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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가 말하게 하라’ 실천하는 의사

고려대병원 임도선 교수 “환자가 나서야 진짜 치료 이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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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156-157호 최영태⁄ 2010.02.08 17:07:30

‘내 말’을 들어주는 의사를 만나면 감기가 하루 더 빨리 낳는다는 연구 결과가 작년 7월 미국 위스콘신대학 연구진에 의해 발표된 바 있다. 의사가 환자 위에 군림하지 않고 얘기를 들어 준다고 느끼는 순간, 환자의 면역력이 왕성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사와 환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기 때문에, 미국의 어느 의대는 의대생들을 신체검사하고 “넌 암 말기 환자”라고 알려줘 충격을 주면서 절박한 환자의 입장에 예비 의사가 빠져보도록 교육한다고 한다. 모두 ‘환자 말을 잘들어 주는 의사’를 만들기 위한 노력들이다. ‘3분에 1명씩’ 환자를 봐야 하는 대학병원에서 환자는 입을 벙긋할 시간도 없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환자가 말문을 열도록 하기 위해 ‘별별 일’을 다 벌이는 의사가 한국에도 있다. 바로 고려대병원 순환기내과의 임도선 교수다. 그의 별난 행동은 최근에 그가 벌인 일 한 가지만 봐도 알 수 있다. 임 교수는 환자들을 만나면 서류봉투를 건넨다. 봉투 속에는 ‘심장병 수기를 써서 보내주세요’라는 당부의 글과 함께, 예시문 2개, 환자가 글을 쓸 흰 종이 2장이 들어 있다. 봉투에는 우표까지 미리 붙여져 있어, 환자는 자신의 경험을 써서 봉투에 넣어 우체통에 넣으면 된다. 심장병과 싸우는 환자들에게 수기를 쓰라니, 환자 입장에선 황당하기도 하다. 또 그런 글을 써보지 않은 환자에겐 글을 쓰는 일이 고통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임 교수는 “당선작에는 5만 원 상품권을 드립니다”라고 설득하면서 심장병 환자의 수기를 160개나 받는 데 성공했다. 자기 글 묶은 책 내려다 “중·고생이 읽어야 심장병 예방한다” 생각에 작가·만화가 설득하여 1년 고생 끝 만화로 펴내 수기 중에는 5년 전에 심장병 수술을 받았지만 몸 상태가 좋아지자 다시 방심하며 담배를 피우다 재발한 남자 이야기, 평생 술·담배 근처에도 가지 않았지만 심장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긴 할머니들의 경험담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임 교수가 이렇게 ‘안 해도 되는’ 고생을 사서 하면서 환자 수기를 모은 목적은 딱 한 가지였다. 심장병의 공포를 직접 겪고 그 공포를 벗어난 환자들의 입을 통해, 심장병은 어떻게 예방해야 하는지, 재발을 막으려면 어떤 행동을 피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주의사항은 의사가 그냥 말로 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말을 한다고 상대방이 다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고매하신 의사선생님이 하는 얘기를 환자들은 “또 잔소리”로 흘려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사가 아닌 환자가 하는 얘기는 ‘진짜 이야기’로 더 쉽게 일반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 심장병 중에서도 심근경색·심장마비 같은 경우는 ‘병을 아는 순간이 바로 세상을 뜨는 순간’이 될 수 있다. 평소 멀쩡하던 사람이 심장발작을 일으키면 치료고 뭐고 할 시간도 없이 바로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급사를 막으려면 ‘평소’ 심장병에 걸리지 않을 생활을 해야 하고, 문제가 드러나기 전에 막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사전 교육이 필요한데, 이 사전 교육이라는 게 의사의 설교로는 잘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임 교수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죽을 고비를 넘겨 겨우 치료를 해놨더니 퇴원하여 다시 담배를 피우다 또 심장혈관이 막혀 응급실에 실려 오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봐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서 임 교수는 철저히 ‘환자 눈높이’에서 말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했고, 자신이 직접 잔소리를 하기보다 ‘환자끼리’ 또는 ‘환자가 건강한 사람에게’ 말하는 방식을 구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노력의 첫 결실은 2009년 6월 발간된 임 교수의 만화책 <가슴이 아파요 - 우리 가족의 건강 만화>였다. 의사가 펴낸 만화책이라? 어째 앞뒤 단어들이 영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한 과정 자체가 하나의 만화다. 임 교수는 원래 심장병 예방을 일반인에게 알려줄 에세이집을 준비했었다. 