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매혹적인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한국 전시 <클림트의 황금빛 비밀>이 2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막됐다. 클림트는 색채의 마술사로서, 또한 에로티즘의 예술적 승화를 이뤄낸 사랑의 작가로서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작가이다. 특히, 그는 여성의 이미지에 대하여 ‘팜므파탈’(치명적 매력으로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여인)이라는 문학적 개념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토탈아트’(총체예술) 개념의 예술적 행위를 화면을 통해 표현해 낸 작가이다. 여기서 말하는 토탈아트적인 예술 행위는 ‘장식적인 배경과 장신구들의 표현’, ‘금색을 위주로 한 화려한 색채 구성’, ‘건축적 느낌의 구도’ 등을 가리킨다. ■ 클림트의 토탈아트 찾아 떠나는 한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 이 전시는 동아일보사와 클림트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벨베데레 미술관(Belvedere Museum)이 공동 주최하며, 세계 11개국의 20여 개 미술관과 개인 컬렉터들이 소장한 유화 40여 점, 드로잉 및 포스터 원본 70여 점, <베토벤 프리즈> 및 작가 스페셜 인스톨레이션(installation) 등 110여 점을 선보인다. 이는 세계 최대 규모이자 아시아 최초의 클림트 단독 전시로서, 21세기의 마지막 전시라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 단순한 전시가 아닌 ‘대한민국과 오스트리아의 문화교류’라는 국가 외교 프로젝트의 하나로서 진행되는데 의의가 있다. 이번 전시에는 그의 대표작이자 ‘팜므파탈’의 결정체인 <유디트>(Judith), 이브에 대한 클림트식 팜므파탈의 해석을 담은 <아담과 이브>(Adam and Eve), 클림트의 사망 1년 전에 탄생한 <아기>(Baby), 클림트식 풍경화풍을 탄생시킨 작품 <아터제 호수 근처, 캄머성 공원의 산책로>(Avenue of Scholoss Kammer Park), 제14회 분리파 전시회(1902년)에서 전시장의 가장 중심부분에 설치된 맥스 클링거(Max Klinger)의 베토벤 조각상을 주축으로 알프레드 롤러(Alfred Roller), 콜로 모제(Kolo Moser) 등 분리파에 속해 있는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베토벤이라는 큰 표제 아래 창조해낸 <베토벤 프리즈>(Beethoven Frieze) 등 클림트의 예술과 인생이 반영된 대표작들로 구성되어 있다. 클림트라는 개인을 이해하려면 자신의 작품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전에 클림트가 말했듯이, 클림트의 작품을 봐야 비로소 그가 누구인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 부제인 <토탈아트를 찾아서>에서 말하는 ‘토탈아트’란, 회화와 건축에서 미학과 실용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예술 형태를 지적으로 이해하고 궁극적으로는 현실과 환영의 성공적인 융화를 이룩해내고자 하는 예술적 태도로서, 응용미술에 대한 관심을 실질적 행위의 시작으로 삼는다. 이는 1897년에 클림트를 초대회장으로 하면서 진보적인 작가들로 결성됐던 ‘비엔나 분리파’의 중요한 예술태도였다. 전시 전반은 클림트의 전성기 작품인 풍경화 및 여인 이미지로의 작업 행로를 밝혀내는 과정의 비밀을 추적해 나가는 흐름으로 구성됐다. 평생 동안 사랑을 테마로 예술과 대중이 함께 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던 화가 클림트의 미술사적 가치는 물론 인간적인 면모까지 함께 엿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5월 15일까지 103일 간 계속된다. ■“전시 만드는 초년생, 대형사고를 치다!” 구스타프 클림트 한국 전시 관계자와 나눈 인터뷰 3일 오후 구스타프 클림트 한국 전시를 관람한 후, 전시장 입구 앞 벤치에서 (주)문화에이치디의 김민성 실장과 짤막한 인터뷰를 가졌다. 김 실장은 벨베데레 미술관의 부관장 알프레드 바이딩거(Alfred Weidinger), 클림트 작가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제인 켈리어(Jane Kallir) 등과 함께 클림트 한국 전시를 기획하는데 큰 역할을 한 국내 굴지의 큐레이터이다. ■ 개막 첫날 관객의 반응은 어떤가? 어제(2일) 늦은 개막이었지만, 500여 명의 손님과 500~600명 유료 관객 등 총 1,000여 명의 관객이 방문해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 40, 50대의 관객도 많은 것 같다. 의외로 40, 50대 관객에게 반응이 좋다. 이번 전시의 타깃은 학생이 아니라, 예술 향유에 갈급(渴急)해 있는 20·30대의 여성들이었다. 따라서 교육적 테마보다는 예술 향유에 주제를 두고 전시를 구성했다. 40, 50대의 여성들은 간과하고 말았다. 놀라운 건 클림트가 어린이 관객에게도 인기가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그림의 주제보다 클림트 작품의 화려한 색채를 눈 여겨보는 것 같다. ■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된 동기는? 클림트 전에 대한 개인적인 욕망은 있었지만, 이 전시는 혼자 움직여서는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워낙 전시의 규모가 큰데다, 우리가 미술관이나 재단에서 작품을 그대로 가져오는 게 아니라 11개국의 20여 개 미술관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개인 컬렉터들을 일일이 만나 가져와야 했기 때문이다. ■ 어려운 점은 없었나? 먼저, 국내에서는 클림트 전문가를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어 애를 먹었다. 물론, 클림트의 팬으로 그에 관한 글을 쓰거나 번역을 하거나 하는 분들은 있지만, 이번 전시 규모에 맞춰 클림트의 생애에 대해 일일이 이야기해주고 어드바이스해줄 전문가는 없었다. 대신, 당대 미술사에 정통한 분을 학술위원으로 모시기로 했고, 현재 미국에 사는 클림트 연구가 가문의 큐레이터의 도움을 받았다. ■ 오픈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나? 