영 의료보험의 확대 등 국가가 관리하는 건강보험의 운명이 기로에 놓이면서, 사회 일각에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일고 있으며, 국민들은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 당연지정제 완화·폐지 건강보험 민영화로 이어질 것 건강보험 당연지정제의 완화 또는 폐지에 가장 극심하게 반대하고 있는 단체는 보험소비자협회와 건강보험공단이다. 보험소비자협회는 당연지정제가 폐지되면 민영 보험사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약화되고 사보험의 난립으로 곧바로 이어질 것이라며, 당연지정제 폐지가 건강보험의 민영화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보험소비자협회에 의하면, 당연지정제가 폐지될 경우 의료시장이 급속히 개방되면서 사보험과 건강보험의 경쟁이 시작되고, 공기업인 건강보험공단이 자금력을 동원한 민영 보험사에 밀리면 고삐 풀린 건강보험 시장은 결국 자연스럽게 민영화로 귀결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당연지정제가 건강보험의 민영화로 이어질 경우, 병에 걸려 치료가 필요한 환자의 보험 가입을 보험사가 기피할 것이고, 결국 아픈 사람들은 의료 사각지대에 놓일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냈다. 건강보험공단의 자료에 따르면, 2005년에 건강보험공단은 108.7%의 지급률을 보였지만, 민간에 의해 운영되는 생명보험은 그 지급률이 64%를 밑돌았다. 따라서, 사보험에 건강보험을 내맡길 경우 환자들의 의료비 부담이 급증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 일부 개인 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의사들은 당연지정제가 폐지돼 민영화로 간다면 병원 내에서도 빈부의 격차가 심해질 수 있다는 걱정을 벌써부터 하고 있다. 소위 잘 나가는 병원, 유명세를 탄 의사가 있는 병원만 잘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관련 업계 관계자들은 “당연지정제 폐지가 민영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은 성급한 전망일 수 있지만, 사실상 의료시장이 갑자기 개방될 경우 충분히 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지금까지 건강보험공단에서 규제해 왔지만, 사보험에 선택권을 주는 쪽으로 확대한다면 시장경제의 논리에 따라 사보험의 영역이 그만큼 확대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정치권의 시각도 곱지 않다.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는 “이 대통령이 추진하려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완화는 건강보험을 적용받지 않으려는 부자 병원을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으로 활동 중인 전재희 한나라당 의원도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를 완화하면 돈을 잘 벌고 환자가 모이는 병원이 건강보험을 기피하게 된다”고 반대 의사를 명확히 했다. ■보험사와 대형병원은 반색 그러나 보험사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천명한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규제와 민영보험 활성화 방안을 크게 반기는 분위기이다. 보험사들이 판매하는 민영 의료보험은 병원 치료에 따른 일부 법정 본인부담금과 비급여 부문 진료비를 부담하는 기능을 한다. 민영 의료보험 규모는 한 해 1조 5,000억 원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방대하다. 건강보험의 당연지정제가 폐지될 경우를 대비해, 각 보험사는 대형 의료기관과 근무협약을 통해 특화된 의료보험 상품을 개발할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유럽 최대 민영 의료보험사인 DKV는 지난해부터 고소득자에 초점을 맞춰 건강보험 상품을 병원 네트워크와 연계해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기 건강보험에 대한 상품개발 경쟁도 치열해지는 추세이다. 교보AXA자동차보험은 다이렉트 장기 건강보험 상품을 처음으로 선보이며 본격적인 시장확대에 나섰으며, 각종 손해보험사들도 민영 의료보험이 활성화될 것에 대비해 상품 개발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추세이다. 당연지정제의 폐지와 그에 따른 건강보험 민영화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쪽은 의사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의사협회와 일부 대형병원 뿐이다. 