어려운 의학 용어를 싹 빼고, 의사가 쓰는 에세이 형식으로 일반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고민 끝에 그는 방향을 수정했다. 사실 심장병을 예방하려면 중·고교 시절부터 담배를 피우지 않는 생활태도가 중요한데, “의사가 쓴 수필집을 중고생들이 읽겠느냐”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우표 붙인 봉투를 환자들에게 나눠주며 “심장병 이긴 얘기 좀 제발 써주세요” 부탁해 글 100개 모아 수기집 <심장에말걸기> 곧 펴내 그래서 그는 만화를 만들기로 했다. 이때부터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만화를 그릴 줄 모른다. 그래서 만화가를 고용해야 했다. 만화는 그냥 그리나? 아니다. 만화 스토리를 짜줄 스토리 작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임 교수는 스토리 작가도 고용했다. 그리고 자신이 써놓은 에세이를 보여주면서 “만화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일주일 동안 스토리 작가와 함께 병원에서 생활하면서 심장병 환자들을 현장에서 보여줬다. 만화는 만들어져 나왔지만, 고칠 데가 너무 많았다. 의사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인지, 만들어진 만화 중에는 의사가 말을 안 듣는 환자를 앞에 놓고 책상을 치면서 “아니, 이 사람이 정말”이라고 비난하는 등 현실과는 전혀 다른 장면들이 그려져 있었다. 임 교수는 “고쳐 달라”고 했지만, 스토리 작가는 “이런 극적인 상황을 넣지 않으면 만화가 안 된다”고 반박하면서 논쟁이 벌어졌고, 이런 수정작업에 시간이 1년이나 훌쩍 지나갔다. 그가 그냥 에세이집을 냈더라면 고려대병원 교수 임도선이 쓴 심장병 예방 글들은 1년 전에 이미 세상에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많은 사람이, 중·고교생까지 읽어야 심장병이 예방된다”고 고집을 피우며 스스로 고문당하는 1년을 떠안았던 것이다. 이런 고생 끝에 만화책이 나왔다. 만화책은 모두 5장으로 구성돼 있다. 심장병을 일으킬 수 있는 생활태도 다섯 가지, 즉 ▲흡연 ▲스트레스 ▲당뇨병 ▲가족력 ▲식습관을 각기 다른 장으로 묶어, 만화로 에피소드 하나씩을 보여주었다. 고생 끝에 만든 만화책이지만, 많이 팔지는 못했다. 초판 1쇄 1만 부도 다 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배당된 책 500권 중 400권을 털어 병원 복도에서 자선 판매한 뒤 수익금 400만 원 남짓을 어린이 심장환자 지원금으로 쾌척하는 등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책이 많이 팔리지는 않았지만 그의 정성을 갸륵히 여긴 탓인지, 2009년 말에 보건복지부는 그의 책을 ‘우수 건강도서’로 선정하고 표창했다. 임 교수는 “만화책으로 낸 이유는 중·고교생들이 읽어줬으면 해서였다”며 “교육청 차원에서 학생들에게 이 만화책을 읽도록 하면 심장병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 교수가 만드는 ‘일반인이 말하는 심장병’ 시리즈 2탄은 2월 중에 고려대 출판부에서 <심장에게 말 걸기 - 심장병과 싸워 이긴 100인의 이야기>로 출판된다. “환자의 가족·친구들, 그리고 장래의 환자들이 이 수기를 미리 읽고 심장병이란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한다”는 것이 그의 출판 동기다. “심장의 날 같은 행사에서 의사들만 연단에 올라 틀에 박힌 인사말 하는 게 무슨 소용 있나요? 환자가 나와 얘기를 해야 정말 ‘심장의 날’이 되지.” 임 교수는 최근에 싱가포르 출장을 다녀왔다. 그런데 그새 동창 하나가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는 부고를 듣는다. 이런 사태를 너무 자주 경험하는 그로서는 보통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읽을거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더욱 절감하고 있다. 임 교수의 꿈은 또 한 가지가 있다. ‘심장의 날’ 등에 열리는 행사를 완전히 환자 중심으로 바꿔주고 싶다는 염원이다. 심장의 날을 잡아 돈을 들여 행사를 하면 적어도 행사에 참석한 사람은 심장 건강 예방에 대해 뼈저리고 느끼고 집에 가야 할 텐데, 우리 실정은 도대체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심장병을 고치는 교수나 의사들이 연단에 나와 한마디씩 하고, 환자들은 진찰실에서와 마찬가지로 말 한마디 못 하는 꿀 먹은 벙어리로 좌석에 앉아 있다가 박수나 치고 돌아가는 ‘심장의 날’ 행사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 임 교수의 의문이다. 그래서 그는 반드시 하고 싶단다. ‘심장의 날’에 의사들은 좌석에 앉고, 환자들이 연단에 올라가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의사들은 환자의 경험에서 새로운 사실을 배우거나 깨닫고, 일반인들은 예방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 행사장을 나설 수 있는 그런 행사를. 만화책을 만들면서 고생을 사서 했듯, 또 글쓰기 싫다는 환자들에게 사정사정 부탁해가며 글을 받아내 책으로 묶어내는 일도 의사와 환자 사이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통로를 만들어내기 위한 임 교수만의 또 하나의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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