사전작업을 하고 미술관과 개인 컬렉터를 방문해 그들과 관계를 만들어 가는데 1년, 본격적으로 작품을 선택하는데 1년 반, 넉넉잡아 2년 반 동안 준비해 3년째에 오픈하게 됐다. 주위에서 불가능할 거라는 말들이 정말 많았다(웃음). ■ 이번 전시에 대한 각계의 관심이 특히 많은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수차례 무산된 전시여서 그만큼 관심도 높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큐레이터로 몇 차례 전시를 만든 경험이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큰 전시를 만든 경력이 없다. 그야말로 전시를 만드는 초년생이 사고를 친 셈이다. ■ 아시아 단독 최초의 전시라는 점이 흥미롭다. 일본ㆍ중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 클림트의 위상이나 인지도는 어느 정도인가? 클림트의 위상은 우리나라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클림트는 중국의 회화들을 수집했고,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에도(江戶) 시대에 성행한 풍속화로, 주로 화류계 여성이나 연극배우 등을 소재로 하는 그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 클림트는 일본을 아시아라고 부를 정도로 아시아의 예술에 대한 경외가 깊었다. ‘자포니즘’을 동시대 및 후대 사람들에게도 많이 알렸기 때문에, 일본과 중국에서는 클림트가 굉장한 작가로 인식돼 있다. ■ 그렇다면 그들은 왜 진작 클림트 전시를 유치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전시를 접촉하려고 했을 때, 일본에서도 클림트 전을 유치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선택받은 건 우리 쪽이었다(웃음). 안타깝게도 이번 전시가 아시아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클림트 전이다. 이번 전시가 끝나면 클림트의 모든 작품이 벨베데레 미술관으로 돌아간다. 작품의 손상이 심해 벨베데레 측은 앞으로 100년 동안 작품을 반출시키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해외 관객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 못 보면 더 비싼 비행기 값을 지불해야 한다. 또, 아무리 클림트의 모국인 오스트리아에서 본다 하더라도, 루마니아·오스트리아·스페인·미국 등 전 세계에 흩어진 작품을 모은 이번 전시와는 규모가 다르다. ■ 드로잉 작품이 유난히 많아 화려한 색채의 클림트 작품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실망스럽지 않겠나? 클림트는 모두 4,000여 점의 드로잉을 그렸다. 클림트는 벽화를 그리는 공공미술 작가로 시작했기 때문에 유화는 몇 점 되지 않는다. 클림트의 유화는 공공미술까지를 평면작업이라 할 때 200여 점이 채 안 된다. 그런 와중에 이만큼이나 유화를 모은 것은 엄청난 일이다. 지금 전시한 유화는 그의 유화를 모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모은 것이다. 클림트는 인체의 모양을 연구하기 위해 많은 습작을 했다. 보다 완벽한 작품을 위해서이다. 드로잉은 클림트가 벽화작업을 하면서 얻은 훈련이라 할 수 있다. 가끔 드로잉이 없는 작품도 있는데, 나름대로 작가의 의지가 드러난 작품이다. 대부분의 드로잉은 클림트에게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드로잉을 간과하고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을 논할 수 없다. 드로잉의 과정을 보면 클림트가 어떤 식으로 작품에 접근해 나갔는지 알 수 있다. 특히, 대상을 봤을 때 대상에 잘 맞는 자세를 찾기 위해, 예를 들어 <요한나 슈타우데 부인의 초상> 같은 경우 모던한 여성으로서 ‘모던 엔젤’이라는 별명을 가진 신여성 요한나 슈타우데를 그리기 위한 과정이 드로잉에 나타나 있다. 과연 어떤 포즈가 신여성의 매력을 가장 멋있게 표현할 것인가? 구부리고 있는 자세, 정면, 누워 있는 모습 등을 다양하게 그리면서 모티브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자세를 찾는다. 그리고 이 여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의상을 찾고,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배경을 선택하고 그 기법을 찾는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여성은 아름다우며, 여성이 가진 매력 중 하나는 에로스적인 매력이다”라는 개념을 전달하는 순서가 클림트의 기본 기조이다. 클림트는 주제와 모티브 선택, 모티브를 그리는 조형 방법, 그리는 기법이 하나의 맥으로 움직이는 보기 드문 작가이다. ■ 이번 전시를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일단, “좋은 작품을 우리도 좀 보자”는 것이다. 솔직히, 중간에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는 일도 많았다. 문화약소국으로서 받는 무시라고 할까. 왕족이 소유한 그림을 가져와야 했고, 그 안에서 오는 상대적인 박탈감이 컸다. 처음에는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오기였고, 그것이 나중에 의지로 바뀌고, 이후 목표가 되어 여기까지 왔다. 작가들 중에는 작품세계가 다양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재미있게 맞아 떨어지는 작가가 별로 없다. 클림트는 이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작가이다. 관객이 이번 전시에 대해 딱딱한 미술 전시가 아니라 재미있는 영화 혹은 이야기 한 편을 보고 나가는 즐거운 공간이었다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한 테마가 필요했는데, 클림트만큼 딱 떨어지는 작가는 없었다. 세계에서 무한 투표를 하면 1위가 피카소이고, 2위가 클림트라고 한다. 이는 클림트가 얼마나 진취적으로 움직인 화가였고, 19세기를 살았던 20세기 인간이었는지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끝으로, 이번 전시가 아시아의 마지막 전시라는 데 의의가 있는 만큼, 관객들이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관람해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