이들처럼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보험수가를 결정한 데 대해 형평성이 낮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이들은 수지접합술(손가락 절단시 봉합하는 수술)의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수지접합술을 할 때 1억 원이 넘는 수술비를 받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보험수가가 적용돼 14만 원 정도의 수술료를 받기 때문에 국내외 보험수가 현실이 턱없이 낮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수지접합술을 필요로 하는 대다수의 환자들은 노동자나 빈곤층이기 때문에 보다 저렴하게 시술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의료복지 차원에서 옳다. 그러나 한 외과 전문의는 “내과 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도 빈곤층이 많다”며 “환자가 잘 걸리는 질환에 대해 특정계층에 수가를 낮게 책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한다. 이처럼 건강보험으로 인한 낮은 수가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곳은 외과뿐이 아니다. 저출산으로 경영난에 시달리는 산부인과에서부터 고가의 임플란트 시술로 안정적인 운영을 하는 치과에 이르기까지 이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일부 산부인과는 낮은 의료수가로 분만을 거부하고 있으며, 치과는 가장 많은 빈도수의 신경치료가 보험적용이 돼 불만을 갖고 있다. ■ 의료보장, 그리스 ‘최적’, 미국은 ‘최악’ 현재 그리스는 의료보장제도 중 사회보험방식(NHI:National Health Insurance)을 채택해 운영하고 있는데, 이 방식은 국민이 의료비를 책임지는 방법으로 보험 가입자와 고용인의 보험료로 재원을 마련하고, 국가는 2차적인 지원과 보험금 지급을 통해 국민 모두가 동등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게 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2003년에 발표한 ‘OECD 국가 의료보장 제도’에 따르면, 그리스 사회보험 가입자는 현물급여 소득의 2.55%, 현금급여 소득의 0.4%, 연금 수급자는 연금의 4%를 납부하고, 고용인은 현물급여 임금 총액의 5.1%, 현금급여 임금 총액의 0.8%를 납부하게 돼 있다. 의료보험 적용 대상은 상공업 관련 근로자, 도시 자영업자, 연금 수급자, 농업 근로자, 공무원, 보험료를 납부하지 않는 노인연금 수급자이다. 의료보험료 부과 소득 상한액은 연 2만5,192 유로, 한화로는 3,480만 원이다. 따라서 많은 서민층의 사람들이 보험 부담 없이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다. 상병수당을 받으려면 질병 발생 전에 100일 간 보험료를 납부했거나 이전 15개월 중 100일간 보험료를 납부하면 가능하다. 분만수당은 분만 전 2년 간 200일 이상 보험료를 납부했다면 수급을 받을 수 있다. 상병수당은 소득의 50%와 각 피부양자 상병수당의 10%가 되고, 처음 15일 간 최저한도액은 1일당 11.83 유로(한화 약 1만6,000원), 15일 이후 1일당 21.75 유료(한화 약 3만원)를 받는다. 분만수당도 소득의 50%와 각 피부양자 상병수당의 10%가 추가 지급되고, 최저한도 1일당 6유로(한화 약 8,200원)를 받을 수 있다. 반면, 미국은 선진국 중 유일하게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기초의료보장 제도가 없고, 국민의 70% 이상이 민간 건강보험에 가입되어 있다. 하지만, 높은 보험료와 낮은 혜택으로 OECD 국가 중 건강수준 순위가 23위로 최하위권에 해당한다. 오히려 한국은 5위권이다. 또한, 미국은 전국민의 약 16%인 4,700만 명이 의료보장에서 제외되었으며, 매년 200만 명 이상이 의료비로 파산한다고 알려졌다. 현재 건강보험의 민영화로 큰 피해를 보고 있는 한 미국 시민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왜 민영화를 하려는지 모르겠다”며 “현재 미국 내에서도 이 제도를 바꾸기 위해 정당마다 대통령 후보들이 나와 공약을 하고 있지만, 국민들이 크게 기대하지 않을 만큼 심각한 사회문제로 자리잡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한국과 미국은 경제수준부터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민영화가 어떤 피해를 일으킬지 모른다”며 정부 당국자와 관련 업계, 국민들의 신중한 논의를 당부했다. 특히, 미국 내 민영보험의 폐단을 지적하며 “개방을 하더라도 적절한 수위를 정해 놓지 않으면 미국과 같은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